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출정(出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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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실을 부장은 이순신 장군에게 보고했다. 이영남이란 사람의 인물됨과 일을 대하는 자세, 원균의 진중에 들어서 근무할 때의 태도 등을 보고받은 뒤 이순신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영남의 고향 전주라면 자신이 잘 아는 고장이었다. 임진왜란 전에 전라감영에서 근무한 적이 있고 정읍에서 현감(1589)을 지낸 적도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팔도에서 조정에 가장 많은 세금을 바치는 땅 전라도, 그러므로 조정에서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땅 전라도, 다행히 전라도는 아직 안전했다. 그곳의 관찰사가 머무는 곳, 전라감영도 전주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혁명가 정여립 사건 때문에 피로 아로새겨진 곳이었다.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 했던가. 이 일은 자신이 정읍 현감으로 있을 때 벌어진 참사였다. 정여립과 관계가 있는 선비들이 무자비하게 도륙당한다는 소문이었고 사실이 그러했다. 이순신 장군은 정여립과 직접 만난 적은 없어도 그의 명성은 익히 듣고 있었다. 조선팔도에 이름이 높은 천재, 율곡 못지않게 어떤 일을 물어도 막힘이 없고 성정이 맑고 곧다고 하였다.

조선은 고변(告變)에 자유롭지 못한 나라였다. 고변이라는 못된 풍토가 고질병처럼 도져서 사림(士林)의 목숨을 위협하는 나라이기도 했다. 기축옥사(己丑獄事) 또한 이 고질병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정여립과 인연 맺었던 사람들로부터 정여립과 편지 한 장이라도 주고받은 사람들까지 무려 1천여 명에 달하는 지식인이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함으로써 성리학의 학풍이 끊어진 곳이 전주였다. 죽임을 당한 지식인의 혈육들은 노비가 되었다던가. 젊은 남정네들은 수군에 징발되어 노꾼으로 복무했다고 하던가. 이순신 장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고개를 저을수록 그때의 일은 되살아났다.

정여립과 관계된 대동계, 그것이 역모이든 아니든 일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서는 사실 여부를 엄정히 수사하는 게 순서였다. 그 후에 역모로 결론이 지어지면 치죄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도 왜 저들은, 정철을 앞세운 서인(西人) 일파는 전주의 지식인들을 도륙부터 했던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파벌의 잇속 싸움에 익숙한 저들을 누가 야물게 치죄할 수 있는가.

조선은 사림(士林)이 이끄는 나라였다. 삶과 역사에 대한 의견이며 나랏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지식인들은 의견을 달리 할 수 있었다.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논쟁은 단순한 파벌싸움이 아니라 사회의 발전적 징후로 읽혔다. 그러나 기축옥사 때는 달랐다. 이순신 장군은 또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전주에서 벌어진 이 떼죽음은 결국 정여립이란 인물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기축옥사 이후 조정은 당파싸움의 장으로 표변될 것이고 결국 조선이란 국가가 파벌 나뉨의 장으로 전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었다.

정여립은 선조 3년(1570년) 문과에 급제했고 출세 가도를 달리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율곡의 제자였던 정여립은 율곡이 죽자 그의 행실을 비판하고 동인의 영수(領袖) 이발과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자신은 동인도 아니고 서인도 아니라고 밝혔다. 동인과 서인의 싸움에 자신을 끼워 넣지 말라고 주장했다. 이런 정여립의 태도를 임금까지 비판하자 정여립은 고향인 전주로 낙향했다.

그는 전주와 가까운 진안군 죽도에서 서실을 짓고 대동계를 조직했다. 여기에서 정여립이 어떤 지식인인가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대동계의 계원을 정할 때 신분의 차별을 없앴다. 유생과 서얼, 평민, 승려, 노비까지 망라해서 조직을 이끌었다. 계원들은 서로 존중했고 서로 존중받았다. 폐쇄적인 조선의 신분제도에 비판의식을 가진 이가 정여립이었고, 사람들이 차별 없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그리워했으며 이를 실현하고 싶었던 지식인이 정여립이었다.

그는 대동계를 이끌면서 “천하공물론”을 역설했다. 천하는 주인이 없다는 정여립의 목소리는 뜻하는 바가 컸다. 못난 군주가 만천하의 주인이 되고 그 군주의 더 못난 아들이 또 군주가 되는 이따위 낡은 사상을 버리자는 게 정여립의 생각이었다. 군주제를 맹렬히 비판한 것이었다. 그의 생각에 동의하는 대동계 계원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조직도 점점 커지고 단단해지고 있었다. 1587년 왜적이 전라도 손죽도(損竹島)에 침입하자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출동해서 물리친 점은 그런 측면을 보여주고도 남았다.

이순신 장군은 고개를 들었다. 정여립의 생각이 어떤 곳에 머물고 있는지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뜻이 같지도 않지만 설령 정여립이 옳더라도 그것이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대동계가 왜적을 물리친 막강한 조직일지라도 조선을 대표할 만한 조직은 아니었다. 군사적으로도 군왕이 가진 병력에 비할 수조차 없었다. 더구나 군왕이 조선의 주인으로 행세하는 명백한 사실을 부정할 지식인이 조선에 많지도 않았다. 이런 풍토에 군주제를 비판하다니. 천하공물론이라니. 정여립의 생각은 씨도 안 먹힐 가능성이 컸다.

군왕은 왜적을 물리칠 정도로 세력이 커진 정여립의 대동계가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마침 고변이 들어왔으니 군왕에게는 정여립을 응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셈이었다. 하지만 일의 순서가 엉망이었다. 천하공물론의 생각을 가졌고, 평등 세상을 현실화하고 싶었으며, 왜적을 물리칠 만큼 세력이 커진 이유가 무엇인지를 따져본 뒤 역모가 확실하다고 결론을 내렸다면- 그때 대동계를 해체하고 핵심축인 몇몇에 죽음을 가함으로써 이 일을 끝맺음했어야 옳았다. <다음 편에 계속>

글쓴이 /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