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운택 '굿모닝 런던' 발행인 (영국 런던)

집안에서 자란 깨를 보며...

 늦봄 무렵인가? 초여름인가? 지인이 깨모종을 선물했다. 집사람이 거름까지 사다가 정성스레 심더니만 한 여름을 깨김치로 넘겼다. 영웅이 녀석이 무척 좋아한다. 옥스포드 졸업하고 사업한다는 조카녀석도 가끔 들러서 깨김치를 싸가곤 한다. 깨김치를 처음 맛 본 외국 친구놈들이 한꺼번어 서너장씩 몰아넣는 바람에 한번 싸간 깨김치가 한끼에 바닥났다는...

푸르디 푸른 깨잎을 보면 울 엄니가 생각난다. 언제였던가?
"이슬 마르기 전에 할아버지 산소 밭에 가서 깨 벼놔라." 술에 절어 새벽녘에야 친구들 등에 업혀와 늦잠을 자고 있던 나에게 떨어진 울 엄니의 엄명이다.

머리맡을 더듬거려 꿀물을 벌컥 들이키고 엄니가 뭔가 명령을 내렸는데...깨를 베어 놓으라는 생각에 낫을 찾는다. 항상 칙간 벽에 걸려있던 낫이 보이지 않는다. 집 안팍을 뒤져서야 마루밑 깊숙한 곳에 비료푸태에 감추어둔 낫을 찾아냈다.

할아버지 산소밭에 가기 위해서는 야트막한 산을 두개 넘어야 한다. 깨는 이슬이 마르기 전에 베야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해가 중천이면 깨를 벨 때 깨들이 바닥으로 다 떨어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산소 윗머리에 있는 깨밭에 도착해서보니 아직 깨가 푸르다.
'아직 영글지 않은 듯한데...하긴 엄니가 베라 했으니..' 더 이상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낫 두자루로 그리 넓지 않은 깨밭의 깨를 다 베어 버렸다.

런던집의 울안에서 자란 깨.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집에 들어오기 전 남새밭 가상자리에 난 소복히 자란 풀까지 다 베어 버렸다.

교회를 다녀온 엄니의 목청이 높다.
"아야, 누가 솔을 다 베버렸냐?"
"솔?" 마루에서 설핏 잠이 들어있다가 퍼뜩 정신이 든다.
우물가에 던져진 낫을 보더니
" 할아버지 산소밭 갔다왔냐?" 엄니의 음성에 가시가 돛쳤다. 내심 칭찬 받기를 기대하고 있다가 슬그머니 주위를 살핀다.
"이눔아야, 니가 깨기 전에 할아버지 산소밭 가서 보니 깨가 아직 안여물었더라. 그래서 낫을 감차두고 교회갔더만..."
"글믄 아직 베지말라고 그러든가" 볼멘 소리가 나감과 동시에
"에라 이눔아, "하며 쥐어박는 시늉을 한다.
"댓바람에 술깨고 좋찮여?"

그 해 깨농사는 내 철딱서니 없음으로 해서 완전 거시기 돼버렸다. 물론 솔은 다시 자랐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