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떼를 썼다. 그러나 어머니는 동생들 새옷 보따리를 빼앗길세라 들은 체도 않고 바삐 걸어가다가 마침 막 떠나려는 버스에 냉큼 올라 타버렸다. / 본문 중에서...

2.

빈 리어카를 뒤로 물려 사람들 발길이 뜸한 건어물 가게에 맡기고 우리는 옷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 옷 사는 모습 좀 봐라. 고생은 내가 제일 많이 했는데 옷은 막내똥내 옷부터 샀다. 그리고 넷째, 셋째 이렇게 나이 어린 순서로 옷을 골랐다. 

한 집에서 왕창 산 것도 아니었다. 이 가게 저 가게를 들르면서 옷을 들었다 놓았다 수십 번도 더 반복하면서, 동생들 옷부터 챙기면서 어머니는 내 애간장을 녹였다. 

들르는 옷집마다 내가 입고 싶은 옷들은 천지였다. 그 중에서도 조금 얇아 보이는 청바지에 세로로 줄 그려진 벽돌색 와이셔츠를 입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 눈깜냥을 아예 무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정작 내 옷을 사려고 했을 때는 돈이 딱 떨어진 것이었다. 나는 떼를 썼다. 동생들 옷을 물리고서라도 내 옷을 사라고 우겼다.

“저런 썩을 놈 좀 봐라잉? 너는 몇 달만 참으먼 중학생 양복도 생기고 새 가방도 생기고 검정운동화도 생기는디, 그려 니 동생들 옷을 물려? 그게 헐 말이냐? 저런 것을 내가 큰아들이라고 믿고 살었당게.”  

어머니의 표정은 단호했다. 그리고 버스 타는 데로 바쁘게 걸어갔다. 이것도 애초의 약속과 달랐다. 돌아오는 길도 함께 걸어오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약속은 그랬지만 나는 새옷을 샀다는 감격에 겨워, 어서 새옷을 입어보고 싶은 마음을 설레며 당신을 리어카에 태우고 득달같이 집에 돌아올 생각이었다.

어머니는 버스를 탈 작정 같았다. 나는 리어카 때문에 버스를 탈 수 없었지만 어머니는 맨몸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추석에 입을 새옷이 더 중요했다. 

사람들 사이로 몸을 피하는 어머니의 바쁜 걸음을 따라잡으며 나는 떼를 썼다. 그러나 어머니는 동생들 새옷 보따리를 빼앗길세라 들은 체도 않고 바삐 걸어가다가 마침 막 떠나려는 버스에 냉큼 올라 타버렸다.

고생은 내가 제일 많이 했는데 옷은 막내똥내 옷부터 샀다. 그리고 넷째, 셋째 이렇게 나이 어린 순서로 옷을 골랐다. 한 집에서 왕창 산 것도 아니었다. 이 가게 저 가게를 들르면서 옷을 들었다 놓았다 수십 번도 더 반복하면서, 동생들 옷부터 챙기면서 어머니는 내 애간장을 녹였다. / 본문 중에서

빈 리어카를 끌고 오던 길을 혼자 되짚어왔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인지 눈물인지가 자꾸 눈앞을 가로막았다. 집에 가면 사진첩부터 꺼내봐야겠다. 우리 가족들 중에 나를 닮은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부터 확인해봐야겠다. 

어째서 집안의 힘든 일은 내가 죄다 떠맡아야 하는 것이냐. 힘든 일을 죄다 떠맡았어도 푸대접만 받아야 하는 것이냐. 지금 생각해봐도 어머니가 그랬을 리가 없지만, 정말로 돈이 딱 떨어져서 내 옷을 살 수가 없었겠지만 당시 나는, 어머니는 처음부터 내 옷을 안 사주려고 작정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노골적으로 이용만 해먹을 작정으로 계란을 삶은 어머니가 미웠다. 넷이나 되는 동생들이 미웠다. 아무 계획도 없이 어머니는 왜 동생들을 넷씩이나 낳아가지고 나를 이 고생을 시키는 것이냐.

사정이 어찌 되었든 빈 리어카를 끌고 집에는 가야 한다. 누가 집에는 가야 한다고, 집만큼은 꼭 가야 한다고 세뇌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좌우간 집에는 가야 한다. 짜장면 곱빼기를 먹고 어머니 우동을 덜어먹었는데도 배는 또 고팠다. 

내가 리어카를 끌고 가는지 리어카에 내가 매달려 가는지 느릿느릿 전주대교를 지나며 아아, 인생이 외롭다는 것을, 인생은 혼자라더니 정말 그렇다는 것을 그때 그 어린 나이에 나는 알았다.

저기서 숙이가 온다. 제 언니 손을 잡고 온다. 키가 작은 숙이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나비처럼 나풀거린다. 걸음을 떼는 곳마다 햇살이 반짝이는 것 같다. 가시내는 얼굴이 유난히 하얀 데다 공부도 잘했다. 그런데도 예쁜 척 공부 잘하는 척을 하지 않았다. 

씨름부 후보 선수인지도 모르고 종합경기장 매점 앞에서 꽈배기를 건네던 가시내 손에선 분 냄새가 났다. 시합에 나가보지도 못하고 샅바나 들었던 나는 그것을 차마 못 받고 발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눈앞에 가까이 올수록 숙이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런데 내 모양새가 이게 뭐냐. 

고무신 신은 거야 나만 그런 게 아니라지만 뙈악볕에 리어카를 끄느라고 땀에 범벅이 된 까만 내 모습을 숙이가 어떤 표정으로 바라볼까. 아직도 나를 씨름선수로 알까. 고개를 팍 숙이고 앞으로 나갔다. 가시내가 나를 못 알아봐야 하니까. 하지만 살짝 얼굴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교실에서 매일 시시때때로 훔쳐보는데 왜 그럴수록 가시내는 더 보고 싶은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다음편에 계속>

이병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