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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도서관>7. 책 '82년생 김지영'61년생 이현옥- 나는 한국현대사 누님
이현옥  |  jbpost20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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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19  15:4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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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그때가. 아마도. 내가 대학을 갓 졸업했던 겨울이었을 것이다. 

  내게는 아버지가 다른 언니가 두 명 있는데, 그 중 둘째 언니가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직장암 수술을 마치고 자신의 집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집에서 거의 1년 동안 아이들을 돌보고 언니를 뒷바라지하며 아주 캄캄한 시간을 보냈다. 

가끔 학비랑 책값, 용돈을 받고 살아왔던 터에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채감에다가, 형부는 나에게 언니가 웬만해질 삼사년 동안 그의 가족들을 돌봐준다면 시집갈 밑천을 두둑이 주겠노라며 회유하곤 하였다. 내가 혼자 쓸 방이 있을 만큼 여유로웠던 그 집 따뜻한 아랫목에서 나는 그 유혹을 견뎌내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찢어지게 가난한 농투산이 홀어미의 딸로서 시내의 여자상업고등학교를, 지방의 사립대학교 졸업장을 어떻게 받았더란 말인가. 

 

   
 

내 청춘의 고뇌쯤은 저만치 미뤄둔 채 식모살이나 다름없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함에도 일주일에 두세 번 나는 저녁 설거지를 일찍 끝내고, 뚝섬의 영동교 아래에서 살 에이는 겨울바람 앞에 서 있곤 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가. 하루 두 끼니로 연명해 온 결과가 이것이란 말인가. 코앞의 배부름에 따뜻함에 무너지지 말자며 칼바람과 맞장 떠 보자며 악다구니를 썼다.

 

  그 겨울 일주일 정도 휴가를 얻어 친구들과 후배들을 만나러 내려왔다. 친구 중에는 맞선을 보러 다니는 이도 있고 후배들은 여전히 싸구려 막걸리에 절어 문학과 역사에 대한 고뇌를 씹었다. 

모두 남의 얘기처럼 들렸다. 그렇다. 나도 엊그제 재학시절에는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에서 날뛰곤 했었다. 조금 더 투쟁하면 엉망진창인 이 세상을 뒤집어엎을 줄 알았었다. 고작 1년이 지난 지금 목구멍이 포도청이 되어 잔뜩 기가 꺾인 모습이라니...

그들 앞에서 알량한 자존심이 영 서질 않았다. 그래도 헤어지기 싫은 우리들은 으레 2차로 지린내 풍기는 싸구려 지하 다방에서 목청을 높이곤 했다.

 

  어떤 대목에서 나의 얘기가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질 않는다. 하루에 두 끼니를 꽁보리밥과 무밥과 시래기밥을 먹고 자랐던 유년기와, 그런 와중에 큰오빠는 과외를 받고 있었으며, 그의 밥그릇은 고봉의 쌀밥으로 부옇던, 밥솥 안 계란찜까지 모두 그 오빠 차지였던, 무 냄새가 밴 숭늉을 먹을 때는 코를 막고 먹었던 얘기까지 봇물처럼 쏟아댔다.

8살 때부터 불을 때서 보리밥을 짓고, 고추를 확독에 갈아 열무김치를 담갔던 일. 특히 육성회비를 제때 내지 못하여 서무과장이 교실에 방문하는 날이면 중간치기를 일삼아 했던, 그 육성회비를 마련한답시고 귀신과 뭇짐승들이 나올 것 같은 으스스한 밤. 새벽 한 두시. 이웃 마을. 누에들에 뽕잎을 주는 알바를 다녔던, 비닐하우스 속에서 풀을 뽑다가 현기증에 쓰러졌던 일까지, 속살을 거침없이 뿜어댔다. 

그들 가운데 유독 깊이 듣고 있던 2살 아래 남자 후배는 나에게 “한국현대사 누님”이라며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 8년 후 안쓰러워했던 그 남자 후배와 나는 인연을 맺었다. 25년 이상의 세월을 지지고 볶으며 함께 살았다. 장남으로 태어나 온갖 호사를 누리고 살아왔는가. 집안일이라고는 젬병인 그. 

처음엔 싸움도 했었다. 시인 박노해의 「이불을 꿰매며」를 복사하여 가져다주고 좀 닮아보라며 잔소리도 해 보고 한숨도 지어보고 폭폭하여 울어도 보았으리라. 아이 둘을 이곳저곳에 맡기고 출근하느라 아침이면 늘 전쟁통이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그 많은 노동으로 단련되었는가. 시간이 흐르고 몸과 마음도 지치고 무디어졌는가. 어찌되었든 예까지 왔다.

 

   그럭저럭 살아질 줄 알았다. 폐경 이후 나는 급속히 변해갔다. 불같은 화를 참을 길이 없다. 그가 혼인초 월급을 떼이고 일 년 가까이 빈손으로 돌아올 때도, 그런 일자리마저 잃고, 공장에서 프레스에 손가락이 잘린 꾀복쟁이 친구 박노규 씨와 낚시로 세월을 낚고 있을 때도 나는 잘 참아왔다. 

가까스로 장만한 아파트 문서를 친정 오빠에게 부도 막아보라며 나 모르게 갖다 주었을 때도, 그 빚을 갚느라 머리가 허옇게 되었을 때도 나는 이겨냈다. 인생사 빼꼼한 날이 단 하루가 있었을까. 크고 작은 일들을 치루며 겪으며 여기까지 왔다.  

 

   
2019년에 실천할 내용으로 위 각서에 서명하여 부엌입구에 붙여 놓았다. 딸내미는 떨어져 살기에 분담에서 제외되었고 입회하여 지원해 주었다. 아들은 아빠만 잘 지키면 문제없다고 했으며, 다만 남편의 입이 쑥 나와서 멋쩍기는 했다.

지금 그는 부엌에서 한국현대사 이 누님 옆에서 미나리나물을 무치느라 어질러 놓은 고추장통이며 도마를 나름 치우고 있다. 그리곤 이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부엌과 거실을 서성인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가사노동 앞에서 그는 늘 초년병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설거지와 모닝커피 내리기, 그리고 한 개 더 있다. 돼지 두루치기 요리. 나머지는 입이 닳도록 잔소리와 지시를 해야만 마지못해 할 뿐이다. 이 정도의 일도 시작한 지 4~5년 정도 되었다.

 

 근래 읽은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김지영이 남편 정대현에게 화를 내는 장면은 내 속을 확 뚫어주었다.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내가 요사이 듣기 싫은 단어는 ‘빨리빨리’다. 갈수록 참을성은 사라지고 “늦었어. 빨리빨리 해” 이 소리가 그의 입에서 떨어지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 냅다 받아친다. “그놈의 빨리빨리란 말 좀 그만해!” 몇 십 년을 그렇게 서두르며 살았다. 

당신이 더 잘 알지 않느냐 말이다. 아침밥을 제대로 식탁에 앉아서 먹어 본 적이 있던가. 화장실에서 머리 말리다 뛰어 와 밥 한 수저 몰아넣고, 찍어 바르고, 양말 신고, 세탁기 예약해 놓고…. 

아침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보면 참 재미있을 것 같다. 출연료 받지 않을 테니 다큐 한 편 찍어볼 생각들 없으신가.  / 이현옥(우석대 도서관 사서)  

 

   
글쓴이 이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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