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도시에 살고 있는 그 흔한 많은 사람들처럼 그 중의 하나로서 살아가는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어린 시절을 말괄량이처럼 뛰놀았다. 할 수 있는 한 맘껏 뛰놀았다. 그리고 때때로 문득 골똘히 생각하는 밤을 지나 사춘기를 맞이하고 어른이 되었다. 모두들 어른이 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독립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하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다짐을 시켰다.

소녀는 나름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과 바른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가치를 형성했다. 그러나 성실히 바르게 살아가는 것과는 별도로 거의 모든 순간에 외로움을 느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사람이 너 하나만이 아니라고 했다. 모두 다 외로움을 느끼지만 그런 게 인생이라고 했다. 어른이 된 소녀가 인생은 정말 그런 것인가 보다 하고 살아갔다. 그러나 외로움은 항상 거기에 있었고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남몰래 눈물짓는 순간이 많아졌다.

성장하면서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려줬지만 여인이 된 소녀는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날이 많았다. 외로움이 몰려오는 날이면 그것을 몰아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사람들을 만나거나 멍하니 티비를 보거나 잠을 잤다. 또한 열심히 일을 했다. 그렇게 해서 성공을 하면 외로움이 물러가고 찬란하게 빛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할수록 그나마 남아있던 감정조차도 사라졌다.

자신의 반쪽을 찾아보기도 했다. 사랑에 빠졌을 때 드디어 외로움은 물러가는 듯 했다. 타인을 사랑하고 그 사람과 함께 일 때 자신 안의 거대한 공동이 메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사랑은 진부해졌고 열정은 사그러졌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족을 이루면 그 때에는 정말로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한동안은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아이를 키우느라 바빴다. 그 시간동안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지만 문득 또 다시 외로워져 버렸다. (계속)

(2)

어느 날 밤 그 무엇도 그 어떤 사람도 여인이 느끼는 외로움에 대한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여인은 흐느끼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는 누구야?, 나는 누구야?’ ‘도대체 난 누구야?’ 그 때 어딘가에서 무슨 기척이 들렸다. ‘아, 이제야 물어주다니...하지만 다행이야, 지금이라도 물어주어서 나는 기쁘다.’ 여인은 파묻었던 고개를 들고서 눈물 젖은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환청을 듣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이제는 견딜 수가 없어져서 미쳐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빠졌다. 그 순간 다시 조그마한 소리가 들려왔다. 조그마한 소리지만 무언가 따뜻한 느낌을 주어서 여인은 두려움을 잠시 잊고 귀를 기울였다. ‘넌 미치지 않았어, 하지만 너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 너를 무척이나 괴롭혔지.’ 여인은 그 소리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알려줄 수 있어?’ 소리가 대답했다. ‘네가 물어만 준다면 뭐든 대답해줄 수 있어, 하지만 네가 묻기 전에는 난 아무 것도 답해 줄 수가 없지, 그게 법칙이야.’

여인은 아직도 또르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선 다시 물었다. ‘ 그러면 난 누구지, 내가 누구인지 말해 줘.’ 소리는 다시 대답했다. ‘그러기 전에 잠시 나와 함께 상상해보지 않겠니? 내가 어렸을 때 뛰어 놀던 곳이 있었지?’ 여인은 대답했다. ‘그런 곳은 너무도 많은 걸, 다 기억할 수조차 없어.’ 소리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 하지만 그 중에서도 네가 제일 좋아했던 언덕이 있었지, 거기에서 너는 많은 시간을 보냈던 때가 있었어.’

여인은 골똘히 생각했다. 그 언덕이라는 곳은 과연 그녀가 아주 조그마했을 때부터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던 곳이었다. 거기에 앉아 있으면 그녀만의 세상이 만들어졌다. 현실에서보다 더 실재처럼 여겨지는 그녀만의 세상이. ‘하지만, 하지만 그곳은 실재 존재하는 곳이 아니야, 그건 그저 내 상상 속에 있던 상상나라 언덕이었을 뿐인 걸.’ 여인이 대답했을 때 다시 소리는 말했다. ‘그래, 너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상상나라 언덕이었지, 네가 제일 좋아하는. 그 때 너는 굉장히 행복했지. 아, 난 아직도 그 때의 너를 생각하면 네가 느꼈던 그 기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 넌 그 안에서 뭐든 이루었고 뭐든 만들어냈어.’ 여인은 소리의 말에서 자신이 느꼈던 그 때의 기쁨을 고스란히 되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여인은 자신의 눈물로 축축해진 옷깃에 흠칫 놀라며 현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건 다 헛소리야, 이제 나는 더 이상 그런 상상 속에서 놀던 어린 애가 아니라고. 난 내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한 사람의 어른이야. 이제 와서 도대체 그런 소꿉장난 같은 한 때를 다시 되살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데!’

소리는 여인의 말에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봐, 나는 그 때의 너를 기억하는데, 어떤 날들에는 울면서 왔지. 너는 그 언덕에 앉아 가족 중 누군가에서 꾸중 들은 일을 털어 놓았어. 그 때 언덕은 네게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네가 편안히 앉을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약간 움푹하게 만들었어. 너는 거기 앉아 있다가 잠들어 버렸지. 어떤 때는 친구와 싸우고 심통이 나서 화를 무척 냈는데 네가 그 때 갑자기 방귀를 뀌는 바람에 언덕이 들썩이자 넌 떼굴거리고 웃다가 모든 것을 까맣게 잊고 말았지. 아, 그 때가 기억나는 구나. 네가 유치원에서 처음으로 좋아하는 남자애를 만났던 날이. 그 때 네가 언덕 위로 단숨에 뛰어올라 와서는 그곳에 나무를 그려 넣었지. 언덕은 영문을 몰랐지만 새로 생긴 나무를 좋아했어. 그리고 넌 거기에 삐뚤한 하트를 그려 넣고는 너무나 기뻐했지. 언덕도 자신의 몸 위에 새로 생겨난 나무와 그 하트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겼단다. 네 상상나라 언덕에 그림보다 글씨가 더 많아졌을 때가 아마 네가 처음으로 학교에 가서 글씨를 배우고부터였을 거야. 너는 거기에 수없이 많은 쪽지와 편지를 남겼지. 언덕은 아직도 그 모든 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단다.’

소녀는 삶이 지금보다 단순했던 한 때를 다시 떠올렸다. 사실 그 때에는 외로움이 뭔지도 몰랐다. 이때에 여인의 생각을 들여다본 것처럼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래, 너는 그 때 외로움 따윈 몰랐지. 너에게는 언제라도 가서 뛰놀 수 있는 상상나라 언덕이 있었어. 상상나라 언덕은 네가 그 때 세상에서 경험했던 거의 모든 순간을 함께 했지.’ 소리의 말을 따라 여인은 다시금 상상나라 언덕을 떠올렸고 그 순간 여인은 이미 자신이 그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상상나라 언덕에는 자신이 그려 두었던 나무가 거대하게 자라나 있었다. 여인이 나무를 바라보는 순간 그 거대하게 자란 나무는 바람에 일제히 잎새를 흔들어 장관을 연출했다. 햇볕이 종을 울리듯이 잎새를 타고 반짝이며 딸랑거렸다. 그리고 그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는 형형색색의 종이비행기들이 있었다. 여인은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노란색 종이비행기를 잡아서 펼쳐 보았다. ‘집 없는 소녀, 파이팅!’ 종이비행기에 적힌 내용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책이었다. 또 파란색 종이비행기 하나를 잡았다. 좀 구김이 간 그 종이비행기에는 ‘나는 시험을 좋아하지 않아’ 라고 적혀 있었다. 마침 그 순간 눈앞에 떼를 지어 날아가는 하얀 종이비행기들이 있어서 그 중에 몇 개를 잡았다. 종이를 펼치자 모두 똑 같은 글자가 쓰여 있었다. ‘외로워’, ‘외로워’, ‘외로워’ 그 순간 여인은 나무 밑에 앉아서 언덕에 맨 발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너는 그렇게도 많은 ‘외로움’을 상상언덕으로 날려 보내고선 한 번도 이곳으로 발걸음을 돌린 적은 없었지. 언덕은 네가 다시 돌아온 오늘까지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너는 어느 순간인가 이곳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린 거야. 그렇게 너의 외로움은 시작된 거야.’ 여인은 잠시 언덕에 있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지만 소리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틀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서 혼란스럽고 그것이 나를 괴롭히고 있는 거야. 물론 상상언덕은 좋은 곳이지만 이미 나는 다 자랐고 더 이상 이런 것이 필요하지 않아. 필요한건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아는 것과 좀 더 현실적인 무언가라고.’ 소리는 대답했다. ‘그래, 내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네가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 또한 진실이다. 그러나, 그러나, 아직도 모르겠니? 내가 이미 너의 질문에 답했다는 것을.’

여인은 화가 났다. 도대체 소리가 자신에게 답을 해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그 답을 들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단지 자신에게는 상상언덕이 있었고, 지금 자신이 그 상상언덕에 앉아 있다는 것뿐...자신이 누구인지 알 만한 답은 아무 것도 없었다. 여인은 아주 어렸을 때 심통이 나서 상상언덕에 앉아 있던 것처럼 그렇게 소리에게 화가 났다. 이까짓 허튼 소리나 하려거든 꺼져버리라고 소리치려는데 어쩐 일인지 언덕이 꿈틀거렸다.

여인이 곧 자신이 앉아있는 언덕을 내려다보려는 순간 휘청거리며 잠에서 깨어났고 자신이 꿈을 꾸었음을 알았다. 여인은 참 이상한 꿈이라고 생각하면서 눈물 자국을 지우고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