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그 죄많은 이름...

     - 정지월(Jiworl Seok) 전북포스트 애틀랜타 통신원

미국은 지금 12월 31일 자정까지 거의 모든 대학의 원서접수가 끝나는 통에 조기전형(Early Admission)에 합격한 애들(조기전형 발표는 12월 15 일)을 제외한 아이들이 막바지 원서 작성하느라 바쁜 계절이다.

한국도 페친의 포스팅에 아이들 진학형편이 뜨는 걸 보면 대학입시로 바쁜 때인가 보다. 나도 벌써 두 번의 전쟁을 치렀고, 이제는 남 얘기가 돼버렸다.

둘을 대학에 보내 보고 나니 이제 좀 나의 부모노릇의 성적표가 어렴풋이 보이고, 어찌하면 아이비 리그에 보낼 수 있을지 조금 알 만도 한데 이젠... 선수가 없다.

정지월(Jiworl Seok) 은 현재 미국 애틀랜타에 살고 있다. 전주 성심여고와 전북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으며, 미국에 건너가 필라델피아 무어 예술 디자인 대학(Philadelphia Moore College of Art & Design)을 졸업했다.

근데 대학만 보내놓고 나면 다 인줄 알았는데 보내 놓고도 힘들다.

공부가 어렵다,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녀석들의 투정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아이들 졸업해서도 직장 걱정에, 결혼 걱정에... 이놈의 부모노릇은 끝이 없다.

어쩌랴! 물어보지도 않고 낳아 놨으니 책임을 질 수밖에....

하지만 이 부모노릇을 얼마만큼, 언제까지 해줘야 하는 건지 도대체 가늠을 할 수가 없으니 문제다.

이런건 줄 알았으면 낳기 전에 생각 좀 많이 할 걸 그랬다. 무조건 결혼하면 애를 꼭 낳아야 하는 줄 알고 겁도 없이 둘을 덜컥 세상에 부려 놨다. 난 정말 무식해서 용감했구나!

주변에 나보다 10년쯤 어린 친구들 중에 아이 없이 지내는 부부들이 몇 있다. 뭔 재미로 사나 하다가도 때론 그런 인생도 괜찮아 보인다. 특히 한국같이 자녀교육에 올인하는 나라에선 더 애 키우기 힘들 테니 자식 하나 포기 하면 훨씬 풍요로운 삶을 살 수도 있겠다 싶다.

실제로 "그 무엇으로도 자식을 대신할 수 없다." 라는 명제에 반하는 "자녀양육과 바꿀 수 있는 많은 것들" 이라는 기사가 미국의 유명한 경제 잡지에 난 적이 있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드는 비용을 기저귀 값부터 식비, 학비, 용돈, 병원비, 여행비, 결혼 비용 등 항목별로 계산해서 그것으로 대신 할 수 있는, 살 수 있는 것들을 보여주는 기사였는데 '참 미국스럽다.'고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흥미 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삶의 모양을, 목적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또 같은 질량의 모성애나 부성애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한번의 test drive(시운전)도 없이 한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부모가 된다는 건 어찌 보면 과한 용기이고 무모한 도전이다.

직업을 갖는 데에도 자격시험이 필요한데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부모노릇을 하는 데엔 자격시험이 필요 없다니.... 참 아이러니 하지 않나? 어찌 자식 키우는 게 빵굽기 보다 쉽다는 건지...?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힘들고 끝도 없는 부모노릇을 잘 해내고 있으니 신이 인간의 DNA에 '본능' 이라는 이름으로 진하게 탑재해 놓으신 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 부모노릇도 너무 잘하려다 보니 동티가 나기 십상이다.

때론 나의 인격이, 성품이 부족해서 한계가 보이기도 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과하게 간섭해서 오히려 관계가 나빠지기도 한다. 내 딴엔 최선을 다한다고 했는데도 돌아보면 잘한 것보다 부족하고 미안한 거 투성이다.

그래서 잘한 건 모두 다 지들 공이요, 실패한건 다 부모 탓이 되나 보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부모노릇이 미국(세계 어느) 부모노릇보다 더 길고 깊다는 데 있다.

미국의 어떤 아내도 자식교육을 위해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나라에 가서 살지 않는다.

미국의 어떤 남편도 자녀교육을 위해 수년씩 이름뿐인 아버지, 남편 노릇을 하려 죽어라 일하지 않는다.

어쩌면 미국사람이 한국 사람에 비해 더 이기적이라서 권리는 없고 온통 의무뿐인 이 길을 가려 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헌데 내게는 그게 더 건강하고 인간적인 삶으로 보일 뿐더러 이 진한 한국인의 이타심이 지독한 가족이기주의와 동일어로 들린다.

이렇게까지 인생의 귀한 시간을 유기하고, 또 고달픈 인생에서 최후의 보루인 가정까지 저당 잡히며 이뤄야할 게 무엇이며, 과연 이룬다 해도 그만큼 가치가 있는 건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부모의 희생을 당연시해도 문제이고, 미안해 한다면 아이들에겐 이중의 짐이 된다는 이 엄청난 부작용은 어찌 해결할 건지....

나도 이곳에서 27년 이상을 살다보니 미쿡사람이 다 됐는지 이해하기 힘든 것 투성이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교육정책의 실패겠지만 말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부모라 과하게 자식의존적이고(물론 정서적으로) 자식우선주의다. 아이를 낳고 나니 내 인생이 온통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아이가 그 무엇보다 우선 순위를 차지하는 본능적 엄마 말이다.

1년의 연애와 2년 6개월 동안 둘만의 신혼을 보내다가 첫아이를 낳은 후, 아이와 잠들고 아이만 끼고 살던 내게 남편의 따끔한 투정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결혼생활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다를 수도 있었으리라!

남편은 그때 확실히 선언했다. "지월, 우리는 사랑해서 결혼했지, 아이를 낳으려고 결혼한 게 아니야!"

그 말을 하고 뒤돌아서 안방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어, 그날 밤으로 아이를 아기침대에 뉘고 난 아기방에서 철수했다.

지금도 아찔하다! 만일 남편이 그때 서운함을 표현 안하고 속으로 삭이다 비뚤어지기라도 했음 어쩔 뻔...?

여자들이 착각하는 한가지가 모성애가 부성애보다 깊다고 생각하는 거다. 물론 같이 낳긴 했지만 길고 긴 임신기간과 모진 산통을 직접 겪은 엄마에 비해 아빠의 체감온도는 낮고 또 반응은 좀 느릴 수 있다.

내 생각에 남자에게 아이란, 동전을 넣고 9 개월쯤 후에 튀어나오는 자판기 같을 것 같다. 분명히 동전으로 넣었는데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오는... 그러나 표현하는 모양새가 다르고 역할이 다를 뿐 똑 같다.

모성애든 부성애든 그 근본은 책임감이다. 생명을 세상에 내 놓았으니 돌봐야 한다는... 그래서 아빠들은 아이가 하나씩 생길 때마다 생명보험을 늘리고, 더 열심히 일하며, 아이의 방과 후 활동으로 인한 식은 밥상과 아내의 부재를 기꺼이 견딘다.

그런 아빠의 부성은 때때로 아이들과 아내와의 접촉, 접속 부족으로 인해 과소평가되고 최악의 경우 황혼이혼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어쩌면 엄마가 아이를 돌볼 기회를 처음부터 독차지하고, 모성이라는 이름 뒤에 아내의 이름을 숨기고 자신과 남편의 건강한 결혼생활을 허물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아내들은 스스로 의문해 볼 필요가 있다.

어차피 자식은 크면 부모를 떠난다. 잘 키운 자식일수록 멀리 떠나고, 못난 자식은 평생 내 곁에 남아 내게 끝까지 부모 노릇을 종용할 확률이 더 크다.

어쩌면 잘난 자식의 보답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못난 자식의 끝없는 뒷바라지가 겁나 우리는 애들에게 그토록 정성을 다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자식 농사는 잘해봐야 본전인 게 확실하다. 그래서 이제는 이 밑지는 장사에서 그만 손 떼고 싶어진다.

일 년에 한두 번 들를 뿐인 자식들을 위해 항상 방을 비워두고, 어쩌다 듣게 되는 목소리를 기다리는 이 지긋지긋한 짝사랑을 관두고 싶어진다.

죽이든 밥이든 지들이 끓이는 대로 먹고 살라고 모른 척 하고 싶다. 우리도 이젠 늙어가 힘 빠져서 좀 쉬고 싶다고 애들한테 외치고도 싶다.

그러나 어쩌랴! '결자해지'라고... 모든 건 애들 허락 없이 시작한 부모의 몫인 것을... 그리고 나 역시 내 부모에게 그런 자식이었던 것을...

신이 모든 인간을 다 돌볼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고 하나, 역설적으로 자식이 없다면 인간은 종교를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가장 절실한 기도란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자식을 신께 부탁하는 간절함의 발로이니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내 자식의 안녕을 신께 구해본다. 나는 손이 짧은 인간이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