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박 6일간의 남도여행을 3차례(9-11회)로 나눠 엮으려 한다. 그 첫번째 이야기다.

2013년 10월에 길고 먼 여행길을 떠난 적 있었다. 아직 자전거가 익숙하지 않던 시절이었고, 막 맛을 붙이던 시절이었다. 10년 이상을 붙잡고 있던 고비를, 자의든 타의든 넘어서야 하는 순간이었다.

이 때는 몰랐지만 나로서는 넘어서지 않으면 안될 고개를 넘어서던 시점이었던 것으로 후일에 해석된다. 스스로를 어쩌지 못하고 붙잡고 있던 집착에서 넘어서기와 돌아갈 곳 없이 맞닥뜨린 지점이 이 시절의 몇 달(또는 몇 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의료생협을 제안하고 이끌어오던 길벗이 온전히 넘어서지 못한 채, 어쨌거나 새롭게 길을 떠나야 하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에 관해서는 마지막쯤에 다룰지 아닐지 아직은 모르겠다. 다만, 그때 길을 나서야 했었고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이었다.

길벗 김길중 한의사

여름의 흔적이 거의 자취를 감춘 10월 중순 무렵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제법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던 계절이다. 여행을 하는 일주일 사이에 기온은 급격하게 변해, 돌아오던 날 즈음엔 찬바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한참 산에 맛이 들려 지리산 종주까지 해볼 요량도 있었다. 홀로 지리산에 덤빈다는 게 쉽지 않아 포기 하고 바로 자전거로 나서게 되었다.

먼 거리를 여행할수록 짐을 가볍게 꾸려야 한다고 한다. 아무런 지식이 없던 길벗은 45리터 배낭가득 옷가지를 비롯한 짐들을 꾸려 무식하고 용감하게 나섰다. 정말이지 이 배낭은 여행 내내 큰 짐이었다. 끝내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낑낑대며 메고서 다시 돌아왔다. 버릴 것과 포기 할 것을 놓지 못하니 그럴밖에...

아침에 시작된 여행이 구이를 거쳐 운암호까지 이른다. 여기까지는 몇 번 와봤다고 무리 없이 왔지만 이내 첫 고비를 맞는다.

운암에서 강진을 넘어가는 고갯길에 율치가 나타난 것이다. 곰티재를 이전에 넘어본 적이 있지만 곰티재보다 높지 않은 이 고갯길을 오르기가 벅차다. 끌다가 다시 페달을 굴리다가 또 다시 끌다가를 반복해 한참을 올라 비로소 율치에 딛고 선 것이다.

구담 마을에서 내려다 보는 섬진강. (영화 '아름다운 시절' 촬영 장소) / 김길중

섬진강을 따라 일단 광양까지 내려갈 계산을 했지만 미처 이 고개를 염두에 두지 못했다. 앞으로의 고갯길이 여기 같다면 이틀을 못가고 포기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눈앞이 깜깜하다. 욕이 저절로 나온다. ‘젠장... 내가 여기에 왜 서있는 거고... 또 나는 누구이고...’ 이런 말들이 실제 입 밖으로 튀어 나온다.

타고 올라가던 끌고 올라가던 내리막길에서의 자전거 주행은 오를 때의 그 기분과 걱정을 죄다 날려버리기 마련이다. 이 맛이 없이 끝끝내 오르기만 한다면 정말 죽을 맛일 것이다.

필봉마을을 끼고 달려 강진소재지가 나왔고 다시 얼마 안가서 섬진강 길의 출발점인 인증센터를 만나게 되었다. 지금도 섬진강 길은 금강이나 한강 같은 중부지방의 자전거 길에 비하면 한적한 느낌이 들지만 이 날이 월요일이었다. 오죽 한적했을까... 비로소 고요하게 흐르는 섬진강을 파트너로 여기며 달리기 시작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섬진강 길 가운데 세 곳을 고르자면 이렇다. 김용택 시인의 생가가 있는 덕치면 성산마을부터 구담을 지나 장구목에 이르는 구간을 으뜸으로 삼는다. 그리고 압록을 전후한 구간, 마지막이 화개에서 다압에 이르는 모래사장을 낀 구간이다.

천담 구담쪽 섬진강변을 따라 이어진 자전거 길. 길 옆으로 섬진강이 묵묵히 흐른다. / 김길중

이 구간은 강이라기보다 계곡이라 불러야 마땅할 만큼 강의 폭이 좁고, 군데군데 바위와 짙은 물색이 산자락에서 드리운 그늘과 어우러져 풍광이 으뜸인 곳이다.

그렇게 천담, 구담, 장구목을 지나 순창 유등에 이른다. 때가 점심에 달했고 면소재지고 하니 중국집이라도 있겠거니 싶어 길을 빠져나가 음식점을 찾는다. 하지만 나의 허기를 달래줄 집은 두 바퀴를 돌아도 찾질 못했다. 이땐 왜 사람들에게 물어 먹을 만한 곳을 탐문할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그렇게 유등도 지나쳐야 했다.

급격하게 밀려온 배고픔과 동반한 라이딩은 항가유원지를 지나 금호타이어 곡성공장이 건너로 보이는 대강면 방산리의 자전거 휴게소까지 이어졌다. 자전거 여행을 하다보면 이런 휴게소(편의점이라고 해야 할까?)가 무척 반갑다. 그리고 그냥 지나치지 말고 뭐라도 보급  하는 게 맞다는 판단도 거듭된 여행의 경험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휴게소를 휴식의 포인트로 잡아두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럴만한 위치에 이런 업소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여기서 주인 내외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목적지는 어디며 하는 일은 뭔데 이리 한가하게 자전거 여행을 하는지, 그리고 그들 내외는 어떻게 자전거 여행을 다니는지 등이 자연스럽게 화제가 된다.
이때만 해도 광양까지 가서 제주도로 가기 위해 장흥이나 목포를 갈지, 아니면 남도를 도는 길을 선택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대화 덕분에 몇 가지 정보를 얻고서 다시 길을 나선다.

구례까지 가기는 좀 멀고 곡성쯤에서 1박을 하면 되겠다는 판단을 하고서 오후 일정이 시작되었다. 오후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미 주행거리가 60Km를 넘었다. 이전에 가장 멀리 달려본 게 70Km쯤이니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엉덩이다.

이 여행을 함께 했던 20만원짜리 삼천리자전거 ‘길순이’-나중에 새로운 길순이에 밀려 막순이라 불렸다. / 김길중

초반에 10Km를 달리고 10여분 쉬었던 패턴은 점심을 먹고 나서는 점점 달라진다. 달리는 간격이 5Km로 줄고 나중엔 3Km, 심지어는 1Km를 못가고 내려야 했다.(지금은 단련되어 그렇지는 않다) 그렇게 힘겹게 달려 곡성에 도착한 게 5시 반 이다. 날이 많이 짧아졌으니 이 정도의 거리와 시간이면 적당하다 싶어 더 이상의 미련을 접고 숙소를 잡는다.

기준은 ‘싸고 좋은’ 방이지만, ‘싸고’에 방점이 찍히기 마련이다. 싸면서 좋을리 없지만 홀로 묵는 데 많은 돈을 들인다는 것이 아까운 이유가 더 크다.

‘자전거는 방에 올리실 거죠?’라는 주인아주머니의 권고에 ‘내 자전거는 20만원짜리 생활자전거니 밖에다 묶어두어도 될 거에요’라고 덧붙일 필요가 없다. ‘자전거 여행객들이 이런 정도의 모텔에서 자고 또 그렇게들 움직이는구나’로 이해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집을 떠난지 만 24시간에 아침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선다.

생각은 반반. ‘와보니 갈만한 걸’이라는 호기심 어린 자위가 반이다. ‘오늘은 다시 어떤 고개를 만나게 될지’에 대한 두려움이 또한 반이다.

자위가 두려움을 이기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이날 이후로 매일같이 크고 작은 고개를 적어도 세 개쯤은 넘는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이라 불러야 할지, 아침이라 불러야 할지 곳곳에 납작하게 떠있는 바위와 물위로 물안개가 피어오른 압록을 지나친다. 광양의 매화마을쯤에서 밥을 사겠다는 친구의 약속을 남은거리와 시간에 대입시켜 보니 서둘러야 할 것 같다.

섬진강 길의 시작점인 강진에서 광양까지는 140여Km. 대체로 해발고도 100m쯤에서 해발 0m로 수렴하니 내리막길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균적인 경사에 불과하다. 길 이라는 것이 어디 그렇게 만만한데가 있던가?

길순이는 고개를 오르다 쉴 땐 이렇게 내팽겨쳐 진다. / 김길중

구례군 간전에서 화개장터로 넘는데 작은 고개가 하나 있다. 고개 이름도 붙어 있지 않다. 20만원 짜리 생활자전거라는 것보다 기어가 망가져 그나마 있는 기어가 작동이 안되고 고정되어 있다는 게 문제가 된다.

기어를 바꾸자면 손으로 인위적으로 체인을 올려주고 내려주고 해야 하니 어지간한 고갯길은 그저 끌고 오르는 것이 낫다.(이땐 고개를 넘길 근육도 키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길순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자전거를 가지고 화개장터로 가는 길도 만만치가 않았다.

두시쯤으로 맞춰 잡았던 약속시간은 다가오고, 남은거리도 적지 않다. 허겁지겁 그렇게 달려 섬진강에서만 볼 수 있는 모래사장을 곁눈으로 흘려보내며 다압의 매화마을에 도착하였다.

달려온 거리가 70여Km, 다시 달려야 할 길이 30Km쯤 남았다. 여행길과 길벗이 시작한 나를 넘어서는 여행에 대한 응원차 전주와 여수에서 온 두 친구가 사준 밥을 먹고 마저 이날의 길을 달린다.

행정구역이 이제 광양으로 바뀌었고 광양제철이 있는 섬으로 연결될 다리만 남았다. 다리 건너 태인동이 섬진강 자전거 길의 끝이다. 자전거 길의 낭만도 이것으로 끝이고 여기서부터 다시 새로운 고행과 예기치 않던 운명을 만나기 시작한다.

다음날부터 시작될 본격적인 우여곡절과 사건들을 예고하는 예고편이 이날의 끄트머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광양제철 앞에서 육중한 몸통의 트럭들을 곁에 두고 달려 다시 다리를 건너 시청 부근의 숙소에 도착하는 것은 그저 예고편일 뿐이었다.

어쨌거나 이 날도 다시 100Km를 넘고서 마친다. 이틀이 이렇게 지나간다. 여전히 어디로 가는 길인지, 얼마를 가야 하는 길인지, 그 길에는 어떤 고개들이 기다릴지 아무것도 모른다. (계속~~~) /  김길중 한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