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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성장통> 14. 미리 짜놓은 각본 1
이병초 시인  |  jbpost20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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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05  16: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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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규는 잠들어 있다. 입을 조금 벌린 채로 편안하게 쉬고 있다. 눈곱만치도 누구에게 신세지거나 부담되는 소리를 해본 적 없던 놈, 입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운 놈이 간암肝癌 말기라니... 녀석의 생활이 위태위태하긴 했지만 이토록 빠르게, 아무런 대책도 없이 제 목숨의 끝을 볼 수는 없었다. 

불알친구이자 고등학교 3년 동안 짝꿍이었던 녀석. 보호자가 앉는 낮고 긴 의자에 나는 앉는다. 생生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듯 환자복 바지 밑으로 드러난 마른 정강이, 프레스에 잘려 손가락이 세 개만 붙은 오른손이 눈에 아프다.

 

  스물여섯 살 때던가. 녀석은 오른손에 붕대를 친친 감고 나타났다. 그 때 나는 붕대 감긴 손을 별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보름쯤 치료 받으면 나으려니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손가락 두 개가 뭉텅 잘려나갔고 접합 수술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남 얘기처럼 말을 조용히 내리까는 목소리엔 힘이 있었다. 지금 병원에 입원 중인데 퇴원을 하면 공장 사장과 재판할 것이라면서, 일하다가 손목이 날아가고 목숨까지 잃는 경우도 있는데 이 정도의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 뒤로 노규의 생활은 형편없이 뒤틀어졌다. 잘린 손가락 상처는 아물었는데 마음에 남은 상처는 치료가 더딘 모양이었다. 프레스공의 작업환경과 사고 시 그 처리가 노동자에게 어떻게 작동되는지 나는 잘 몰랐다. 

하지만 인권변호사가 있다는 것, 노동자를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자본가들과 재판을 붙는 당당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나는 노규가 이런 사람들과 만나기를 바랐고 노조를 결성하여 노동자를 제 노예로 생각하는 정신적 떼거지들과 맞장뜨기를, 그렇게 제 삶의 영역을 넓혀가기를 바랐다.

 

   
학창시절 교정에서 박노규(앉은 이)와 병초.

노규는 세상을 떠도는 모양이었다. 에어크리너 필터를 만드는 공장에서 기술을 배웠던 녀석은 그 기술 써먹기가 지긋지긋했는지 경기도 어디 산골짝 염색공장이라고 전화를 했고, 몇 달도 안 되어 속옷 만드는 공장이라고도 하더니 소식을 딱 끊었다.

 

  시간은 무작정 흘러갔다. 서른일곱 살인가 되던 해 봄에 녀석은 전주로 돌아왔다. 나이를 더 먹었다는 것 빼고는 변한 것은 없었다. 세파에 모질게 내몰린 흔적도 없었다.

“노동해방 그거 참 어려운 것이더라잉...?”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소식을 딱 끊었던 지난 10여 년 노동해방, 그 판에 뛰어들었더란 말이냐.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뭐가 안 되었는지 표정은 어두워 보였다. 세월을 작파해 버릴 작정이었는데 그것도 마음도 안 되더라고 고개를 저었다. 

마침 재운이가 통닭집을 정리하고 건축일을 시작했었는데 녀석은 재운이와 짝이 되어 건축일을 다녔다. 나는 저녁이면 짬을 내어 이 판에 어울렸다. 곱창집 노래방 야식집을 사흘이 멀다고 훑었고, 술에 섞인 시간을 구겨서 팽개치듯 낚시를 다녔다.

그 몇 개월이 내가 노규와 보낸 마지막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노규는 설을 쇠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고 그 이듬해 봄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술에 잔뜩 취한 채 수색 근처 육교에서 뛰어내렸다는 것이었다. 허리뼈가 부러지고 발목이 부러지고 내장이 파열되었는데 급한 데 먼저 수술하느라고 부러진 발목은 수술할 수 없었다고 했다.

 

  자신의 행동이 저주스러워서 그랬을까. 녀석은 내가 병실에 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15라운드를 가까스로 버티다 마지막에 케이오 패한 권투선수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고 때론 대낮인데도 술에 취해 있었다. 무슨 말을 꺼내든 내 얘기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매몰차게 말을 잘라먹었다.

퇴원 후 녀석은 조그만 성인용품 가게를 냈다. 잔뜩 그늘져 있던 얼굴이 잠시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가게는 녀석의 건강을 악화시킨 주범이 되었는지 몰랐다. 

당시 성인용품 가게는 일반인들이 버젓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가게의 단골들은 늦은 밤에, 그것도 술에 얼큰한 이들이었고 이들과 술 상대까지 하다 보니 진통제로 통증을 임시방편 삼았던 몸이 망가져버렸던 것이다. 결국 본전도 못 뽑고 가게를 때려쳤고, 절뚝절뚝 아픈 다리를 끌고 아파트를 돌아다니면서 족발장사 빵장사를 했다.

그렇게 또 십여 년, 노동해방도 잊어먹고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녀석은 포기할 것은 포기해 버렸는지 평소의 품성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루 벌어 하루를 먹을지라도 어려운 기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TV뉴스가 나오면 꺼버리곤 했다. 이것이 불과 몇 달 전까지의 일이다. <다음편에 계속>

 

   
이병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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