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이름은 정지월.

원래 신라의 명문 9성에 해당하고 고려 및 조선시대에 수많은 상신을 배출한 동래 정씨(鄭-조선시대에만 정승 17명, 대제학 2, 문과 급제자 198명으로 왕과 왕비를 한번도 배출하지 못한 문벌로는 최고의 숫자)의 후손으로 연못 지(池)에 달 월(月)을 쓴다.

원래 시, 음악, 영화에 조예가 깊으셨던 (옛날로 치면 한량기가 다분하신) 친정아버지께서 친히 지어주신 이름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 염원이 들어있는 이름이다.

또 친정어머니의 태몽에서 환한 보름달에 싸인 어여쁜 낭자를 본 뒤 딸인줄 알고 낳은 아이였지만 크게 되라고, 본디 모든 위인과 영웅은 태몽과 연관있는 이름을 지었더라는 게 아버지의 믿음인지라 꼭 달 월 자를 넣은 이름을 짓다 보니, '연못위의 비췬 달 '의 의미를 가진 지월이 되었다.

Jiworl Seok은 현재 미국 애틀랜타에 살고 있다. 전주 성심여고와 전북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으며, 미국에 건너가 필라델피아 무어 예술 디자인 대학(Philadelphia Moore College of Art & Design)을 졸업했다. 한국 이름은 정지월.

평소 이름에 불만을 표하기를 일삼던 내게 아버지는 항상 박목월, 김소월을 들이대셨다. "아빠, 그들은 '호' 잖아요. 본명이 아니라..." "그러니 너는 호를 따로 지을 필요도 없이 얼마나 좋으냐?" "술김에 지으신 이름이죠?" "이태백이가 연못에 뜬 달을 잡으러 들어갔다 죽었다니 얼마나 고혹적이었으면 그랬겠냐?" " 맨정신에 그랬겠어요? 걔도 취해서 그랬지!"

이것이 울 아빠와 내가 이름을 놓고 실제 벌였던 설전이다. 나는 내 이름에 불만이 없었다. 적어도 중학교에 들어가기 까지는...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엄마의 비호가 사라지고,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나는 내 이름이 불편해지고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친구들이 아닌 선생님들로부터 시작됐다. 아직은 순진하고 세상물정을 모르던 친구들에 비해 선생님들은 -특히 남자선생님들- 내 이름을 보면 꼭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고, 그후론 나는 신학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순간이 두려워지는 신경증을 갖게 된다.

엄마도 내 고충을 이해하셨기에 둘이서 조심스럽게 개명의 의사를 밝히기도 했으나 아버지의 추상같은 호통에 본전도 못찾고 엄마와 나는 다시는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대학 1학년때 국문학개론 수업때 정하영 교수님이 출석부에서 내 이름을 보시더니 그 유명한 "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에 해당하는 물음을 깔끔한 서울 말투로 주셨다. "자네 아버님 글 쓰시나?" "아뇨, 사업하시는데요" "그럼 술 좋아하시나?" "녜, 많이요!" " 그럼 언제 나하고 술한잔 하시자 전해라" 그날 밤 우리 집에서 정하영교수님은 우리 아버지의 깊은 뜻을 알아준 단 한명의 진정한 지식인이 되셨다.

이렇듯 난 내 이름과 살갑지 못한 관계를 가지다가 미국에 와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석지월이 됐다. 성씨 덕분에 약간은 덜 속스럽고 살짝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스님스러운...

그리고 나는 내 이름을 미국사람들이 발음하기 어려운 지월 대신 "지" 로 부르다가, 나중엔 하나 덧붙여 "지지(Gigi)"로 했다. 프랑스에서는 흔한 이름이다. 곧 죽어도 불문학도였으므로...

이런저런 이유로 시민권 신청을 미루다 내가 미국산 지 20년 만에 시민권 인터뷰를 하던 날, 이름을 바꾸겠냐는 대목에서 난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나 결국 나의 선택은 '아니오' 였다. 정말이지 한참을 망설였다.

그 얼마전 미국 우리 집을 방문하셔서 "지월의 노래"라는 내 태몽을 시작으로 한 시를 일필휘지 하사하시고 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며, 아무리 멀리 살아도 차마 살아 생전엔 그분께 개명의 비보를 전해 드릴 순 없다는 판단에서 내 이름을 지키리라 마음먹었다.

그래서 난 지금도 '지월'이다! 혹은 한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아 좋다고도 하고, 남편이 "지월!" 하고 부르는 어감은 약간 달콤도 하다. 하지만 난 아직도 내 이름과 100% 화해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절대 고전무용이나 가야금, 동양화 등 그쪽(?)을 떠올리는 분야는 일부러라도 피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아버지의 원대한 작명 계획에 부응하지 못한 채 시시하게 살고 있다.

옛부터 작명은 그 사람의 인생을 운명짓는다고 할 만큼 중차대한 일이었다. 이름은 평생 얼굴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얼굴보다 더 자주 나를 대표하는 또 다른 '나'이자 내 존재의 상징이다. 그래서 이름은 곧 나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리 중요한 이름이 나의 선택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결정지어 진다는 것은 사람이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는 것처럼 불가항력의 일이다. 부모는 신이 점지해주고, 이름은 부모가 점지해준다. 그렇다면 부모들은 이 엄청난 권력을 좀 신중히 행사할 필요가 있다. 말 못하는 신생아의 법적대리인으로서 작명의 의무를 신성하게 치러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적어도 내 이름을 온전히 내 것으로 지으셨다. 그것도 특별하게... 적어도 가족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이름인 영남이, 순남이, 기남이, 말순이나, 성의없이 나온 순서대로 지은 일남, 이호, 삼순이 등으로는 짓지 않으셨으니 말이다.

그 분들도 이름 땜에 꽤 한많은 세월을 보냈으리라! 자신의 이름이 뒤에 올 누군가를 위한 기원의 도구였거나, 아니면 한낱 번호에 지나지 않는다면 참 서운할 듯하다.

사람이 일단 태어나면 신고는 해야 되니 어떤 이름이든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15살쯤에 모든이에게 자기 이름을 고를 기회를 제도적으로 주는 건 어떨지? 물론 옛이름을 지킬 권리도 있다.

누군간 이글을 읽으며 배불러 하는 헛소리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이름 땜에 애매한, 억울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기에 하는 소리다. 다행히 우리 아이 둘 다 부모의 작명 센스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아빠, 제발 제가 이름값 하는 날까지 건강히 버텨 주세요!"  이러다 우리 아빠 백살도 훨씬 넘게 사셔야 할 거 같다. 나 뭐라도 빨리 하나 돼야 될텐데... 근데 그 가능성은 에베레스트 정상의 산소만큼이나 희박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