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그리운 춤과 노래 - 막내딸을 등에 업고...

생각해 보니 나는 부모 복이, 그중에서도 아버지 복이 없는 사람이다. 내가 세 살 되던 해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그분에 대한 기억은 거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은 얘기이고,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사진 속 인물일 뿐이다.

하여 내가 혼인할 상대방은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이기를 원했다. 그분들과 살아본 사람은 나와 다르기를 기대했다. 내가 상상했던 만큼 다르다는 것을 알아 갈 즈음 시아버지께서도 돌아가셨다. 혼인한지 10년도 되지 않아서였다.

그분은 좋은 추억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피아노, 기타, 아코디언을 다루던 솜씨는 지금도 나를 웃음 짓게 만든다. 내 복은 거기까지, 섭섭했지만 아름다운 기간이었다.

‘오월은 가정의 달’이라는 계몽의 시간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상실감, 아픔 등과 함께 어머니들이 떠오르는 것을 어찌해야 할까. 요즘 들어 나는 그런 기억들을 벗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약간 유치해 보이겠지만 ‘슬픔은 이제 안녕’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 오월에 나는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의 즐거웠던 한 시절을 2회에 걸쳐 꺼내 볼 생각이다. / 글쓴이 주

시어머니는 오늘 새벽에도 전화를 걸었다. 파김치를 담가놨으니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별난 음식이 생기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텃밭에 심어놓은 불미나리와 머위 등속을 뜯어다 된장기 해서 무쳐놓고 부르시기 일쑤였고, 장에 가서 사놓은 갈치토막이라도 냉장고에서 꺼내 주셨다. 평생을 가족들만 쳐다보고 사신 것이다.

고향집 어머니의 텃밭 / 자료사진

농사짓는 솜씨는 또 어떤가. 80평 남짓한 텃밭이지만 시어머니의 일머리는 대단했다. 감자와 고구마, 호박이며 고추, 가지 때문에 그녀는 쉴 틈이 없다. 밤이면 당신의 아파트에서 끙끙 앓겠지만 해가 뜨기도 전에 텃밭에 가 계시곤 했다. 시어머니의 이런 정성 때문에, 그분과 가깝게 사는 복으로 우리 식탁에는 먹을거리가 넘쳐났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 라는 영화는 농밀하다. 대사 곳곳에는 비유와 상징이 녹아 있고 배우들의 연기는 물 흐르듯 거의 사실적이다.

사람마다 느낌이 제각각이겠지만 이 영화에서 내가 뽑은 최고의 명장면은 엔카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를 몇 소절 따라 부르며 회한에 젖어 드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삐그덕거렸던 무언가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었다.

두 번째 명장면으로는 같은 맥락의 연장이기는 하지만 너무 고소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내 직성이 풀릴 것 같다. 욕조의 유리문너머에서 아버지의 목욕 시중을 들고 있는 어머니에게 본인이 바람났던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캐 묻던 부분이다. 비겁하게 스리 정면에서는 감히 묻지 못하고 말이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포스터.

무심하고 건조한 어머니의 답변을 듣고 있던 아버지의 표정에서 나는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평생 은밀할 줄 알았던 과거가 밝혀지면서 철옹성과 같은 비밀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장면이었다. 가부장의 무례와 과오가 한 개 한 개 까발려질 때마다 무렴해져 혼쭐나는 아버지의 행동들은 내게 아주 깨소금 맛을 안겨줬다.

이 영화는 어머니역의 ‘키키 키린’이라는 나이든 여배우를 상상하며 만든 것은 아닐까 유추하게 했다. 제목 또한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처럼…'이라는 가사에서 따오지 않았을까. 물론 걷거나 계단을 오르내리는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심오한 경지의 히로카즈가 그렇듯 단순하게 제목을 정했을 리 없다며 상상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가끔 뜬금없는 생각에 휩싸이곤 하는 인간이다. 이 영화를 두 번째쯤 볼 때였다. 레코드에서 여가수가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를 어머니가 잠깐 따라 부를 때 느닷없이 내 시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지더라는 말씀이다.

언젠가 딱 한 번 시설 좋고 널찍한 노래방에서 어머니의 춤추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시아버지는 이 세상을 떠나 안 계시고, 열 댓 명의 시댁 친척들과 모여서 놀고 있었다. 아랫세대는 40~50대였고 윗세대는 70대 이상이었다.

노래방에 가면 나는 잘 놀지는 못하지만 분위기라도 맞추려고 나름 애를 쓰는 편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날도 이 사람 저 사람 놀이판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부추기느라 바빴다. 그때 한쪽에서 다소곳이 앉아 가방을 만지작거리고 계신 시어머니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평소 외향적인 분이시다. 그런데 신나게 놀 장소에서 소녀처럼 수줍어하는 모습이 내 눈에 띄곤 했었다. 짓궂은 생각이든 나는 시어머니의 손을 당겨 무대로 나갔다. 그 옆에서 나는 박수를 치거나 막춤을 추어가며 그녀의 흥을 돋우려 노력했다.

어느 순간 내 시어머니의 스텝이 장난이 아니라는 낌새가 느껴졌다. 어깨와 손동작은 또 어떤가. 나비처럼 사뿐사뿐 나는 듯,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한두 번 춤을 춰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녀의 춤사위를 나는 슬쩍 슬쩍 넘겨보았다.

저 연세에 저렇듯 섹시한? 동작이 나오다니 의아해졌다. 급기야 나는 시어머니 옆에서 걸리적거리는 친척들을 밀어내고, 그녀의 파트너로 막내작은아버지를 정해주고 그들에게 무대를 넓혀줬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한장면

나 역시 서너 발짝 물러났다. 우리 시어머니 좀 보라고, 얼마나 멋지냐고, 박수를 치며 소리를 쳤다. 춤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노래를 선곡하여 이리저리 마이크를 건넸다. 서너 곡의 레퍼토리가 바닥이 나자 그녀의 춤도 끝이 났다.

숨을 몰아쉬며 이제 쉬어야겠다 하시기에 나도 따라 앉으며 목청을 높였다. 춤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춤을 배우셨느냐, 시아버지가 춤바람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쫓아갔다가 까짓 거 배워버렸다, 그새 다소곳해지며 환히 웃으신다.

시아버지와 막역한 친구가 서울에서 사교춤을 교습 받아 왔다고 했다. 시아버지는 춤 선생이 밥벌이라도 할 수 있도록 동네 사람들에게 춤을 배우라고 독려하고 다니셨단다. 일단 당신부터 춤을 배웠다. 한 명 두 명씩 그 문지방을 드나들면서 동네는 들썩거렸다.

시어머니는 당연히 이를 못마땅해 했고 화를 끓이던 어느 저녁 막내딸 ‘온주’를 등에 업고 그 셋방을 돌진하고 말았다. 때는 농한기로 방문을 확 열어젖히자 여기 저기 아는 얼굴들이 꽤 많았다고 했다. 남녀들이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가 몸을 댕겼다가 풀어줬다가 일명 ‘돌리고 돌리고’를 하고 있더란다.

어머니는 등에 매달려 있던 막내딸을 방바닥에 내려놓고는 어떤 아줌마의 손을 잡고 있던 남편을 낚아채 춤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해 겨울 내내 일주일에 한두 번 그리 했더니 춤 솜씨가 늘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연을 알 턱이 없는 나는 시어머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연신 박수와 환호성을 보낸 것이었다.

시어머니도 이제는 허리와 무릎이 써금써금 해져 밭일이 몸에 부친다고 한숨을 뱉으신다. / 이현옥(우석대학교 도서관 사서)

글쓴이 / 이현옥 우석대학교 도서관 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