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현대인은 사람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는 위인이나 영웅을 맹목적으로 존경하지 않는다. 거목이 되기보다는 동료들과 숲을 이루어 삶을 살았던 분들의 얘기에 더 친밀성을 느낀다. 삶의 상황을 풀어나가는 지혜나 전략이 한 개인의 영웅성이나 천재성에서 비롯되기보다는 사람들과 머리를 맞댄 자리에서 더 많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을 깨쳤기 때문일 터이다. 그러함에도 나는, 더불어 살고자 하는 분들이 점점 늘어나는 이 시절에 사람의 결을 간직한 영웅 한 사람을 소개한다.

우연한 기회에 전의인(全義人) 이영남(李英男) 장군을 만났다. 전주 예수병원에 지인을 문병하러 갔다가 그 옆에 있는 선충사(宣忠祠)를 발견한 것이 계기였다. 선충비(宣忠碑)에 장군의 행적이 꽤 자세히 적혀 있었다. 하지만 비문에 적힌 내용이 내 눈길을 끈 것은 아니다. 임진년(1592) 당시 경상우수사 원균이 왜적의 침입에 지레 겁먹고 화포와 무기며 판옥선을 바다에 몰아넣은 뒤 육지로 도망치고자 했을 때, 이영남 장군이 이를 꾸짖고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께 청병(請兵)한 사실과 그 뒤에 치러진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연승하는 데 공을 세웠다는 역사적 사실들이 내 눈길을 끈 것도 아니다.

그가 순절한 지 무려 200년이 넘는 때인 순조 6년(1806)에 송상열 등 전라도 유생(儒生) 75명이 이영남 장군의 증직(贈職)과 정려를 청하기 위해 조정에 올린 상언(上言)이 더 내 눈길을 끌었다. 초야에 머물지언정 조선 역사의 생명체로 움직이고자 했던 유생들이 그의 불꽃 같았던 27년의 삶을 역사에 밝히고자 상언(上言)한 지점, 여기에서 이 글은 시작되었다.

전의 이씨(全義李氏) 이영남은 18세에 무과에 급제했고 칼을 뽑으면 왜구의 숨통을 끊는 데 주저함이 없는 용맹한 장수였다. 그는 자신을 믿고 따랐던 부하들과 병졸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다. 지배층에 함부로 무시당하고 멸시받는 백성이 조선의 근본이자 실체임을 전장(戰場)에서 깨쳤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칼날에 묻은 피 냄새를 바닷물로 씻어내고 고향 전주로 돌아가서 농사짓고 싶던 사나이.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아끼고 대접하는 너나들이 세상을 이루어 평등하게 살고 싶던 조선의 사나이.

공교롭게도 임진왜란이란 7년 전쟁 시기의 이영남은 여럿이다. 당시 흔한 이름이 영남(英男)이었기 때문일 터이다. 『난중일기』 전반부에 이영남으로 추정되는 이름과 관직이 60회 이상 나타났어도 그가 어떤 집안의 이영남인지도 명확하게 가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글은 한 사람의 성씨(姓氏)를 찾는 것에 몰두하지 않는다. 임진왜란이라는 불행 속에서 전사했다는 점만으로도 동명(同名)의 이영남들은 이미 충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한 인물이 살아온 연대기에 집중하지 않는다. 노량해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안팎을 살펴보면서 전의인(全義人) 이영남이 용장(勇將)이었음을 드러냄과 아울러 지식인 이영남의 치열한 내면, 자연인(自然人) 이영남의 인간적 면모에 가깝게 다가갔을 뿐이다. 글의 말미(末尾)에 “이영남 외전(外傳)”을 붙여 전의인(全義人)으로 확실하게 기록된 문헌과 기록들을 밝혔다. 정사(正史)의 기록을 토대로 글의 골격이 잡혔기 때문이다.

이영남 장군과 관계된 역사적 사료를 제공해준 전의 이씨 문중, 특히 초민(樵民) 이주필 선생님의 후의(厚意)를 잊을 수 없다. 글을 쓰는 데 도움을 준 김병용 소설가와 국문학자 김규남 교수, 사학자 A교수, 김성철 시인께도 감사드린다. 글을 쓰는 내내 역사는 화석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오래된 미래라는 생각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소설이 이영남 장군의 역사적 정체성을 수용하고 그 뜻을 넓히려는 분들께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더없는 영광이 되겠다. <다음 편에 계속> /

2022년 4월 20일   이병초

글쓴이 /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