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능금빛 노을이 물들 때(1)

김해김씨 순옥은 박꽃을 뒤집어쓴 것처럼 살결이 고왔다. 이영남과 차마 눈길을 마주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약간 비낀 순옥의 턱선은 붓으로 그린 것처럼 아름다웠다.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하고 수줍게 포개진 손에도 박꽃 살결이 피어 있었다. 이영남이 가냘퍼 보이는 순옥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가슴 안쪽으로 고개를 뉘자마자 그녀는 손을 들어 이영남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능금빛 노을을 손가락 끝에 모아 이영남의 코며 입술이며 귓불을 어루만졌다.

전라도 남원부 육모정 근처가 고향이라고 했던가. 어떤 이유로 여기 통제영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이영남은 이순신 장군과 1차 출정해서 승리하고 돌아온 저녁, 여수의 군영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다. 자신은 환자였다. 가슴에 왜군 장수의 칼을 맞아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때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정성껏 치료해준 여인이 순옥이었다. 영남을 간호한 후에도 순옥은 좌수영에 머물렀다.

순옥은 의술에만 출중한 게 아니었다. 병사들의 군복을 손질하는 그녀의 바느질 솜씨는 야물었다. 뜯어진 데를 꿰매고 찢어진 데를 여미듯 조각천을 잇대어 다시 꿰매는 솜씨는 야물었다. 순옥의 바늘귀가 땀땀이 지나간 데는 다시 뜯어지거나 찢어질 것 같지 않았다. 골무를 낀 검지로 옷감 안에 바늘을 밀어 넣고 옷감에 바늘의 눈이 보이자마자 이를 뽑아내어 싱싱한 생선의 포를 뜨듯이 실을 박아가다가 다시 옷감 안쪽으로 깁고 홀치고 호며 감치고 후비며 공그리는 솜씨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이란 말이 그냥 있지 않음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술이나 한잔 쳐주오.”

“쇤네는 주모가 아니옵니다.”

“주모가 아니어서 술을 쳐달라고 하였다오.”

이영남은 순옥의 발그래진 볼을 바라보며 술잔을 들었다. 군데군데 헤지고 구멍이 난 이영남의 군복을 빨아서 꿰매고 다림질하여 가져온 날 저녁에 그는 순옥에게 저녁밥을 대접하고 있었다. 순옥이 자신이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면서 사양했지만 형형한 이영남의 눈길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병졸들에게서 들었던 순옥의 얘기, 어디 한 군데 흐트러짐이 없는 여인이라는, 아무에게나 눈웃음치는 논다니가 아니라는 얘기가 이영남의 뇌리를 스쳤다.

그녀는 권관 김대수의 누이였다. 대수는 언젠가 막걸리 한잔하면서 한양에서 들리는 풍문을 안주 삼은 적이 있었다. 임금이나 조정에서 어떤 일을 그릇되게 판단할 때면 왜 선비들이 궁궐문 앞에 떼로 몰려가는지 아느냐고 묻던 것이었다. 이영남이 의아해하자 대수는 빙긋이 웃으면서 통일신라 때부터 불렸다는 민요 해가(海歌)를 꺼내 들었다.

“성덕왕이 아끼는 신하 순정공에게 강릉 태수를 명하자 순정공은 부하들과 경주에서 곧바로 짐을 꾸렸지요. 경주에서 강릉까지 길도 멀었지만 바닷길을 타야 했어요. 그런데 순정공의 아내 수로부인은 아름다웠어요. 누구나 탐내는 여인이었지요. 이 소식을 바다의 용왕이 모를 리 있겠어요? 바닷길을 타고 온다는 기별을 듣자 기다렸다가 납치해 버렸지요.”

“그래서?”

“순정공은 어쩔 바를 모르고 동해안 백사장에 털썩 주저앉아서 망연히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지요. 부하 중에는 소리 내어 우는 병사들도 있었고요. 그러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연유를 물었다고 해요. 부하 한 사람이 수로부인 납치 사건의 전모를 얘기해 주자 노인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고 해요.”

-예로부터 이르기를 천 사람, 만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일 수 있다고 했다. 그대들이 뜻을 모아 백사장을 치면서 “용아, 용아. 남의 아내를 빼앗은 죄가 얼마나 큰 줄 아느냐. 얼른 내놓지 않는다면 그물을 쳐서 너를 잡아서 불에 구워 먹으리라.” 이렇게 노래를 부르면 그대들의 집단적인 소망을 이룰 수 있으리라.

“이에 순정공과 부하들이 백사장을 치면서 이 노래를 부르자 과연 용이 하루를 못 버티고 수로부인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이영남은 이 얘기를 듣고 정말이야, 하고 되물었다. 김대수의 목소리는 찬찬했고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대수는 영남에게 용을 본 적이 있느냐, 정말로 용이 있느냐고 물었다. 대수는 영남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용은 없지요, 다만 권력을 상징하는 대체물 아니겠어요, 이러면서 강릉 태수의 직분보다 더 높은 어떤 권력자가 순정공 아내의 미모에 반해서 납치한 것이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용으로 상징된 권력자이니 바닷물 속으로 수로부인을 끌고 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닷물 속은 물론 얘기의 설정이다, 어지간한 권력자의 힘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자기 집으로 수로부인을 납치한 것이다. 이러자 순정공은 부하들을 끌고 수로부인을 납치한 권력자의 집 대문 앞으로 가서 연좌농성을 벌인 것이라고 말을 이었다.

“용으로 상징된 권력자는 창피한 일 아니겠어요? 사람들이 오가는 대문 앞에서 여기 집 주인이 순정공 아내를 빼앗았다네! 하고 나발을 불어대고 있으니. 그러니까 권력자가 더 주접을 떨지 못하고 수로부인을 놔준 사건이었지요. 한민족(韓民族) 역사에서 최초로 민권이 승리한 일이기도 하고요”

김대수는 이영남에게 천 사람, 만 사람의 입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들이 만백성이며 곧 하늘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만백성이 뜻을 합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 통일신라 때 권력자 앞으로 백성들이 떼로 몰려가서 농성을 벌여 최초로 민권이 승리했다는 것,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나랏일이 잘못되었다거나 억울한 일이 생기면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몰려가서 항의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백성들이 벌이는 농성의 원형이 통일신라 때 불렸던 해가(海歌)라면서 대수는 천천히 막걸릿잔을 들던 것이었다. 대수가 들려준 얘기는 모악산에서 무예를 익힐 때 스승님께 들었던 얘기이기도 했다. 만백성의 뜻이 곧 하늘이라고 가르치셨던 말씀의 뜻이 통일신라 시대 때부터 전해져 왔다니 이영남은 새삼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 계속>

글쓴이 /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