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애틀랜타는 올겨울 한 일주일정도 춥고는 영 겨울답지 않은 맹숭한 날씨가 계속되더니 급기야  오늘은 낮기온 63F(섭씨 17도)를 웃도는 본격적인 봄날씨를 보이더니 내일도 역시 화창할 계획이란다.

밤이 길어야 아침이 반가운 법, 본디 겨울이란 뒤통수가 시리고 콧속이 쩍쩍 들러붙을 정도로 추워야 맛이 나고, 크리스마스도 연말연시도 다 지나버린 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들하고 지루한 겨울을 이제나 저제나 봄을 기다리며 보내는 맛이 있어야 하는건데 눈 한번 없이 지나간 이곳 겨울이 나는 못내 서운하다.

사람이 간사해서 전에 북동부에 살 땐 4월 초까지 내리는 눈에 치어 우울하기까지 했더랬는데 지금은 눈내리는 마을이 그립고 눈내리는 풍경이 너무 보고프다.

Jiworl Seok은 현재 미국 애틀랜타에 살고 있다. 전주 성심여고와 전북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다. 한국 이름은 정지월.

미국은 눈이 내리면 조기 퇴근, 휴교, 휴업 등으로 집안에 갇혀 있게 되는데 이게 또 은근 재밌다. 예정에 없던 휴가를 받은 기분이랄까? 온가족이 집에서 모처럼 unplugged(꽉 짜인 일정에서 벗어난) 망중한을 즐기는 맛!

남편은 drive way에 쌓인 눈을 치우고, 애들은 스노우복으로 갈아입고 눈사람도 만들고 눈썰매도 타다 푹 젖고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와선 한차례 뜨거운 코코아로 원기충전하고, 건조기에 급하게 말린 옷을 입고 또 나가 해질 때까지 놀다 들어온다. 이럴 땐 멀리 나갈 수 없으니 오랫만에 동네사람끼리 모여 밀렸던 정을 쌓기도 한다.

한번은 학교가 조기 퇴교를 너무 늦게 결정하는 바람에 그사이 눈이 너무 쌓여 스쿨버스가 다 묶여 아이들이 학교에서 하룻밤 묵은 적도 있었는데 걱정하는 부모들과는 달리 애들에겐 신나는 밤이었단다.

이곳은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나가면 수퍼마켓은 비상식량을 준비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한국사람에겐 라면이 최고겠지만 이곳사람들에겐 빵과 우유가 넘버원 아이템이고, 바나나, 달걀, 맥주도 생필품목이다. 집앞에 크고 작은 가게들이 즐비해 걸어가서 살 수있는 한국과는 달리 이곳은 운전할 수 없으면 아무것도 조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눈이 많이 와도 다음날이면 제설차로 길을 뚫고 소금을 치는 북부나 중부와는 달리, 이곳 남부는 아예 제설차량이 없는 관계로 눈이 1cm만 와도 온 도시가 비상사태에 돌입한다. 작년엔 눈이 두차례나 내려(그래봐야 2-3cm) 길이 막혀서 사람들이 차안에서 자기도 하고, 차를 버리고 걸어서 집에 온 사람들도 있는 해프닝이 있어 북동부 사람들을 잠시나마 웃겨준 일이 있었다. (실제로 두곳의 적설량과 교통상태를 비교한 사진이 있었다)

1994년 1월 북동부에 엄청난 눈이 내렸을때 서부 LA에선 심한 지진이 있었다. 그곳에 사는 친구가 걱정이 돼서 전화를 해도 며칠째 불통이고 연락이 닿질 않다가 마침내 통화가 돼 안부를 묻는 내게 " 너넨 snow storm(눈폭풍)이라며? 지진이 오히려 낫지!" 해서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집밖에 운전하고 나가지만 않으면 안전한 눈이 어찌 집안에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할수 밖에 없는 지진보다 위험하다는 건지.... 그처럼 California 사람들의 날씨 사랑은 말릴 수 없다. 난 개인적으로 일년내내 같은 계절은 별로더구만...

미국은 땅덩어리가 크다보니 차와 기름만 있으면 비자도 여권도 없이 날씨를 고를 수 있는 재미가 있는 나라이다. (한국도 통일만 되면 제주도에서 백두산까지 제법 변화무쌍할터인데... 부산에서 백두산까지 KTX가 이어지는 날을 기대해본다.) 아이들 어렸을때 2월에 플로리다 디즈니월드에 갔는데 약간 쌀쌀하긴 해도 수영하는 아이들을 보며 난 경미한 깨달음을 얻었더랬다. "아, 이 나라는 내가 계절도 골라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조그만 나라에서 태어나 자라 계절적 운명 공동체로서 어떤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았던 내게 큰 나라의 스케일이 피부로 느껴졌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지금 내 스마트 폰에는 우리 부부가 사는 남부 Atlanta, 아들아이가 대학다니는 중부 St.Louis, 딸 아이가 있는 서부 LA 의 날씨가 모두 들어 있고 세곳 모두 기후가 확연히 다르다.

이제 며칠 후면 한국은 설이라니 더더욱 눈 쌓인 한국 풍경과 온 가족이 둘러앉아 나눌 따뜻한 떡국이 그립다. 떡국이야 이곳에서도 손쉽게 먹을 수 있다지만 한그릇과 함께 한 살을 먹는 억울한 풍습도, 연휴 내내 흘러간 영화를 틀어주는 고질적인 전통까지도 그리운 타국살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도 없이 맞게 될 봄도... 여느 날과 다름이 없을 설날도... 이래 저래 유감이다!

에브리바디 해피 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