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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성장통> 14. 미리 짜놓은 각본 2
이병초 시인  |  jbpost20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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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08  15:4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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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학년 초여름이었다. 육성회비가 무서워 노규와 나는 땡땡이치기로 작당했다. 등교하다 말고 우리는 방죽미티 신 씨네 점방에 들어가 곽성냥을 샀다. 땡땡이칠 때 곽성냥은 필수품이니까. 그러는 사이 동네 애들은 저만치 앞서 갔다. 우리는 방앗간 옆으로 난 샛길로 빠져 털보영감네 대밭 길을 득달같이 지나갔다.

황방산 아랫자락 끝에 야트막한 바루산, 노규는 그 사이 좁은 길로 나를 이끌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산지당이 나오고 거기를 지나면 용천으로 곧바로 올라갈 수 있는 산길이 나올 것이다. 누구한테 들었는지 오늘 용천에서 큰 굿을 한다고 했다. 아줌마들이 열 명도 더 올 것이라고 했다.

황방산 꼭대기에 있는 샘 거기를 용천이라고 불렀는데 사람들은 거기서 굿판을 벌이곤 했던 것이다. 흰옷에 울긋불긋한 천을 걸치고 깽매기소리 장구소리에 맞춰 널뛰듯 하는 무당 할매 모습이 어른거렸다.

흰옷을 입은 아줌마들이 두 손을 앞으로 모아서 치성드리는 모습도, 떡과 지짐이들과 사과며 식혜도 어른거렸다. 먹을 것이 지천에 널려 있을 것이었다.

 

   
고 2때 명금산으로 소풍 갔을 때. 앞쪽부터 송재운, 박노규, 글쓴이 이병초.

  우리는 용천으로 막 통하는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산을 오를수록 깽매기소리 장구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산 저산에서 밤꽃이 피고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하얀 꽃들이 가시를 달고 아무데나 흐드러져 있었다.

잡목으로 쪄든 산길 양쪽에서 산새들 날개 퍼덕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노규는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새들이 삑붙는 소리라고 했다. 새도 삑붙는단 말여? 눈을 크게 뜨니 짜식은 빙그레 웃으며 글먼, 삑도 안 붙는디 알이 어떻게 나오것냐 이랬다.

새나 짐승의 짝짓기를 우리는 삑붙는다고 했다. 누가 이 말을 가르쳐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을 듣자마자 그것이 뭔 짓인 줄 금방 깨달았다.

얼마나 올라왔을까. 조금만 쉬엄쉬엄 가자고 나는 녀석에게 툴툴거렸다. 노규네 집은 앞시암 위 대밭을 끼고 있었는데 동네 쪽에서 보면 황방산으로 가는 길목 끝에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녀석은 산에 자주 올라가는 것 같았고 겨울방학 땐 나무하러 매일 산에 오르다시피 한다고 했다.

재수가 좋은 날에는 꿩이나 토끼를 줍기도 했다고 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황방산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고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 거기에 가본 듯이 말해주었으며, 용천에 미처 못 와서 산성암으로 빠지는 길목 뒤까지를 땅바닥에 지도처럼 그려 보이기도 했다.

“저그가 철순 누님이 묻힌 데여.”

녀석은 고갯짓을 했다. 잡풀이 꽉 쩔어 있는 곳이라서 어리둥절하니까 저기 산굽이 돌아가는 길을 다시 가리켰다. 신행리 사람들과 옥계동 사람들이 넘어 다니는 길목 으슥한 데였다.

그 누님은 미쳤었다. 내가 그 집에 심부름을 가면 밖에서 쇠를 채운 방 안에서 킥킥대는 소리가 들렸다. 문종이가 다 찢어진 문구멍에 눈알을 대고 내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그 집 뒤안은 왕대밭이었는데 겨울이면 우리 꼬맹이들은 대나무 밑바닥에 뒤엉켜 있는 칡을 캐먹곤 했다.

칡넝쿨을 따라서 뒤안에 가깝게 다가갈수록 웃음소리도 아니고 울음소리도 아닌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철순 누님이 저러는 걸 보니 오늘 눈이 올랑갑다고 꼬맹이들은 아는 체를 했다. 뭘 잘못 먹어서 그리 되었는지, 원래 저 모양인지는 몰라도 언젠가 방에 풀려난 철순 누님은 옷을 죄다 벗어버리고 동네방네를 쓸고 다니기도 했다.

삼촌들 서넛이 간신히, 눈을 허옇게 뜨고 길길이 날뛰는 누님 몸띵이를 떼메고 집에 들어가는 것을 우리 꼬맹이들은 지켜보았다. 그때 누님은 이미 스물이 넘은 나이였다.

 

  그 누님은 죽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꼬맹이들은 누님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어른들한테 물어보면 날벼락이 떨어질 것 같았으므로 입을 다물었고 차츰 누님도 우리들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그런데 그 기억을 노규는 끄집어냈다. 누님이 묻힌 데를 가리키는 노규 손길을 따라 녹음을 되받아치는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뻐꾹새가 울고 있었다.

시집도 못 가고 죽었으니까 남정네들이 자주 지나다니는 길목에 묻는 것이라고 녀석은 말했다. 관도 없이 가맛때기에 둘둘 말려 지게에 얹혀진 몸띵이를, 땅에 묻히는 몸띵이를 지켜보았다는 듯이 녀석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배 고프지야? 가재나 잡아먹고 가자.”<다음편에 계속>

 

   
이병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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