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을 짧은 일정으로 다녀왔다. 필리핀 여행에서 특히 난감한 것이 길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아이들과 마주치는 것이다. 낡은 차량을 승객용으로 개조한 ‘지프니’를 타고 가다 잠시라도 멈출라 치면 몰려드는 아이들. 산호나 조개껍질로 만든 목걸이 등을 한웅큼 쥐고 달려와 ‘원달러’를 외친다.

아이들은 관광객들과 눈을 맞추려 하고 말을 건다. 관광객들은 자꾸만 시선을 피한다. 아이들의 표정은 밝고 눈망울도 그지없이 맑다. 시선이 마주치면 지나칠 수가 없다. 한두명이라면 어찌 해 보겠지만 우루루 몰려오는 아이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아이들은 관광객의 시선을 끌어내려 하고, 관광객은 애써 무심한 체하는 신경전이 펼쳐진다.

강찬구 전북포스트 발행인

그 아이들과의 실랑이에 익숙해질 무렵 ‘안나’를 만났다. 아이들을 외면하느라 한바탕 곤욕을 치른 뒤였다.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일행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아저씨, 목걸이 하나 사 주세요.” 발음이나 억양이 다른 아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한국말. 한국 아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지프니 뒤쪽 발판을 딛고 매달려 있는 여자 아이. "아저씨, 이거 하나 사 주세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손목에 두른 목걸이를 흔들었다. 다들 놀라서 호기심이 가득찬 눈으로 그 아이를 바라본다. “한국말을 누구한테 배웠니? 어떻게 그렇게 잘 해?” “혼자 공부했어요. 틈틈이... 오년 됐어요.” ”야, 너 정말 한국말 잘한다.“ 감탄이 터져 나왔다.

이 신통한 아이와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이름이 뭐야?” “안나... 한국에 같은 이름 많아요.”

“한국말은 어디서 배웠어...?” “여기 손님들한테... 그리고 혼자 공부했어요.”

“학교는? 몇학년이야?” “6학년. 열네살이예요”

“안나, 한국에 갈거야?” “예, 크면 갈 거예요. 스무살이 되면... 많이 있다가...”

“많지 않아. 6년 있으면 스물인데... 그 때 한국에 오면 되겠다.” “예”

“안나, 한국 사람한테 시집가고 싶어?” “시집이 뭐예요?” “메리지.” “아마도... ”

한국어 발음도 정확하고, 어법도 틀림이 없고, 어쩌면 그리도 적절한 언어를 구사하는지...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듣기 쉽지 않은 존대말까지 또박또박...

지프니에 같이 매달린 남자 아이를 가리키며, “얘가 너 따라 다니면 귀찮겠다...” “좀 그래요.” 배시시 웃는다. 남자애는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다. “너 이러다 떨어지면 어떡해.” “괜찮아요.” 돌아갈 길이 걱정돼 “이렇게 멀리 왔다가 어떻게 돌아 가?” “다시 가면 돼요.”

안나에게 반한 일행 가운데 한명이 100 필리핀 페소 지폐 한 장을 내밀었다. 100 페소는 2.5달러 정도 된다. 남자아이에게 줄 돈을 다시 꺼내려 하자, “얘랑 나눌께요. 얘 50, 제가 50 할께요.” 마음 씀도 기특하다. “안나, 너보고 주는 거니까 니가 80, 얘는 20만 줘.” 안나는 망설임 없이 “아니예요. 같이 해요.”

그 아이는 호텔 앞에서 내렸다.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그 남자아이와 같이 다시 출발했던 곳으로 지프니를 타고 돌아갈 것이다.

여행 중에는 종종 예기치 못한 곳에서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그 신통한 어린 아이 하나로 국가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기도 한다. 그것이 어떤 목적이었든, 안나는 열심히 한국말을 공부했을 것이다. 안나의 꿈이 노력을 만들고, 미래로 나타날 것이다. 허름한 옷에, 맨발로 지프니에 매달려 ‘원달러’를 외치면서도 스스로 꿈을 일궈가고 있는 안나.

나는 안나가 생각날 때마다 그 아이의 꿈이 이뤄지기를 기도할 것이다. 멀리서 보내는 나의 염원이, 비록 보이지 않을 지라도 그 아이가 꿈을 이뤄가는 기운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나 또한 그 아이를 통해 활력을 얻는다. 그 아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돌고, 힘이 느껴진다. 필리핀 작은 관광지에서 안나를 만난 것은 내게 온 축복이다. //

*이 글은 전주일보에도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