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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성장통> 14. 미리짜놓은 각본 4
이병초 시인  |  jbpost20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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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12  15: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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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노규 주치의를 만났다. 환자가 좀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의사는 내게 노규의 간肝을 찍은 사진 여러 장을 보여주었다.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사진들은 암세포 일부가 간에 붙어 있는 게 아니라 암세포가 간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있는 모습이었다.

노규에겐 쓸 약이 없어서 소화제만 주고 있다고, 내일 퇴원시킬 것인데 얼마 있다가 황달이 오면서 배에 물이 찰 것이고 그것으로 끝이라고 했다.

녀석은 웃으며 나를 반겼다. 별것도 아닌데 뭐 하러 왔냐는 투였다. 소주를 아무리 먹어도 취하지 않았던, 노래라도 한 곡조 뽑을라치면 음이 도저히 맞지 않아서 우리들 배꼽을 빠지게 했던 놈. 서울에 일보러 갔다가 잠깐 들르면 소주 먹여 보내며 기필코 차비를 손에 쥐어주었던 죽마고우. 얼굴에 그늘로는 설명이 안 되는 어떤 짙은 것이 끼어 있었다.

 

지난 몇 달 살이 쭈욱쭉 빠져서 좋아했다고, 몸이 얼마나 가뿐한지 날아다닐 것 같았다고 말을 꺼냈다. 그런데 살이 너무 빠져서 이건 아니다 싶었고, 동네의원에 갔더니 빨리 대학병원에 가서 초음파를 찍어보라고 하길래 뭔가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고 한다.

   
이병초와 박노규 

  “간암 말기. 그거 차라리 잘 되얐다. 수술허고 치료 받고 또 피 빼고 이러는 게 정말 지긋지긋허다. 병원의 ‘병’ 자만 들어도 털끝이 선다. 50년 살았으먼 많이 살았응게, 인자 느그들허고 마지막으로 소주 한잔 찐허게 허고 갈랑게 그리 알어라잉.”

녀석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이 세상은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것이 더 많도록 누가 짜놓은 것 같다.”라고 말을 꺼내어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앞도 뒤도 따지지 않고 무작정 뱉어낸 말이었다.

“근디 그때 어떻게 성산에서 빠져나왔냐?”

나는 고3 때 얘기를 꺼내들었다. 아무래도 그 시절 얘기로 돌아가야 녀석의 말발이 오를 것 같기 때문이었다. 당시 내가 김제 버스터미널 화장실에서 몇 놈을 쥐어박은 일이 있었다. 아끼던 후배가 A고 애들한테 입술이 찢어지도록 얻어터졌기 때문이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나는 김제 터미널로 향했고 무려 두 시간이나 짜식들을 기다렸다.

 

  세 놈이었다. 잇새로 침을 찍찍 쏘아대며 어슬렁거리는 똥폼새가 저것들 짓이 분명할 거란 직감이 들었다. 눈에 익은 통학생 두엇이 화장실로 들어가자마자 짜식들이 헌 삼베 바지에 방귀 새듯 거기로 스며드는 것이었다. 

짜식들이 주머니를 털려는 순간 나는 정확하게 통학생과 가장 가깝게 있는 놈의 배를 무릎으로 찍었다. 순간, 뭐여 이 새끼야! 짜식들은 덤벼들었고 나는 그 중 가장 큰놈의 대갈통을 박치기로 조졌다. 엉겁결에 당한 짜식들이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나는 한가운데로 파고들어 팔꿈치로 무릎으로 닥치는 대로 짜식들 턱이며 옆구리를 조졌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될 줄이야. 

결투장이 온 것이었다. 잔소리는 필요없다, 다시 만날 일도 없다, 김제터미널 근처 성산에서 연대장끼리 1:1로 맞장 뜨자! 결투장에는 김칠구란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 작은 학교지만 나는 연대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상대를 전혀 모르는 상황이고 짜식은 내게 얻어터진 놈들에게 내 키며 몸집이 작다 못해 쪼깐하다고까지 들었을 터였다.

 

   
 결투장이 온 것이었다. 잔소리는 필요없다, 다시 만날 일도 없다, 김제터미널 근처 성산에서 연대장끼리 1:1로 맞장 뜨자! 결투장에는 김칠구란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 사진은 폼나고 싶었던 열여덟 학장시절을 리얼하게 담은 영화 '바람'

“그려? 긍게 그 좆만헌 것헌티 조장났단 말여?”

김칠구는 이러면서 간단하게 내 숨통을 봐버리겠다는, 그러함으로써 친구 화풀이는 물론 화호고 연대장까지 밟아버렸다는 두 가지를 한목에 잡겠다는 심산일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김칠구는 나를 잘못 봤다. 내가 터미널 근처에서 똘마니 세 놈 때려잡았기로서니 그렇게 막볼 상대는 아닌 것이다. 싸움의 판수가 적을지언정, 키가 크다가 말았을지언정 나는 주먹을 짧게 끊어칠 줄 알았다.

순식간에 상대방 밑을 떠버리는 내 허리치기는 학교에서 정평이 나 있었다. 싸움판에 밀리면 가죽 허리띠를 풀어 휘두르거나 주머니칼을 꺼내어 위협하는 것들, 줄곧 재미나게 놀다가도 제 배짱 틀어지면 급우의 아랫배를 걷어차던 개호로새끼들은 내 친구가 아니었다.

힘없는 후배들 상대로 잔돈푼이나 뜯어먹는 똥벌레 같은 것들도 나는 상대한 적이 없었다. 상대가 누구든 정정당당하게 맞장떴고 쌈에 지면 깨끗하게 물러날 줄 알았으며 박치기든 허리치기든 쌈판에 맞춰 동물적 육감으로 만들어내는 일발필도 - 그 카운터 펀치가 최고의 쌈수라는 것까지 나는 알고 있었다.

성산에서 3, 4분 후 짜식의 숨통은 내 것이 될 것이었다. 짜식의 주먹질 발길질을 약올리듯 피하다가 득달같이 가슴 안쪽으로 파고들어 밑을 떠버릴 것이었다.

 

  혼자 나가고 싶었지만 노규와 함께 결투 장소로 갔다. 녀석은 내 오장육부까지 꿰뚫어보는 놈이었으므로, 대체 뭔 꿍꿍이냐고 오전 내내 볶아댔던 것이다. 하긴 맞장 한 번 뜨는데 몇 분이나 걸리랴. 공부는 피차 재미없는 놈들이니 김제로 바람이나 쐬러 가자 뭐 이런 투로 우린 산에 올라갔던 것이다.

약속 시간이 5분이나 남았을까. 시계를 언뜻 보려는데 눈앞 낌새가 어째 이상하다.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이 전기처럼 짜르르 몸에 닿았다. 뭐야 이거, 고개를 드니 아아 검정 교복을 입은 놈들이 까맣게 올라오는 것이 아니냐. <다음편에 계속>

 

   
이병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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