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뱁재'라는 이름의 고갯길이 있다. '위봉재'라고 해야 더 잘알 만한 이름의 고갯길이다.

‘뱁새가 황새 쫒아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속담 속의 그 ‘뱁’이 붙어 있는 고개 이름이다. 필자도 이번에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이 고개의 이름을 찾기까지 여러 가지 뒤지고서야 안 사실이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지식임은 물론이거니와 고개에 대한 나의 생각을 하나 넘게 만들어 준 고갯길에 해당한다.

완주 위봉사 너머 위봉폭포 옆으로 이어지는 뱁재.

완주군 소양면의 송광사에서 종남산, 위봉산, 동성산등을 좌측에 끼고 있으며, 우측으로는 원등산을 끼고 넘게 되면 만나는 곳이 동상면 수만리다. 지금은 차로 전주역에서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곳이지만 80년대 이전만 해도 전국 8대 오지중 하나로 꼽혔다.

소설가이기도 했던 이홍근 교수의 '객토'라는 책은 이 동네를 자세하게 묘사했다.

기억으로는 전주에서 수만리까지 이르는 길은 매우 멀고 험난했다. 봉동과 고산을 돌아 저수지를 끼고 돌다 가는 배를 타야만 비로소 도달할 곳이었고 8시간이 걸렸다고 한다.(시대적 배경이 70년대나 80년대 초쯤으로 얼핏 기억난다) 굳이 뱁재(위봉재)가 아니라 멀리 돌아서 다녔음을 기록해 두고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안 갈 이야기가 여기에 숨겨 있는 것 같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후의 이야기는 알려진 사실들을 바탕으로 하는 추측임을 전제로 한다.

뱁재라고 불렸던 위봉재가 고개로서의 의미보다는 길의 끝이지 않았나 싶다. 이는 뱁재의 이름에 담긴 의문의 실마리와 같이 따라 붙는 '무주령'이라는 또 하나의 고개에 대한 이름에서 비롯된다.

위봉산성을 딛고 선 길벗 김길중 한의사.

송광사에서 위봉사까지를 오르는게 뱁재였다. 그리고 구분해서 그 너머의 수만리까지의 길은 무주령이었다고 한다.

뱁재라는 명칭에서 작다는 느낌이 드는건 나만 그럴까? 높이 350미터가 넘는 꽤나 큰 고개에 왜 하필 뱁재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누군가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에 오늘까지 전해졌을 것이다.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그리고 또한 무주령이라는 이름은 왜 나왔고, 왜 한 고개를 둘로 나누어 뱁재와 무주령이 있었는가?무주령(無主嶺)이란 주인이 없는 고개라는 이름일 거다. 그렇다면 다른 고개에는 주인이 있다는 뜻인가?

로마는 귀족들이 돈을 내서 만든 길이 많았다. 제국을 이루고 다스리기 위해 길들을 냈던 것이다. 그래서 만든 사람들의 이름을 붙인다 한들 어색하지 않았다.

우리의 길이라면 사람들이 오가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길들이기에 주인이 따로 있을리 없다. 그저 산적들 정도가 산채를 짓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주인 행세나 했을 법 하되, 길은 가는 사람이 주인이지 않겠는가. 한데 굳이 무주령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여러 가지를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하다 내린 나의 해석은 이렇다.

오고가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뱁재를 오르는 길의 끝은 위봉사였지 그 너머를 가지 않았다는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지금의 대아저수지 정도야 봉동과 고산을 거쳐 가도 되었을 것이다. 소양에서 고산을 가는 길에는 지금도 인적이 간간이 있는 오도재로 넘으면 되었을 것이다. 화심에서 지금의 동상 소재지를 넘어야할 경우라면 밤재(율치)정도를 넘으면 될 일이다.

한데 지금의 수만리로 넘어야 할 일이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은 지도를 보면 해소될 법 하다.

이 의문은 이서구라는 인물에 얽힌 이야기를 접하면서 추측과 나름의 답이 찾아지게  되었다.

조선 순조 때 전라감사를 역임했던 사람으로 여러 예언처럼 했던 이야기들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변산반도 앞의 바다를 보고서는 '수저(水低) 30장이요, 지고(地高) 30장이 될 것이다.’ 고 했다고 한다.

해석해 보자면 깊이 90미터쯤의 바다가, 높이 90미터쯤의 땅으로 된다는 정도가 된다. 그의 예언이 자세하게 전해지는 바 없으나 지각의 변동을 예언했을지도 모른다. 하나 새만금 간척으로 바다가 땅이 되고 보니 사람들이 새삼 놀라게 된 일이다.

이서구는 또한 앞서의 동상면 수만리에 이름을 붙여준 것으로 전해진다. '갈마음수혈(渴馬飮水穴)'이라는 풍수적 견해로, 장차 이곳이 물로 가득 찰 땅이라고 했던 것이다.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실 자리라는 의미이다.

이서구의 말은 100여년이 조금 넘게 흘러 실제가 되었다. 1920년대 대아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굽이굽이 흐르던 계곡가의 땅이 물속에 잠기게 됨으로써 현실이 되었다. 수만리의 일부가 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고종시 마실길 정상의 시향정.

위봉 산성과 위봉사에 대한 이야기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위봉 산성은 조선 숙종 원년(1675)에 축성되었다. 조선왕조의 뿌리가 되는 경기전에 화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깊은 산속 요새와 같은 곳을 찾았고 적지가 위봉산이었다. 실제 동학농민혁명때 경기전의 위패와 태조의 영정을 옮긴 일이 있었다.

위봉사는 604년(백제 무왕 5)무렵에 금산사의 말사로 지어진 오래된 절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보광명전은 보물 제608호에 지정되어 있다. 시대에 따라 규모도 크고 위상도 높아 말사가 아닌 본사였던 적도 있다고 한다.

이 위봉 산성과 위봉사가 있어 뱁재를 올랐을 것이다. 그 너머로는 주인이 없는 고개, 즉 길이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해볼 만 하다. 하지만 오가는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 이름 붙인게 무주령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도대체 왜 하필 이 고개에서 주인을 언급했을까?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라도 주인 행세를 해서 감히 주인을 넘보지 말라는 의미로 주인을 언급했을지도 모르겠다. 조선왕조도 넘었고 신작로 내는 것도 벅차던 시절을 넘어와 길을 내고 달라졌다.

앞서 이야기한 곰티재는 요충지였다. 호남을 치기 위해 왜군이 넘어서지 않으면 안될 고개였다. 진안과 전주를 오가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적천재라는 고개가 있었기에 유일하지는 않다. 다만 경사가 가팔라 대규모의 병력이 넘어야 했기에 곰티재였던 것이다)

만약 뱁재는 넘어설 일이 없는 끝이었다면 매우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달라졌다. 길이 났고 많은 사람이 오간다. 송광사에서 뱁재를 넘어 수만리까지 이르는 길에는 유독 문화공간들이 많다. 갤러리며 북까페 같은 것들이 줄지어 있다.

임금에게 진상을 하던 곶감을 찾아 호기심 어린 발걸음으로 마실을 다니는 시절이다. 고종시 마실길의 출발점이 뱁재 너머의 수만리다. 출발점에서 '송곳재'를 올라 시향정을 정점으로 내려오는 길이 두어 시간 걸음으로 가능하고 많이들 찾는다고 한다.

뱁재는 이제는 자전거를 타고 넘는 사람들의 훈련장이 되었다. 송광사를 통해 뱁재를 넘고 동상저수지를 돌아 고산 봉동을 거쳐 전주로 돌아오곤 한다.  60km가 조금 못되니 서너 시간이면 충분한 주말 라이딩 코스중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걷기 위해, 혹은 자전거를 타기 위해 오가는 고종시 마실길.

내 해석이 맞다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시절을 넘어 고갯길이 달라지듯이 주인이 없던 고개가 비로소 주인을 찾게 되지 않았나 싶다. 터널이 뚫리고 길이 끊겨 아무도 찾지 않아 고립된 고개들이 있다.

화순에서 보성을 넘던 길 '예재'라는 고개를 용감하게 홀로 덤볐던 적이 있다. 고갯길 정상쯤에서 살쾡이였는지 멧돼지였는지 어느 짐승 소리에 놀라 죽어라 달아나야 했던 길을 고개라 할 수 없을 것이다.

4차선 도로가 나면서 2차선 옛 길이 끊어지고, 그 위로 고개가 사람이 다니지 않게 되면서 생기는 일이다. 혹시 나처럼 그런 도전이 계속 이어져 아스팔트를 뚫고 자라난 풀들이 다시 밟아짐으로 길이 된다. 다시 그 길이 넘어서야만 의미가 살아날 고개가 되는 것이다.

길이었다고 여전히 길일 수는 없다. 주인이 없던 고개라고 지금도 주인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 가면 길이 되고, 가는 사람이 주인인 것이 길이고 고개다.

뱁재와 무주령과 멀리 떨어진 예재까지 끼어들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뱁재와 무주령은 두 개의 고개였으나 이제는 시대를 넘어선 하나의 고개가 된 것이라고 해석해 본다.

지리학자도 역사학자도 아닌 내가 함부로 단정 지을 일이 아니다. 몇 가지의 자료를 바탕으로 나의 추정을 내놓은 것 일거다.

이 글로 인해 뱁재와 무주령이라는 고개를 찾아볼 계기가 만들어 진다면 내가 찾고 정리해 본 노력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싶다. / 김길중 한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