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 겨울방학, 나는 법정에 가서 아버지가 재판받는 모습을 보았다. 형편없이 쪼그라들어 셋방에 몰린 집안일지라도 명색이 장손인 나에게 당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변호사도 없이, 상대측 변호사와 설전을 벌이는 아버지의 모습은 당당했다. / 본문 중에서.  사진은 아버지와 어머니 약혼 사진.

2.

  이겨야 한다, 이건 자존심 문제다, 내 것 가지고 병신이 될 수는 없다, 아버지는 이런 신념을 갖고 있는 듯했다. 아니 당신은 이 민사재판을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계기로 삼았는지도 몰랐다. 법정에 가고 재판을 준비하는 도중에 며칠 짬이 생기면 아버지는 허리에 못통을 차고 목수 일을 나갔지만 다섯 자식의 뒤를 댈 수 없었다.

고1 겨울방학, 나는 법정에 가서 아버지가 재판받는 모습을 보았다. 형편없이 쪼그라들어 셋방에 몰린 집안일지라도 명색이 장손인 나에게 당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변호사도 없이, 상대측 변호사와 설전을 벌이는 아버지의 모습은 당당했다. 사람이 법정 증인석에 서거나 법복을 입은 사람들 앞에 서면 기가 죽는 법이라는데 아버지는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그 얘기는 저번 공판 때 증인을 세워 사실로 인정된 것 아니냐, 6･25전쟁 그 정신없는 통에 어떻게 밭 등기를 새로 낼 수가 있느냐, 그것부터 조사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 아버지는 변호사를 몰아붙였다.

재판에 붙여진 땅이 당신 땅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댈 수가 없었으므로 아버지는 과거를 또렷하게 기억하는 동네 어른들을 증인으로 세웠다. 증인으로 나섰던 어르신들은 지금 재판 붙은 땅이 아버지 땅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고 공판이 끝난 뒤에는 오히려 그분들께 술대접까지 받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1심에서 승소했다. 그러나 재판은 끝나지 않고 고등법원을 지나 대법원으로 이어졌고, 이것도 모두 이겼다. 이제 상대방에게 그 동안 재판을 하면서 들어간 비용이며 물질적, 정신적 피해보상을 받아내야 할 일만 남았다. 

대법원 판결이 나기까지 무려 5년을 끌었던 민사재판, 이제 우리 집은 예전의 모습을 찾을 것이었다. 내 탯자리인 유제리로 돌아갈 수 있음은 물론 옛집을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살구나무와 감나무가 말라비틀어졌을지라도 옛집과 마당과 텃밭과 샘과 뒤안 대숲은 여전할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피해보상금을 받아내지 않았다. 한동네 사람끼리 재판을 했다는 것 자체가 창피하고, 당신과 재판을 한 상대방도 살림이 거덜나 버렸다는데 거덜난 집에 불 지르란 말이냐, 고개를 저었다고 했다. 

당신은 재판이 끝난 후 허리에 못통을 차고 목수일을 나갔다. 전全 재산을 다 날리고 삿갓 쓴 모양새로 공사판을 떠돌았을 것이지만 누구에게나 따뜻했고 당당했던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여동생이 사드렸다는 구두를 아버지는

내게 맡기셨다 비싼 게니 밑창을 덧대고

굽에 반달을 달아 신으라셨다

그랬던 걸 신발장에 넣어둔 것도

잊어버리고 지냈다 구두 잘 신냐는 전화를

받고서야, 오늘 아침에야 신발장을 열어보았다

당신과 마지막 거래일지도 모를 구두에

먼지가 끼어 있다 죄스럽게 서서

먼지 닦아내는데 눈앞이 쓰리다

병원에서 아버지를 포기한 것처럼

나도 구두 신기를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졸시「구두」, 전문

  아버지는 유제리 옛집에 못 돌아가고 쓰러졌다. 전주 이 씨 시중공파 집성촌인 마전馬田 집에서 당신이 폐암말기와 싸울 때 나는「구두」라는 시를 썼다. 아버지는 A병원에서 식도암 수술을 했는데 수술 후 10개월도 안 되어 폐암 말기로 재발했던 것이다. 한 인간이 죽어가는 모습을 손도 못 쓰고 지켜봐야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나는 서울 학원가에서 국어 강사노릇을 하고 있었다. 병든 아버지를 시골 구석방에 방치한 것 같은 죄책감을 파먹고 살았다. 1주일에 한 번, 당신을 데려갈 때가 되었나 안 되었나를 확인하러 오는 저승사자처럼 나는 아버지를 만났다.

“인자 조용히 갈랑게 약 같은 거 쓸라고 생각허지 마라잉.” 이렇게 전화를 끊었다. 말기암 환자에게 효험이 있다는 유황오리며 와초, 생식 등을 못마땅해 했다. 누구나 한 번은 가는 길인데 요란 떨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진은 낙화 /

  내 것 아니면 쳐다보지도 말라고, 똥꼬에 힘주고 오줌발 끝까지 털라고 가르쳤던- 어떤 것에도 걸림새 없이 당당했던 당신은 그러나 세월과 병病만큼은 이기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아버지는 빼빼 마르다 못해 피골이 상접해서 죽음이란 것에 다가갔다. 얼굴엔 잔주름이 더 들어찰 데가 없을 만큼 그어졌다. 아침에 전화를 걸 때마다

  “인자 조용히 갈랑게 약 같은 거 쓸라고 생각허지 마라잉.”

이렇게 전화를 끊었다. 말기암 환자에게 효험이 있다는 유황오리며 와초, 생식 등을 못마땅해 했다. 누구나 한 번은 가는 길인데 요란 떨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를 집으로 모시라고 하면서 건넸던 의사의 말, 아버지 목숨이 길어야 3개월이라던 야박한 말이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암환자가 마지막으로 입원하는 요양병원에 가기 4개월 전이던가. 당신은 미국행 비행기표를 끊으라고 했다. 뉴저지에 있는 세 딸에게 가본다는 거였다. 

단정적 선언과 같은 이 말은, 당신의 병이 돌이킬 수 없도록 깊다는 것을 자신이 안다는 것이며 비로소 죽음을 준비하는 - 아버지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명령이었다. 길어야 3개월이라던 의사의 말이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선뜻 비행기표를 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사람의 소원이라는 데서 내 판단력은 흐려지고 있었다. 결국 나는 15시간을 타야 하는, 비행기 안에서 당신이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행기표를 끊었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