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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성장통>12.낙화유수落花流水 1
이병초 시인  |  jbpost20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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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20  16: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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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벌이는 일마다 실패했다. 출판사 직영점, 연탄, 소금 대리점 등을 열었고 담장에 잇대어 긴 막을 짓고 돼지까지 쳤으나 빚만 몽땅 짊어졌다. 전답과 집을 팔고 일곱 식구를 셋방에 몰아넣었다.

빚잔치 끝에 남은 돈으로 계화도 간척지에, 도저히 농사를 못 지어먹을 것 같은, 짠물 나오는 논 서른 마지기와 양철집을 장만했고 팔복동 발룡리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당신은 계화도에서 농사를 짓는 틈틈이 다섯 자식이 밥 끓여먹는 셋방에 어머니와 함께 다녀가시곤 했다.

아버지는 당시 민사재판 중이었다. 3대째 농사 지어먹었던 수랑둘 밭 서 마지기의 명의가 박 씨 앞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이 불거지게 된 것은 아버지가 이 땅을 팔고자 함에 있었다. 만약 땅이 아버지 명의로 되어 있었다면 집을 팔지는 않았을 것이고 재판이란 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당신 편이 아니었다. 등기를 제대로 돌려놓자, 그 동안 당신이 낸 세금은 다 물어주겠다고 제안을 해도 박 씨는 법대로 하자고 우겼다했다. 아버지는 곧바로 민사재판을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민사재판은 재판을 하는 두 집이 거덜나야 끝난다고들 했다. 그만큼 돈과 시간이 많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사회와 역사에 대해 세상 돌아가는 꼴에까지 온갖 아는 체를 다해놓고 결국 제 잇속으로 꼬부라지는 양아치 사촌들은 아버지 옆엔 얼씬도 못한다고 들었다. 할아버지가 땅을 사려고 몇 해 동안 농사지어 모아놓은 돈이며 황소를 판 뭉칫돈, 그것을 들고 나가서 후배들의 뒤를 봐주었다는 아버지. 논밭뙈기가 갈수록 줄어들어 불알만 찼다는 비아냥이 들려도 걸림새 없는 말본새와 여유 있는 걸음걸이는 여전했던 것이다. - 본문중에서. / 사진은 이병초 시인 부모님의 결혼사진. 당신들에게도 파란 젊음이 있었음이라... ...

계화도 논농사까지 버려두고 아버지는 재판 일에 바빴다. 재판비용도 만만치 않은 데다 자식들을 가르쳐야 했으므로 돈 있는 곳이라면 불속이라도 뛰어들 것 같았다.

당신의 이런 모습은 드문 일이었다. 재판을 하기 전엔 아무리 화가 났을 때도 말을 천천히 놓았고 단신이지만 걸음도 여유가 있어보였다. 스물 몇 살 때까진가 한남동 어디에서 건달패거리에 섞였었다는 아버지는 어떤 일에든 걸림새가 없었고 바쁘지도 않았다.

주먹으로 한세상을 살겠다는 것이 건달인지, 건달들에겐 어떤 묵계가 있는지, 어째서 건달들은 칼을 쓰지 않는 것인지 그것은 모르겠다. 하지만 주먹만 가지고 건달이 되는 것은 아닐 터였다. 

주먹질이든 발차기든 박치기든 상대방을 단박에 제압할 수 있는 한 가락이 있어야 함은 물론 두둑한 배짱도 있어야 할 터였다. 어떤 일이든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직관력이 있어야 할 것이고 눈곱만큼도 자신의 욕심을 챙기지 않는 게 건달인지도 몰랐다. 옳고 그름이란 사회통념의 이분법적 잣대를 단호히 걷어차버리고 그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삶의 이치에 다다른 이가 건달인지도 몰랐다.

 

아버지의 노랫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팔복초등학교 후문에 있는 막걸리집을 지나는 중이었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결 위에 꽃잎은 떠가고 세월이 가고 인생살이 꿈같네- 어쩌고 하는 가사였는데 대포집 창문을 살짝 훔쳐보니 아버지였다.

젓가락을 가만가만 두드리면서 당신은 술상에 목소리를 조용조용 깔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아저씨들은 아버지 목소리에 취한 듯 움직임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 어젯밤에 대포집에서 부른 노래 제목이 뭐냐고 여쭈었더니,

“어? 너 그거 어떻게 알었냐? 애비 노랫소리를 들었단 말여? 허허허. 그거 말이다, 낙화유수다. 낙화유수.”

나는 사회 시간에 건달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시라소니부터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 직후 사형을 당했다는 정치깡패 이정재에 이르기까지 선생님은 건달들의 폭발적인 후일담을 들려주었다. 거기서 나는 ‘낙화유수’라는 별명을 가진 건달이 있다는 것도 들었다. 나는 당신이 낙화유수란 건달의 패거리일 거라고 지레 짐작했다.

대중가요「낙화유수」를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몇 토막 안 되는 무용담만 가지고 아버지가 건달이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건달은 스스로를 건달이라고 자처하지 않으면 주먹잽이로서의 지난날이 객관화된 사실이 아닐 경우 그건 망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선의 자유인이자 협객”이란 의미가 붙었던 ‘건달’이란 존재가 이승만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는 사회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는 건달에 관심이 아예 없어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사나흘 거리로 집에 찾아오는 눈이 부리부리한 이들과 건달 얘기에 신났고, 주먹깨나 썼다고 떠벌리는 치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사회와 역사에 대해 세상 돌아가는 꼴에까지 온갖 아는 체를 다해놓고 결국 제 잇속으로 꼬부라지는 양아치 사촌들은 아버지 옆엔 얼씬도 못한다고 들었다.

할아버지가 땅을 사려고 몇 해 동안 농사지어 모아놓은 돈이며 황소를 판 뭉칫돈, 그것을 들고 나가서 후배들의 뒤를 봐주었다는 아버지. 논밭뙈기가 갈수록 줄어들어 불알만 찼다는 비아냥이 들려도 걸림새 없는 말본새와 여유 있는 걸음걸이는 여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민사재판을 시작한 후부터 당신의 모습은 눈에 띄게 초췌해졌다. 젊은 시절에 한가락 안 해본 사람 없고 자신의 지난날이 파란만장하지 않은 사람도 없지만 그러나 그 사람들은 현실을 중시했다. 돈과 현실과 사람의 밀착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버지는 달랐다. 돈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신념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 같았다. 그러므로 돈이란 것이 손에 들어오면 친구들이나 후배들의 뒤를 봐주는 데 썼다. 하지만 이런 삶의 태도는 당신께 아무런 힘이 되지 않았다. 사나흘 거리로 찾아오던 눈이 부리부리한 손님들은 아버지가 단칸방으로 몰렸고 민사재판을 시작하자 발길을 뚝 끊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전답을 모두 날리고 삿갓을 쓴 나그네 형세였다. 재판비용 대느라고 형제들은 물론 아는 사람들에게 손을 안 벌린 데가 없는 데다 당신 인생의 마지막 보루였던, 딱 3년 농사지어먹은 계화도 땅까지 팔아야 했다. <다음편에 계속>
 

   
이병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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