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여름이 길고 뜨거워 '핫틀란타(Hotlanta)'로 불리는 이곳 애틀랜타는 아직도 뜨거운 한 낮을 보이지만 어째 나무 끝에 걸린 햇볕 끝의 채도가 좀 변했다 싶다. 한국 절기로 입추가 지났다니 참 조상님들의 계절 계산법이 신통방통할 따름이다.

페친인 강모 기자와 전북포스트 덕분에 매일 내가 사는 이곳보다 한국 날씨를 더 잘 알게 되다 보니 여기나 거기나 징하게도 더운 여름을 난 올해임을 알겠기에 가을이 반갑기도 하다. 하지만 해마다 이 계절을 타는 나는 마음이 쓸쓸하다.

Jiworl Seok은 미국 애틀랜타에 살고 있다. 전주 성심여고와 전북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으며, 미국에 건너가 필라델피아 무어 예술 디자인 대학(Philadelphia Moore College of Art & Design)을 졸업했다. 한국 이름은 정지월.

남들은 봄을, 가을을 탄다는데 난 유독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아침 저녁으로 살짝 쌀쌀해지고 햇볕조도가 갑자기 낮아지는듯한- 이 계절에 민감해진다. 시장에 먹포도가 깔리고, 비행하고 있는 잠자리들이 한마리씩 출현하기 시작하고, 햇볕 땜에 뿌옇던 하늘이 한 뼘이상 먹먹해지는 이 계절이 오면 난 갑자기 우울해지고 막 아무데나 떠나고 싶어진다.

이 병은 어릴 적부터 있던 지병인지라 내 친한 친구들은 다 알고 있는 증상이다. 그래서 이맘 때쯤의 나는 일년 중 제일 맥없고 재미없는 사람이 된다. 자가진단을 해보건데 내 생일이 딱 이때 쯤인데 태어난 게 무지 슬펐거나(무의식의 트라우마), 아니면 일조량의 갑작스런 감소로 인한 광합성 부족증상(선천성 비타민 D 결핍증)이 아닐까 한다.

내게 여름이 가는 것은 한 해가 가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치열했던 여름을 보내고 나면 웬지 그 해는 다 살아버린듯 하다. 덥다 지겹다 하면서도 맹렬한 열기로 온 세상을 익게 하는 태양의 생명력을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사랑하는 걸 게다.

그래서 릴케도 그리 햇볕을 더 달라고 조르지 않았겠나? 핑계는 더 풍성한 수확이라 했지만 ... 실상은 이 분도 여름이, 아니 젊음이 가는 게 싫은 거다.

여름은 젊음이고 열정이다. 끝이 없을듯, 봐주지 않을듯 달궈대고 이글거리지만 계산해 보면 일년 중 그리 길지 않은 폭염이, 달의 인력에 금세 식어버리는 대지가 우리의 젊음을 닮았다. 짧지만 격정적인 연애같은 여름은 그래서 아름답고 허무하다!

가을엔 누구도 집을 짓지 않는다는 동시인의 말처럼, 여름이 지나면 아름다운 가을을 즐기기도 전에 우리는 겨울을 이야기하고 준비한다. 그러니 철없이 아니 적극적으로 여름을 즐겼어야 했다.

난 왜 그리 태양을 피하려고만 했을까? 젊었을때 뭘 그리 두려워 했었을까? 어차피 식어 버릴 가슴과 시들어 버릴 몸을 왜 그리 아꼈을까? 왜 한번도 정신줄을,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로 미쳐 버릴 무언가를 원했던 적도 없었을까? 왜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도 없는 인생을 살았을까?

열정을 갈구하나 그 열정에 타죽기를 걱정하는 인간의 가슴에는 식어가는 용암만이 들끓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여름을, 젊음을 흘려 보내버린 내게 요즘 드는 생각들이다. 아마 최근 몸의 일부 -갑상선-를 떼어내서 더 허한 모양이다.

더 여름이 물러나기 전에 끝물 수박이나 포도라도 잔뜩 먹어놔야겠다. 가을엔 또 가을의 과일이 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