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출정(出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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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8월. 통제사 이순신 장군은 망루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파도는 쉴새 없이 밀려와서 장군의 발아래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부장이나 호위무사 없이 단독으로 망루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일은 장군에게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는 개인이 아니라 조선 수군을 상징하는 인물이었으므로 통제사가 가는 길에는 늘 부장들이 그를 에워싸듯 경호에 신경을 썼다.

쉼 없이 밀려오고 쉼 없이 밀려 나가는 파도. 이순신 장군의 눈앞에 지난 한 해- 정유년에 일어났던 일이 떠올랐다. 장군은 1597년 2월 26일에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이날 원균이 새 통제사가 되었다. 의금부에 갇힌 장군은 3월 14일에 파직되었고 3월 30일 석방되어 백의(白衣)를 입은 신세가 되었다. 4월 8일에 도요토미의 재침공으로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7월 15일과 16일에 칠천량에서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대패했고 7월 21일에 백의를 입은 이순신 장군은 노량에 도착했으며 7월 23일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었다. 장군은 회령포에서 12척의 판옥선을 찾았고 후에 1척을 더 확보했으며, 8월 27일 어란포에서 구로시마의 배 8척을 격파했다. 조선 수군을 벽파진으로 이동시킨 뒤 9월 7일 그곳에서 왜적 수군 13척과 교전을 벌였고, 9월 16일 명량해전에 승리했다.

명량해전의 장쾌한 승리. 조선팔도에 승전보를 알린 이 전투의 승리는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의 재기를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왜적은 잔인했다. 임진년에 들이닥쳤던 때와 다르게 정유년에 들이닥친 왜적은 살상용(殺傷用) 무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조선팔도가 새파랗게 겁에 질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명량해전의 승전보는 조선군 전체에 만연한 패배주의를 씻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울돌목이라고도 불리는 명량에서 장쾌하게 승리한 후 통제영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안위에 더 세심한 신경을 썼다. 고금도〔현재 완도〕 통제영을 감싸듯 파도는 다시 밀려오며 산산이 부서져 튀어 오르는 파도와 몸을 섞었다. 장군은 갈매기가 끼룩거리는 소리를 귓결에 흘렸다.

왜구의 지휘부는 지금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느라고 골이 빠졌을 것이었다. 순천 왜교성에 있는 왜구의 수장 고니시도 그럴 것이었다. 임진왜란(1592년)이 터졌을 당시 일본군 제1선발로 한양을 가장 먼저 점령했던 고니시. 그러나 그는 쉽게 조선의 바다를 빠져나갈 수 없었다. 조선의 판옥선들이 순천 왜교성 앞의 광양만 바깥에서 이들을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망루에 서서 바닷바람을 탔다. 흰 수염이 파도를 타듯 바람에 날렸다. 전쟁의 끝을 예감하고 있는지 장군은 태산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조선의 판옥선 전체를 몰고 나가서 마지막 전투를 치르겠다는 마음을 굳히는 중인지도 몰랐다.

이때 갈매기 소리가 또 끼룩거렸다. 누가 온다는 것인지 무슨 기별이 온다는 것인지. 장군은 고개를 들었다. 몸을 돌려 통제영 쪽을 내려다봤다. 망루 저 아래에서 첨사 이영남(李英男)이 군관 몇 명과 걸어오는 게 보였다. 걸음걸이로 봐서 급한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자신을 찾는 발걸음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전의인(全義人) 첨사 이영남. 혼자서 능히 천 명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무예가 뛰어났고 부하와 백성의 뜻을 떠받들 줄 아는 장수. 그는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이 조선의 실체임을 자각한 선비였고 사람의 결을 간직한 무인이었다. 하지만 왜적 앞에 서면 그는 날랜 범으로 포효했다. 함부로 칼을 뽑지 않지만 일단 칼을 뽑으면 여지없이 적의 숨통을 끊었다.

1592년 임진년에 왜적이 쳐들어와서 부산포를 피로 물들이고 조선의 바다를 위협할 때, 그와 첫 전투에 나섰던 일이 장군의 눈앞을 스쳐 갔다.

“장군, 출정해 주시옵소서.”

경상우수영 소속 소비포권관 이영남의 목소리였다. 임진년 당시 자신은 전라좌수사였다. 장군은 4월 15일에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전라도 관찰사 이광, 전라도 병마사 최원, 전라우수영 이억기에게 전라좌수영의 현황을 알리는 공문을 보냈으며 군사 이동과 관계된 상의를 했다. 전투를 대비하는 이순신 장군은 주도면밀했다. 전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군사의 이동, 이것은 전투의 승패를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이영남이 군영 앞에서 또 목소리를 높였다. 경상우수영을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장군은 마음이 밝지 않았다. 조정의 출정 명령이 없는 한 자신의 지휘권 밖인 경상우수영을 돕기 위해서 전선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정을 이영남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이영남은 출정해 달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전라좌수영의 함선을 움직여도 좋다는 조정의 허락이 없다면 경상도 관찰사나 전라도, 충청도 관찰사의 동의라도 있어야 했다. 이런 지휘계통의 명령 없이 함선이 출정한다는 것은 역모에 닿을 만큼 중죄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경상우수영의 위급함을 모를 리 없지만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출정한다는 것은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영남의 힘찬 목소리가 진중을 또 울렸다.

“경상도 바다는 조선의 바다가 아니옵니까! 장군, 경상우수영의 바다로 출정해 주시옵소서.”

소비포 권관 이영남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은 경상우수사 원균의 됨됨이를 익히 알고 있었다. 왜적이 경상우수영 앞바다로 쳐들어오자 원균은 제대로 싸워보기는커녕 판옥선과 협선을 포함한 74척의 군함과 군기며 화포를 바닷속에 처박아버리지 않았던가. 왜적들에 지레 겁먹고 덜덜 떨며 원균이 수하들과 곤양으로 도망치고자 했고, 경상우수영 1만여 명의 군사를 해산함으로써 왜적이 손쉽게 경상도 땅에 상륙하도록 저들을 도와준 장본인이 원균 수사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군대를 해체하고 무기와 판옥선들을 바닷속에 처박아버리고 도망친 이는 결단코 장수일 수 없었다. 옥포만호 이운룡과 소비포 권관 이영남이 크게 노하여 원균에게 항의했음도 이순신 장군은 잘 알고 있었다.

“장군은 임금의 명을 받아 수군절도사가 되었는데 이제 적을 보고 군사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하려 하니 일후 조정에서 죄를 다스린다면 무어라 변명할 것이요,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청원하여 적과 한번 싸워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영남이 이렇게 나오자 원균이 부끄러운 기색을 못 감추며 청병의 일을 소비포권관 이영남이 전담하게 한 사실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이영남에게 “조정의 명령이 없으면 전선들이 전라좌수영 경계를 넣을 수 없다. 자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라고 거절의 뜻을 밝혔다. 그러면서도 장군은 수하들을 긴밀하게 움직이도록 했다. 겉으로 출정 불가를 말하면서도 수하를 통하여 전라감영과 경상감영에 계속 파발을 띄웠다. 전라좌수영의 판옥선이 출정하여 경상우수영의 바다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었다.

소식은 없었다. 전장이 위태로운데도, 며칠 후면 아군의 통곡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올 게 자명한데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러함에도 이영남은 물러나지 않았다. 전라좌수영 앞에서 사흘 동안 통곡하며 “장군, 출정해 주시옵소서!”라고 격하게 울부짖었다. 전라좌수영은 도대체 어떤 나라의 수군이냐고, 경상우수영은 조선의 수군이 아니냐고 맹렬하게 따지는 것 같았다. 이영남의 말이 옳다, 전장의 위급함과 관계없이 조정의 명령을 받아야만 출정할 수 있는 행정이 이렇게 한심할 수는 없다, 이순신 장군은 침통해진 얼굴빛을 가리려고 하지 않았다. 장군은 수하를 불러 소비포권관 이영남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뜻이 옳다면 그 뜻을 굽히지 않을 줄 아는 대장부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이므로 사흘 동안 군영 앞에서 출병을 재촉하는 통곡을 할 수 있었으리라. 소비포권관 이영남의 행적을 알아본 부장은 이순신 장군 앞에 보고했다.

“이영남은 전의인(全義人)으로 전주 사람입니다. 문의공 언충의 십일세손이요, 중중 때 정란원종일등공신이신 청점 창수의 증손이고, 판결사 익충의 손이며, 수찬이신 승효의 당질이옵니다. 키가 육척인 그는 18세가 되는 1588년(선조 21)에 알성시 무과에 급제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 이병초 시인

글쓴이 /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