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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성장통> 15. 집 1
이병초 시인  |  jbpost20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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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19  12:4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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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가집엔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부엌은 낮에도 조금 침침했다. 밥을 하는 검정솥은 벽에 바짝 붙여 걸었으며 그보다 작은 국솥은 벽과 두 뼘 간격을 두고 걸었는데 벽과 국솥 사이에는 주둥이가 길쭉한 식초병이 항상 놓여 있었다. 

뒷문 위쪽에 쪽창은 방사형 거미줄에 몸이 오그라드는 중이었고 그 옆에 살강이 벽에 딱 붙어 있었다. 부엌을 ‘정지’ 또는 ‘정짓간’이라고도 했는데 정짓문을 열 때면 삐끄덕 하는 소리가 길게 들렸다. 그 소리 바로 옆에 엄청나게 큰 물항아리가 묻혀 있었다.

집은 세 칸이었다. 안방과 새방 사이에 부엌이 있었고 집과 한참 떨어진 옆구리에 한디 변소, 그 옆에 대나무를 발처럼 엮어 만든 대문이 흙 빛깔과 사촌이 되어 있었다. 

늦가을이면 동네 어른들 품을 사서 지붕을 새로 이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사다리 타고 올라가서 용마루에 앉아 있곤 했다. 집이 황방산을 안아 들이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했다. 

황방산 너머에는 먹을 것이 찍찍 깔렸을 거라고, 숙제 같은 것은 안 해도 될 거라고 짐작을 했다. 원래 밭이었던 데다가 집을 앉혀서 텃밭이 컸다. 측백나무울타리와 탱자나무울타리를 눈으로 끼고 돌면 미나리꽝 너머 건너물이 가깝게 보였다.

 

  뒤안에는 시누대밭이었다. 활과 화살을 만들기 위하여 나는 여기에 뛰어든 적이 많았다. 커가면서 나는 여기가 무서운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살가지가 달빛처럼 숨어들었다가 울안에 닭을 잡아먹었던 것이다. 

닭도둑을 쫓아내기 위해서, 목 달아나고 간 빼먹힌 닭을 찾기 위해서 할아버지와 막내삼촌이 나를 대밭으로 이끌곤 했다. 살가지를 ‘삵’ 또는 ‘살쾡이’이라고 한다지만 동네에선 여축없이 살가지라고 불렀다. 

막내삼촌은 열 살 꼬마에게 살가지의 무서움을 일깨워주었다. 몸이 고양이보다 조금 큰 데 얼마나 빠른지 눈에 안 보일 정도라고 했다. 닭의 간만 빼먹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프면 어린애 목줄도 딴다고 했다.

굉장한 얘깃거리였다. 어린애 목줄을 따다니. 그거 잡아봤냐고, 고기는 맛있더냐고 호기심 가득 찬 눈망울로 나는 물어봤을 터였다. 하지만 그 뒤의 기억이 없으니 막내삼촌은 살가지를 못 잡았거나 그 고기를 못 먹어봤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막내삼촌은 나를 데리고 옆으로 늘어서서 대밭을 훑어나갔다. 닭털이 날리거나 뭉쳐진 데를 찾아야 했고 그것을 찾았더라도 섣불리 손대선 안 되었다. 거기엔 내 손가락보다도 굵고 긴 지네가 늘 있기 마련이었으니까. 

댓잎이 수북하게 쌓인 데도 함부로 밟으면 안 되었다. 살모사 대가리가 와락 덤빌지 모르니까. 대밭 밑바닥을 훑다가 댓잎 사이로 일직선으로 내리꽂히는 햇살에 눈길 뺏기고 나서 고개를 들면 눈앞이 깜깜했다.

   
 

  안방에서 할아버지와 나는 겸상을 했다. 아버지와 삼촌들은 그 옆에서 큰 상을 받아 따로 밥을 드셨다. 당신은 저녁에 가끔 반주를 하셨다. 

소주 두어 잔 하시면서 나에게 일쑤「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르게 하셨다. 같은 노래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계속 부르게 하시기도 했다. 이 노래는 돌아가신 친할머니가 자주 부르셨다고 들었는데 할아버지는 새할머니가 계신데도 소주 한 잔 걸치시면 친할머니 생각이 나는가 보았다.

노래를 시키지 않은 밤이면 집안 얘기를 꺼내셨다. 우리집 본가는 효자동 마전馬田인데 거긴 전주 이 씨 시중공파 황강공 자손의 집성촌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왜 우리가 시중공파이고 황강공 자손이며, 마전의 마馬자가 원래 삼베 마麻자였다는데 왜 말 마馬자로 바뀌었는지를 설명하시지 않았다. 다만 성리학을 했다는 당신의 아버지, 즉 내 증조부 얘기에 집중적으로 매달리셨다.

 

  증조부는 일제 때 조촌면 면장이었던 박 씨와 여기 버드랑죽에 터를 잡았다고 했다. 생활이 여의치 않아 목수 일을 자청한 대목大木이었고 지금은 헐렸지만 전주 예수병원과 동산동의 조촌초등학교, 아직도 효자동에 건재한 재실과 황강서원을 지으셨다고도 했다. 

손에 붓 대신 톱과 먹줄을 쥐었지만 꼬장꼬장한 선비임을 알아본 근동의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우리집에 들락거렸다고 했다. 증조부는 당신을 찾은 사람들에게 혼사 일을 잡아주거나, 이름을 지어주거나, 집터, 묏자리를 잡아주는데 그치지 않고 몸이 아프다고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단방 처방도 해주었다는데 일절 돈 한 푼 받지 않았다고 했다.

마당에서 보리타작하던 날 돌배기인 내가 엎어져서 마루 끝을 빨아먹다가 토방으로 뚝 떨어졌다는데, 그런 나를 붙잡으려다 증조부가 낙상하셨고 그 길로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는 것으로 얘기로 끝에 다다랐다. 

할아버지 말씀은 이런 것이었고 집안 얘기를 꺼내실 때마다 이 내용은 한 치의 틀어짐 없이 되살아났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것어야.” <다음편에 계속>

 

   
이병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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