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덕! 사방천지가 꽃이네. 매화, 목련, 산수유, 살구꽃, 수선화.... 땅속의 어둠에서 겨울을 견뎌 내니 맑은 햇빛에서 봄꽃을 보네. 최봉영 선생이 그러셨지. 겨울은 견뎌 내니 겨울이고, 보게 되니 봄이다.

바라고 바라서 하늘이 감응하여 꽃이 피네. 바라는 마음이 우주 생성과 창발의 흐름에 합일하니 바라는 흐름이 곧 ‘풍류風流’라 하셨지. 풍류가 어찌 꽃그늘에 매화주 마시는 것이겠는가? 뭇 생명들이 바라고 바라는 마음이 하늘과 감응하는 흐름이 풍류이니 봄에는 풍류가 활짝 피네.

동학의 말로 하면 기화만발氣化滿發이네. 저 봄꽃들이 겨울의 어두운 땅속, 무엇인지 몰라 아직 분별되지 않아,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는 ‘그렇지 않구나’ 하는 불연不然한 기운에서 노란 수선화, 빨간 매화, 하얀 목련으로 피니 ‘그것이 그렇구나’ 하는 기연其然일세. 이것이 수운이 말한 불연기연不然其然이라 새겨 보네. 

 수운 큰 스승이 때는  다 그때가 있다고 그러셨지.

불연한 어둠에서 씨앗이 햇빛, 바람, 비를 끌어 와 기연한 민들레가 피었다. 씨앗이 피고자 우주 조화가 감응하지 않으면 어찌 피랴. / 사진 : 한승훈

“얻기도 어렵고 구하기도 어려우나 실은 이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니라. 마음이 화하고 기운이 화하여 봄같이 화하기를 기다리라.(득난구난 실시비난得難求難 實是非難 심화기화 이대춘화 心和氣和 以待春和 -제서題書- ) 
 
 인류세의 캄캄한 어둠, 억압, 차별, 전쟁, 핵, 기후위기, 엔트로피(무질서도), 불평등, 코로나19, 대멸종의 예감, 이 불연한 기운들 속에 어찌 개벽화 한 송이인들 피지 않겠는가? 아니 이미 피었지. 인류세의 겨울 너무 일찍 핀 인류화 한 송이! 한 몸이 꽃이면 온 세상이 봄인 것을...

때가 그때가 아니니 뭇 생명들이 바라고 바라는 마음이 새 세상 생성과 창발의 바람을 타면, 풍류하면 어찌 개벽화인들 만발하지 않겠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의 신동엽 시인의 절규가 껍데기는 가라가 아니고 알맹이가 껍데기까지 살리는 진달래 산천인들 어찌 오지 않겠는가?   

 동덕! 얼마 전에 동덕이 황석영 선생과 한 잔 하며 들은 그의 소설 이야기를 하였지. 
  - 그 양반(황석영) 이야기가 꼭 불연기연일세!
  - 무슨 글을 썼간디 그런가? 
  - 흰 그늘, 캄캄한 밤에 널린 흰 빨래....
  - 알아 듣게 말허소. 본디 동리 신재효 선생이 말하고, 김지하가 쓰고, 인자 황석영 선생도 말을 보탰는가?
  -그 양반이 읽어 준 것을 들었는데 근사하더라고. 창비 웹 소설로 연재한다니 글로 찾아보세.

찾아보니 이렇게 쓰여 있네.

조미진 자수 명장 작품 <초충도>. 전주문화공간 향교길68  '바늘로 그린 그림전' 전시 작품. "지금 한 땀, 또 지금 한 땀, 다시 또 지금 한 땀! 간밤 저 불연한 어둠에서 그이는 무사히 번뇌의 천강을 건넜을까? 천강을 건너니 해 뜨고,  나비 날고, 꽃이 피는구나."

  “소리도 괜찮은데 그것만 좋은 놈을 머라고 하는지 아나
  그것만 좋다뇨?
  소리든 머든 다 사람이 하는거 아녀?
  하고 나서 고수 노인은 말했다.
  소리에 그늘이 맞는다. 그늘이 없는 재간꾼을 노랑목이라고 그러지.
  그늘이 무엇인데요? 
  그게 살아 가면서 아프게 곡절을 쓰다 보면 생기는 거지.
  노인이 막걸리 한잔을 주욱 들이키고 나서 다시 말했다.
  한데 그늘이 너무 짙어지고 바닥까지 가라앉으면 소리가 넘어가구 그런다. 소리가 넘어가 버리면 쓰잘데기 없는 소리가 되어 버려. 할 필요두 없구 들을 필요두 없는 소리가 되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흰 그늘이 되어야지.
  흰 그늘이란 무엇인가요?
  그건 그믐밤에 널린 흰 빨래 같은 것이니라.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 황석영 「별찌에게」 1화 -
     
 이 보시게 동덕! 과연 동덕 말이 맞네. 불연기연일세. 그냥 글 맛으로 새겨야 하는 일이나 어줍잖게 몇 자 적어 보네. 황구라도 용서하시겠지. (우리는 20대부터 큰이야기꾼이라는 뜻으로 황석영 소설가를 ‘황구라’라는 명예로운 이름으로 불렀다. 위 인용문은 아직 그 소설이 다 끝난 게 아니어서 황 선생의 본 뜻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심스럽게 인용한다.)
 
흰 그늘 '흰'은 기연일세. 새 하얀 빨래 어둠 속에서 얼마나 선명하고 분명한가? 바로 ‘그렇구나’하고 우리 감각과 지각에 곧바로 들어오네. '그늘'은 불연일세. 그 어둠의 혼돈을 어찌 알겠는가? 감각과 지각으로 분별할 수 없으니 ‘그렇지 않구나’ 하는 불연일세.

감각되지 않고 지각되지 않아 경험되지 않는다고 저 어둠을 없다고 하겠는가? 경험의 이성이 없다고 하여 있는 것이 없겠는가. 저 서구의 철학자들이 노상 하는 말들이 “다 똥이다.”라고 도올처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어설프단 말이지.

동덕 말대로 저 사람들이 모자라고 막히면 우리에게서 빌려간단 말이지. 빌려도 좋지만 참 어설프기 짝이 없어. 우리는 철학이니 사상이니 하지 않아도 단군 이래로 우리 가슴에 그 하늘이라는 게 다 새겨져 있단 말이지. 

 언제인가 어머니가 그러시더군. 

 “야야, 고추가 왜 빨개지냐고? 고런 것을 내가 어떻코롬 알겄냐. 꼬추 지가 익고 싶어 발싸심허는디 고것을 어찌 두고만 보겄냐. 내가 쪼메만 돌보면 고추 지가 바람이랑, 햇빛이랑, 비랑 고런 것을 끌어 와 빨갛게 익는 거시여. 니는 대핵교도 댕긴 놈이 고런 것도 몰르냐“ 

 내가 이 책 저 책 끙끙 앓으며 궁리하던 것을 어머니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지. 한글만 겨우 뗀 분이 절로 깨달은 것을...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완전 먹물 똥이란 말이지. 

 그런디 어쩌겄는가. 먹물 똥이라도 입은 있으니 더 말해 볼라네. 

 ‘흰 그늘’은 불연기연일세.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는 둘 다 기연이고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주인도 노예도 '그렇다'고 할 기연일세. '그렇지 않다'고 할 '불연'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주인과 노예 모두의 바탕에 있는 공통된 아직 뭐라 규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이지. 그것을 사람이라고 할까?(오문환 「해월 최시형의 생활 정치 사상 연구」 참조 편집 인용) 

칠흑 같은 어둠에(그늘, 불연) 널린 새하얀 이불 빨래(흰, 기연)!  흰 빨래 기연 현상 너머에 있는 차원이 다른 알 수 없는 것이 그늘 불연이지. 수운은 천도를 깨치면 불연은 없다고 했다네. 불연이 기연이 된 것이지. 우리같이 헐거운 사람들이 천도를 어찌 깨우치겠는가마는 아마튼 불연은 기연의 바탕이라 할 수 있네.

사람이 유위로서 비행기를 만들었으나 무위한 하늘의 바람을 타지 않으면 어찌 날겠는가? 사람의 유위한 행동이 무위한 우주의 조화와 감응하지 않으면 비행기는 추락한다. / 사진 : 강주영

오문환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 노예와 주인 모두 하늘에 감응하는 존재들이지. 마르크스의 혁명은 생산양식을 바꾸는 기연의 혁명이지만 동학의 개벽은 기연의 혁명을 품은 존재적 문명적 삶의 방식의 불연기연 개벽일까 하네. 그러니 마르크스의 길과 동학의 길은 다를 수밖에 없다네.

동학은 더 더 큰 혁명 품은 개벽이란 말이지. 더더구나 불연기연은 변증법이 아니지. 기연한 것들의 대립과 투쟁에서 합으로 가는 변증법이 아니지. 기연한 것들이 불연한 것과 합일하여 새로움을 생성 창발하는 것이 변증법이겠는가? 
 
 어디서인가 읽었는데 그 사람 비유가 근사하더군.

“새가 날개 짓 만으로 날겠는가? 바람의 흐름을 타야 날지.” 이 말인 즉 이렇지. 새의 날개 짓은 만인만물의 움직임인데 이 움직임만으로 되겠는가? 바람의 흐름이라는 우주적 조화에 감응해야 일을 내는 것이지. 이때 하늘은 유위有爲로서 만인만물에 명령하거나 간섭하지 않지.

다만 만인만물이 자신에 깃든 자신의 하늘을 깨닫고 무위한 우주적 조화와 감응하면 하늘은 생성과 창발로서 함께 하는 것이지. 그러니 우주적 조화는 수운의 말대로 무위이화無爲而化의 도道라네. 여기서 어찌 너와 나, 즉자 타자가 분별, 분절되겠는가. 그냥 한덩어리이지.   

  
그럼으로 새로운 문명론, 정당론, 정치론, 사회론, 사회운동론, 자연론은 동학에서 나올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네. 내가 마르크스주의에 만족하지 못 하고 헤메던 것이 이것인가 하네. 

동덕, 풍류만 풍류이겠는가. 매화 꽃그늘 아래 봄바람을 맞으며 동덕과 더불어 한 잔 하는 것도 풍류일세. 저기 보시게나. 불연한 가운데 기연한 씨앗들이 햇빛과 바람과 비를 끌어와 꽃이 핀다네.

인류세의 겨울 대멸종의 비관으로 가라앉기는 이르네. 혁명 품은 개벽세가 오고야 말 것일세. 저기 북 치고 장고치며 피리 불며 사람이 오네. / 강주영 편집위원

글쓴이 / 강주영 전북포스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