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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언론은 죽지 않고 만들어 진다” <특집 인터뷰>100년의 영욕 '전북언론사' 출간 최동성 언론학 박사
전북포스트  |  jbpost20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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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16  06:4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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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역사건 그 역사 속에는 지엽적인 역사가 있기 마련이다. 기본적으로 지역의 역사는 전체 민족사를 이루는 구심점이다. 지역 역사가 모아져 전체 역사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언론사를 보면 백두대간은 있어도 지역에서 움직였던 언론의 모습은 지금까지 좀처럼 볼 수 없다. 언론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는 자주 논하면서도 한국언론의 초석이 되는 지역 언론의 정체성과 그 변천 과정에 대한 역사적 조명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작은 것을 모르면 전체를 제대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지역의 역사는 한국역사 속에서 특별하게 주목할 필요도 없었고, 주목하도록 부각시키지도 않았다. 이따금 지역의 역사와 주민이 중앙의 시각에서 접근하고 평가되는 역사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동성, 전오열 두 전.현직 언론인이 함께 펴낸 책 '전북언론사'. 전북 100년 언론사의 영욕을 담아냈다. 

그동안 지역 언론에 대한 사고는 거의가 서울 중심의 가장자리에서 피상적으로 진행되었다. 주목받을 수 있는 지역 역사가 중앙 역사의 희미한 단편으로 취급되어 왔다. 문제는 이런 환경이 계속될 경우 중앙 언론과 함께 고난과 기대의 격랑을 겪었던 지역 언론은 한국언론사의 무대에 제대로 등장하지도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전북의 언론은 한국언론사에서 존재감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국가나 지역적으로 언론현장의 역사에서 나름대로 물길을 이뤄낸 것에 비추어 그 발자취는 미약하다. 

지역 언론의 사사(社史)를 제외하면 일부 언론학자와 향토사학자들의 분투하는 노력이 진행되어 왔지만 연구 결과물은 간략하게 요약하거나 부분적인 논문에서 맴돌고 있다. 

부산, 대구, 광주‧전남, 대전‧충남, 제주 등 지역에서 언론사 연구가 상대적으로 활기를 띠고 있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런 점에서 지역 언론을 중앙 언론 중심적인 접근이 아니라 지역 차원에서 규명하려는 노력은 매우 필요하며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현직 기자이면서 모두 언론학 박사인 두 언론학자들이 300쪽이 넘는 분량의 장편의 <전북언론사>를 발간해 주목을 끌만하다. 외부재단의 연구지원을 받아 한국학술정보(주)에 의해 출판된 책이지만 전북언론의 역사를 최초로 집대성한 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전북 언맥(言脈)’을 대의적으로 세우고 명분을 밝히기 위하여 춘추필법의 정신에 입각해서 집필하려고 노력했다”는 최동성·전오열 두 박사. 

책을 완성시키기 까지 철저한 학술적 고증과 전현직 언론인들의 진술, 그리고 디지털 자료와 종이신문을 일일이 열람하는 방법으로 사료를 채집하고 사실(史實)을 정리하는 작업을 거치느라 3년여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지낸 최동성 박사는 “지역 언론은 죽지 않고 만들어진다”고 출간 소감을 말했다.

그를 만나 전북언론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배경과 과정, 내용 등을 자세히 들어보았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인터뷰를 일문 일답으로 정리한 것이다. 

 

► 책을 만들면서 느낀 지역 언론의 현실, 그 중에서도 전북 언론이 처한 현실을 간략히 설명한다면?

"지역 언론의 현실을 말하자면 안타깝지만 암울한 얘기를 먼저 할 수밖에 없다. 지역의 언론이 설자리가 전국적으로나 전북에서도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신문은 신문대로 방송은 방송대로 그 위험과 위기가 통합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까 뉴미디어의 언론 환경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구독률과 시청률이 낮아지면서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됐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전북에서 발행되는 일간신문은 1987년 언론자율화 이후 평균 2년마다 1개씩 계속 늘어나면서 2018년 7월 현재 16개사가 출혈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 가운데 발행부수가 1만부이상 되는 신문사는 불과 2개사 뿐이다. 

 

   
최동성 박사(전북대 초빙교수. 전 전북일보 편집국장)

이들 신문 대부분은 독자가 줄고 광고시장이 축소되면서 늘어나는 적자에다 저임금 등으로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심각한 경영난에 처해 있지만 여건조성이 안되면 휴간이나 폐간하는 ‘시장경제의 원리’가 반영되지 않아서 시장의 정화라든가 시장에서 아예 퇴출되는 시스템이 없다. 말 그대로 이상한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도 오래된다.

지역방송도 어렵고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전반적으로 프로그램이 중앙에서 집중적으로 공급되고 각 방송사의 인프라가 빈약하기만 하다. 광고시장도 지역신문과 같이 열악해서 경영을 악화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신문사나 방송국은 이러한 악조건에서도 애를 쓰고 있지만 독자들이나 시청자들의 신뢰를 떨어뜨리게 한다는 데 있다. 대안을 알면서도 언론의 생명을 이어가고 심혈을 쏟는 상황에서 미처 손을 쓸 수 없는 언론인들의 갈등과 고민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 이유 중 하나를 정치 경제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가 서울과 수도권으로 집중화된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지역’은 ‘뒤처진 곳’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오죽했으면 지역 또는 지방을 한국의 ‘내부 식민지다’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지역언론의 어두운 현실은 한국사회의 중앙 집중 현상이 가져온 또 하나의 부작용이라고도 생각한다."

 

► <전북언론사>를 집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되돌아보면 1980년대 중반에 언론에 입문하면서부터 관심이 있었다. 입사한 신문사는 통합된 언론사로서 언제부터인가 부분적이지만 기자들마저 ‘친,불친’의 움직임이 보였다. 시간이 갈수록 왜 그런지 알고 싶었다. 

또 전북언론의 맥, 이른바 ‘전북의 언맥’이 어떤 산과 강을 이뤄 왔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궁금증을 풀지는 못했다. 당연한 것이다. 전북언론사가 없었으니까.

어느 역사나 지엽적인 역사가 있지 않는가. 지역의 역사가 모아져서 전체 역사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국언론사에 백두대간은 있어도 지역 언론은 주목하지 않았다. 언론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는 자주 논하면서도 정작 한국언론의 초석이 되는 지역 언론의 정체성과 그 변천 과정에 대해서는 역사적 조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지역사회와 선배님들이 지켜왔던 전북언론이 한국언론사의 무대에 제대로 서보지도 못하고 사라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부식되어 사라져 가는 과거의 파편 속에서 진짜 이야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내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고고학자의 참모습, 이것을 거울삼아 더 이상 늦출 수도, 거역할 수도 없는 시대적 소명이라는 언론인으로서의 절박한 인식을 갖고 정리하고 분석하는 일을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한국전쟁 당시 정부가 잠시 이전했던 부산이나 대구, 그리고 이웃 광주‧전남, 대전‧충남, 제주지역 등은 지역사회와 관련단체를 중심으로 서둘러 언론사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와는 매우 대조적인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는 곳이 전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작한 것이다."

 

►사료 수집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 그동안 전북언론 역사를 다룬 신문 기사나 신문사 방송사의 사사, 또 학자들의 일부 논문들은 자료의 출처가 없거나 불분명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전북언론의 역사를 다룰 때 이러한 내용들이 확대 재생산되는 측면이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출처의 원자료를 찾는 작업을 시도했다.

일제강점기부터 1950년대, 60년대, 70년대, 80년대 종이신문과 잡지, 서적 등의 원자료를 찾아 일일이 검토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옛날 신문 디지털 자료와 대학 도서관 등에서 마치 사막에서 바늘을 찾듯이 사료를 수집했다. 옛날 신문 디지털 자료의 경우 국립중앙도서관등이 아카이브를 구축해 예전보다 자료 접근성이 좋아졌지만 검색기능이 아직 미흡해 자료를 찾는데 애로가 있었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종이신문과 관련서적을 닥치는 대로 훑었다. 대학교 도서관에 파묻히다시피 했다. 지난해 늦여름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을 때 주위 사람들이 폭염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도서관이 시원해서 그걸 늦게 알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수집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선배님들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직접 발품을 팔았다. 

대부분 ‘우리가 했어야 했는데’ 하면서 격려를 많이 해주었고, 어느 분은 읽을 만한 신문과 서적을 듬뿍 안겨준 기억도 있다. 그러나 많지는 않지만 어떤 선배는 ‘나를 뒷조사 하는 거야...?’라며 버럭 화를 내면서 전화를 끊는 경우도 있었다. 지나갔지만 희비 상황이 어렴풋이 엇갈린다."

 

► 시대별로 특징만 간략히 소개해 달라. 우선 조선시대의 ‘조보’가 사실상 우리나라 신문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데 조보가 중앙지 성격이라면 지역엔 무엇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렇다. 제도권에서 볼 때 요즘 같은 근대신문이 나오기 전에는 소위 ‘아침 소식’이라는 뜻을 가진 조보가 있었는데, 학계에서는 그걸 우리나라 신문의 효시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손으로 일일이 적어 필사로 전하는 이 조보가 왕권사회에서 중앙지 성격을 가졌고, 이와는 별도로 각 지역의 소식을 전달하는 ‘영기’라는 필사로 만든 지역매체가 있었다. 특이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영기’는 지역 관찰사의 집무관청인 감영에서 나름대로 지역 소식을 모아 조보와 같이 필사로 전한 ‘감영의 기별’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영기에 대한 구체적인 운영 내용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전북에서도 밝혀진 것이 없다. 우리 전북에는 전라감영이 있었기 때문에 ‘영기’에 대한 활동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은 간다. 아무래도 연구자들의 몫일 텐데, 앞으로 여기에 대한 연구의 여지가 많아 보인다. 

이런 제도권 매체인 영기에 대신하여 비제도권의 매체로서 ‘통문’이란 게 있었다. 아직 학문적 관심과 연구가 미흡한 게 현실이다.

다만 조보나 영기가 국왕을 중심으로 상의하달이나 하의상달이 이뤄지는 수직적인 커뮤니케이션이라면, 이 통문은 수평적 수단으로서 동학농민혁명 진영에서 중요하게 이용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통문은 전국 각 지역에 있는 서원이나 향교 등을 통하여 공동 관심사와 소식을 다수를 대상으로 무수하게 전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 사회의 문제를 제기하는 지역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매체였다."

 

► 동학농민혁명이 지역사나 근대아시아 역사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당시 ‘사발통문’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한국언론이 동학농민혁명에서 발단된 갑오개혁 등 일련의 사건으로부터 본격적인 근대언론의 시대를 맞게 됐다는 주장을 알고서는, 우리 전북에서 움트고 저항과 선비의 정신을 남겨준 농민혁명의 활동과 그 과정에서 활용된 매체를 결코 소홀히 넘겨버릴 수 없었다. 전북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주체 세력들은 전국의 교세를 관리하기 위해 내부 통지사항 등을 바로 이러한 통문에 실어 알렸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1893년12월 고부 민중이 시위를 주도하던 시기에 등장한 ‘사발통문’을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이를테면 주모자가 누구인지 모르게 사발을 엎어놓고 여백에 원형으로 관련자의 성명을 작성한 것 말이다. 이 사발통문은 괘서나 참요, 이러한 다른 매체 형식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서 활용되었다."

 

► 전북에서 신문의 형식을 제대로 갖춘 시기는 언제로 보는가?

"전북지역에서 발행된 최초의 근대 신문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명확하지 않다. 해당 신문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 사료를 검토해보면 개화기인 1903년께 군산에 들어와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자신들끼리 주도권 다툼을 위해 근대신문 형태를 가진 신문을 발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1899년 5월 군산이 근대항으로 개항되면서 일본인들이 군산에 많이 들어왔다, 이들 군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신문을 발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전주 군산의 신문도 모두 일본인들이 경영했다. 이들 신문은 처음에는 주로 일본어로 발행하다가 일부 한글로 발행한 것으로 보인다. 해방 전까지 도내에서는 우리 한국인에 의한, 한국어 신문은 없었던 것이다."

 

► 라디오 방송국이 전북에서는 이리. 지금의 익산에 처음 생겼는데 무슨 이유가 있었는가?

"전북에서 라디오방송은 이리, 지금의 익산에서 일제강점기인 1938년 10월1일 시작했다. 이는 조선방송협회의 제1차 지방방송망 확충계획에 따라 설립된 것인데, 지방에서는 부산, 평양, 청진에 이어 네 번째였다. 좀 빠른 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전북과 일부 충남까지 방송 범위였는데 처음에는 일본어로만 방송을 했다고 한다.

 

   
공저자인 전오열 박사(전북일보 편집부장)

전주보다 이리에 먼저 방송국이 들어선 이유는 당시 일본인들이 전주보다 이리에 많이 살고 있었고, 중일전쟁 발발로 중국 대륙을 겨냥한 지리적 여건이 전주보다 이리가 더 적합했다고 본 것이다. 또 이리가 교통요충지로서 호남지방의 쌀 등 농산물 집산지이며, 군산항과 근접해 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 당시 방송국 지역을 선정하는데 힘을 가진 조선방송협회 이사 중 한 사람이 이리에 거주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 일본인에 의해 발행된 매체들이 일제강점기에 주류를 이루었는데 일제에 항거했던 매체들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가?

"1919년 3·1운동 뒤 일본이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정책을 바꾸면서 1920년대 조선인들에 의한, 조선인들을 위한 민간지들의 창간이 잇달았다. 이들 민간지들은 주로 경성, 즉 서울에서 발간했지만, 지역에 요즘으로 말하자면 주재기자를 배치했다. 

이들 주재기자는 전북에 1명만 배치된 게 아니고 현대 행정구역으로 말하자면 전주, 군산, 고창 등 각 시·군에도 지국을 운영하면서 기자를 1~2명씩 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도내에서도 조선인 기자들이 많이 활동하게 되었다. 이들 조선인 기자들은 기자단을 구성했는데 전북에서는 각 지역별 기자단뿐만 아니라, 1925년 5월에는 도내 조선인 기자들이 참여하는 전북기자단이 창단되었다.

이들 기자단은 기자들끼리 상호 친선을 도모함은 물론 지역사회의 중대한 문제를 공정하고 신속하게 보도하고, 지주와 노동자간 분규와 관련되어 공론장을 제시하고, 일제의 식민통치 행위를 강하게 비판하고, 민중들의 계몽과 사회적 폐해를 지적하는 것을 결의했다. 

언론의 기능과 역할을 다 하려고 최대한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28년 4월부터 5월까지 발생한 ‘전북기자대회 사건’이 있는데 이 사건은 일본 경찰이 당시 전국 각 지역에서 기자대회가 많이 열리니까 이를 억누르기 위해서 전북기자대회를 본보기로 강하게 탄압한 사례인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기자들은 지식인으로서 상당수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몸을 바쳐 일하려는 뜻을 가진 ‘지사’들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일본 경찰로부터 탄압과 수난의 고초를 당하기도 했는데, 전북에서도 일제경찰이 기자들을 검속하거나 기사를 검열하는 사례가 많이 있다. 기자단은 조직적으로 이러한 일제의 탄압과 검열에 대응을 했다."

 

► 해방이 되고 미군정이 시작되던 시대적 상황에서 극심한 이념 대립이 지역 매체에도 고스란히 나타났다고 하는데 실상은 어느 정도였다고 보는지?

"미군정기 시절 신문들은 대부분 이른바 좌익과 우익계열로 나뉘어져 정파지로 정치세력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전북지역에서도 잘 알려진 극우단체인 서북청년회가 자신의 단체에 대한 요구를 받아주지 않은 신문사에 난입해 집기를 부수고 기자들을 구타한 사례가 있다. 

반면에 우익성향의 신문사에 생각이 다른 집단들이 들어와 인쇄시설을 불태워버린 사례도 있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좌도 우도 아닌 중립적인 필법을 내세우며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사회의 양심을 바로잡자는 사시를 내걸면서 당시 개천절에 창간한 신문도 있다."

 

►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이후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적시했던데 대표적인 사례를 한 가지 소개해 달라.

"당시 정권은 정부수립 직후부터 시작된 언론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비교적 단순한 실수도 엄혹하게 다루었다. 그러던 중 1953년 7월에 이리에 있던 <삼남일보>가 1단짜리 기사에서 ‘이대통령’을 ‘이견통령’으로 제목을 잘못 내보냈다. 

당시는 원고에 따라 활자판에 납으로 만든 활자를 하나하나 골라 꽂아서 신문을 제작하던 때였다. 한자로 ‘대(大)’자와 ‘견(犬)’이 형상이 비슷하여 생긴 사고였다. 점 하나 가지고 저질러진 일이지만 그 말뜻은 ‘개대통령’이 되므로 고의성이 있다고도 보기 쉬었던 것이다. 

그래서 무기 정간에다 사장 겸 편집국장, 관련 부장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이런 오식사고가 점 하나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신문계에 알려지자 아예 ‘대통령’이라는 세 글자를 한데 묶어 쓰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 한국전쟁 당시 그 전쟁 통에도 사이비기자가 출현했다고 했는데 맞는 말인지?

"그렇다. 오히려 전쟁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서 각 지역에 신문이나 잡지사의 지국이 발행하는 기자증이 남발됐다. 사이비 기자들에 의한 사회적 물의가 적지 않아 결국 전국 시도 공보과장들은 1952년 11월 회의를 열고 “앞으로 신문‧ 잡지사의 지국이 발행한 기자증은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을 정도다."

   

► 박정희 유신정권 때는 지역언론 상황이 어떠했는가?

"1961년 5월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체제를 선포했던 1972년 3월부터 1973년 9월까지 약 1년 반 동안 대대적으로 언론사를 정비했다. 이 시기에 언론기관의 통합이 있었는데, 지역신문은 1개 도에 1개 언론사만 인정하는 이른바 ‘1도 1사제’를 추진했다. 

전북에서는 전주에 있던 <전북일보>와 <전북매일>, 군산의 <호남일보>. 이 3개사가 통합되어 <전북일보> 하나만 남게 되었다."

   

► 전두환 정권에서 지역 언론인들은 어떻게 맞섰는지?

"1979년 12‧12사태와 5.17비상계엄 확대를 통하여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은 불안정한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강력한 언론통제 정책을 추진했다. 1980년 5월 <전북신문>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 선언과 공정보도 실천사항을 결의하면서 부당한 권력에 맞섰다. 신군부에서 언론장악은 언론인의 강제 해직부터 시작되었다. 전북에서는 <CBS> 기자를 포함하여 적어도 32명이 직장을 떠나야 하는 아픔이 있었다."

 

► 100년이 넘는 전북언론의 역사를 조사했는데, 출간한 소감이 어떤가?

"전북지역의 방대한 언론 역사를 한 권의 통사로 정리하고 분석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하고 경솔했던가를 잘 알 수 있었다. 선배님들이 힘들게 쌓아올린 성가를 훼손시킨 것은 아닌가, 걱정이 앞설 뿐이다. 다시 한 번 이해를 구하고 싶다.

아울러 지역언론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현재 지역언론의 답을 좀 찾을 수 있을까 했는데 솔직히 그 답을 찾지 못한 것이 좀 아쉽다. 부산이나 광주전남 등 다른 지역 언론 업계나 학계에서는 지역언론 역사에 대한 연구와 재조명이 눈에 띄게 많다. 이 책을 원본으로 해서 전북지역에서도 지역 언론의 역사를 조명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박주현 '사람과 언론' 편집인 

 

   
글쓴이 / 박주현 '사람과 언론' 편집인

 

* 위 글은 <사람과 언론 - https://peoplemedia.tistory.com/> 제4호(2019년 봄호)에 게재된 '화제의 인터뷰'를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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