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 이병초의 '맑은 시비평'
<이병초의 '맑은 시비평'> 16. 겨울밤2 - 이봉명
이병초  |  jbpost2014@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20.01.21  14:43:31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겨울밤

  눈을 떠봐도 감아보아도 산밖에 안 보이는 곳, 전북 무주군에서 이봉명 시인은 꿀벌을 치며 산다. 누가 자신을 보든 말든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시의 보폭을 넓혀간다. 지면을 얻고자 꾀똥 누거나 소맷동냥하기에 바쁜 이들을 준엄하게 꾸짖는 것 같다. 어떤 출판사에서 시집을 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어떤 시를 쓰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게 아니냐고 이봉명 시인은 언젠가 내게 목소리를 높인 적도 있다.

 

 

   
소리없이 소리없이 밤이 깊었다. 그날 밤 하얗게 눈이 내렸다.  / 사진출처 = 픽사베이

     
 

       아무렇게나 널려진 집으로

   그날 밤 눈이 내렸다

   아버지가 불러온 가난과

   어머니가 챙겨둔 부끄러움을

   아이들은 잊은 채

   싸늘한 아랫목에 잠들고

   소리없이 소리없이 밤이 깊었다

   비겁하게 세상을 탓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한 건 순전히

   밤이 무섭기 때문이었다

   배고픈 아이들이 잠 속에서 울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긴 밤을 뒤척이다가

   수북이 쌓인 눈길을 쓸어야 하는 일

   모두가 쌀밥으로 보이는 눈 내린 밤

   아이들이 자꾸 운다 그리고 그들은

   꿈속에서 외친다

   슬픈 것 아픈 것 추운 것 다 잊을 수 있어도

   배고픈 건 싫다

   가난은 부끄럽지 않아도

   허기진 밤이 깊을수록

   자꾸만 무섭다

                              -이봉명「겨울밤2, 부분
 

   
'겨울밤'을 쓴 이봉명 시인

  눈 내리는 밤의 소회는 한국시가 얻은 원형적 통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겨울밤과 눈과 배고픔의 등식은 근현대사의 뼈저림만큼이나 우리에게 쓰라리다. 시인은 과거 속으로 들어가서 무서움을 다시 절감한다. 아이들은 “슬픈 것 아픈 것 추운 것”보다도 배고픔이 더 싫겠지만, 절대적 빈곤 속의 밤이 시인은 더 무섭다. 아직도 캄캄한 밤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펴 보이는 서글픈 오늘이기 때문이다.

  돈 때문에 삶이 황폐해졌어도 그 돈을 벌어야만 하는 이중성에 시달려본 사람은 왜 밤이 무서운지를 알리라. 가난보다도, 가난을 물고 있는 밤보다도 자신이 왜 더 무서운지를 잘 알리라. 색깔과 모양만 달라진, 여태 대물림되는 이 땅의 가난은 아무 말이 없다. 눈 내리는 겨울밤의 담채화 한 폭 같은 이 시를 왜 썼는가에 대해서도 답을 미룬다. / 이병초 <웅지세무대 교수>

 

   
이병초 시인

 

이병초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560-022)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성당길 13. 호운빌딩 3층  |  대표전화 : 063)231-6502  |  등록번호 : 전라북도 아 00076  |  발행인·편집인 : 강찬구
등록 및 발행일 : 2014년 8월 7일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현영
Copyright © 2020 전북포스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