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부터 내린 비로 날씨가 쌀쌀함마저 느낄 정도가 된 것 같다. 강우량은 많지 않았지만 초가을 무더위는 확실하게 꺾인 것 같다. 아침 저녁으로는 긴팔 옷이 살갑게 다가온다.

전주덕진 체련공원으로 가는 길 숲에 있는 백로 서식지의 백로, 왜가리들도 어느 새 전부 날아갔다. 8월말이나 9월초에 남쪽으로 날아간다고 했는데 올해는 9월 중순에도 백로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마도 늦더위가 계속됐던 데 원인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박장우 논설위원

그런 백로들이 어느 순간 모두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들도 머지않아 무더위가 꺾일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가을비 하면 고인이 된 가수 최현의 ‘가을비 우산 속에’가 생각난다. 허스키 한 목소리에 애절한 곡조는 가을의 쓸쓸함을 표현하기에 충분했다.

「그리움이 눈처럼 쌓인 거리를 나 혼자서 걸었네 미련 때문에... 흐르는 세월 따라 잊혀진 그 얼굴이 왜 이다지 속눈썹에 또다시 떠오르나... 정다웠던 그 눈길 목소리 어딜 갔나 아픈 가슴 달래며 찾아 헤매이는 가을비 우산 속에 이슬 맺힌다...」

가을비는 일반적으로 환영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옛말에 처서에 비가 오면 ‘독의 곡식도 준다’ ‘십리에 천석 감한다’는 말이 있다.

이 때쯤이면 논밭의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고추도 따서 말리는 등 잡다한 가을걷이가 본격화된다. 호박고지, 깻잎, 산채 등을 말려 묵은 나물을 준비하기도 한다. 가을비가 반가울 리 없었을 것 같다.

가을노래 하면 뭐니 뭐니 해도 패티김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이 제격이다.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랑 겨울은 아직 멀리 있는데 사랑할수록 깊어가는 슬픔에 눈물은 향기로운 꿈이였나 당신의 눈물이 생각날 때 기억에 남아 있는 꿈들이 눈을 감으면 수많은 별이 되어 어두운 밤하늘에 흘러가리... 」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고 풍요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가을을 대표하는 노래들은 대부분 허전함이나 쓸쓸함이 가득한 것 같다.

김동길 전 연세대교수의 에세이「가을에 부치는 노래」에 실린 일본 대학교수의 일화는 지금도 찡한 감동을 준다.

『일본 어느 대학의 한 영문학 교수는 강의를 하려고 교실에 들어오더니 강의는 시작하지 않고 한참동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학교가 자리 잡은 무사시노의 들판에는 때마침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오래오래 그대로 섰더니 마침내 하얀 손수건을 꺼내 하염없이 흐르는 두 눈의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그는 교단에서 내려와 강의실 밖으로 사라졌다.

그날 학생들은 그 무언(無言)의 강의가 그들의 대학 생활에서 가장 인상 깊은 명강의였다고 회고한다. 그 교수는 젊은 학생들의 가슴에 애절한 가을의 모습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남원에는 만복귀승(萬福歸僧)이라는 옛 풍경 이야기가 전한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있는 만복사의 승려들이 낮에 시주걸립 나갔다가 석양이면 발(鉢)을 등에 메고 잠자리가 있는 사찰로 발길을 재촉하는 기나긴 행렬을 가리켰던 말이다.

지친 모습으로 절로 돌아가는 수많은 스님들을 상상해보라. 하룻동안 동냥하느라 지칠대로 지친 그 처량한 모습 말이다. 그것도 가을철 석양 무렵에는 더욱 그랬을 것 같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장관으로 비쳤을지 모르지만...

가을의 대표적인 상징인 단풍이 9월말 강원도 설악산을 시작으로 매일 20km 이상씩 남쪽으로 내려올 것이라 한다. 지리산의 첫 단풍은 10월12일, 절정기는 10월25일, 내장산의 첫 단풍은 10월22일, 절정기는 11월9일로 예상되고 있고 덕유산이나 대둔산도 엇비슷할 것으로 알려진다.

올가을 단풍은 예년보다 3-4일 늦어지는 반면 밤낮 일교차가 커져 어느 해보다 아름답게 물들 것이라고 한다. 경제적 불황, 사회적 모순으로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는 시민들에게 올 가을 단풍은 더 큰 감동을 선사하지 않을까 싶다.

가을비와 함께 더욱 깊어진 가을. 성경에는 ‘뿌린 만큼 거두리라’ 했지만 생각만큼 거두지 못할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혹시 여러분도 이 가을에 서글픔을 느끼고 계시다면 여러분의 가을을 찾아 떠나보시면 어떨까요. / 박장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