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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전주를 사색하다 - 전동성당과 경기전에서 천하를 꿈꾸다.<신년기획>전라도 정도(定都) 천년...'동방의 등불'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강주영 편집위원  |  kjyn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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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23  15:5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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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바위에서 내려왔다. 옛 전라감영터를 지나 풍남문에 왔다. 풍남문에서 팔달로를 건넜다. 태조로 남쪽으로 전동성당이, 북쪽으로 경기전이다. 전동성당은 천주(天主)를, 경기전은 임금을 모셨다. 전동성당과 경기전을 관광하지 않고 견문(見聞)한다. 동방의 정신과 서방의 정신이 태조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서학의 전동성당과 동학의 경기전이 마주본다.

대립과 공존이 한눈에 이는 곳이다. 한 장소의 서로 다른 혼(魂)이다.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림이 아니다. 옛과 오늘, 동방과 서방을 동시에 생각한다. 서로 다른 천하이되, 다름으로써 같음을 생각하고, 같음으로써 다름을 함께 할 일이다. 달라도 함께 사는 천하이다. 동이구득(同異俱得)이다.

헤겔이 동이구득에서 배웠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의 변증법이 동이구득이라 생각해 본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정(正)과 반(反)이 합合하니 그때의 합은 1+1=2가 아닌 다른 그 무엇이다. 양에서 새로운 질로 바뀌니 양질전화(量質轉化)이다.   

왕조시대의 왕은 통치자 왕이 아니었다. 당대의 인식에서 왕은 천명을 받드는 이였다. 천명을 어기는 왕은 이미 왕이 아니다. 맹자의 역성혁명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경기전을 공간으로서는 태조 어진을 모신 곳이나, 장소의 혼으로서는 천명을 받드는 곳으로 본다.

 

   
태조 어진 봉안 행렬.

천명이 무엇인가?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라 한다. 유학의 천심이 진화한 것으로서 동학의 시천주(侍天主)가 있다. 왜 세계라 하지 않고 천하(天下)라고 하는가? 옛 선비가 천하라고 하여서 천하를 쓰는 게 아니다. ‘세계’라는 말은 공간의 지리학일 뿐이다. 서방에서 ‘세계’가 ‘제국’이 되면 지정학이다.

민심이 천심으로 구현되는 지문학이 천하이다. 달라도 같이 사는 이치인 동이구득이 펼쳐지는 ‘장소의 혼’으로서 천하 또는 천하체계이다. 천하는 곧 민심이 실현되는 곳이다. 천자(天子)는 모든 이의 위에 있는 ‘왕중의 왕’ 만인지상(萬人之上)이 아니다. 하늘의 뜻 곧 민심을 받드는 이가 천자인 것이다. 민심을 받들기에 거룩하고 정의로운 것이다. 민심을 받들면 그대도 나도 천자이다.  

기독교의 천주와 동학의 시천주가 다르지 않다. 이병한의 사유를 빌려 온다. “19세기 말 천하대란 속에 솟아난 동학에서는 '시천주'라는 신조어까지 고안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고로 동학 또한 서학의 반대말만은 아니라고 하겠다. 서학과 유학의 상호진화 끝에 탄생한 개신유교, 민주유교, 민중유교로서 동학이 발화되었던 것이다.” 

시천주는 모든 한울님이 모든 사람과 사물에 깃들었음이다. 그대가 나이고 내가 그대인 것이다. 그것이 나이고 내가 그것이다. 진정 나는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기독교 신학자들이 무엇이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요한복음의 말씀이 동학의 시천주와 같다고 여긴다. 

천주와 시천주를 모신 곳에서 민중의 소리를 듣는다. 천명을 듣는다. 민중의 눈이 하늘의 눈이요, 민중의 소리가 하늘의 소리이다.(天視自我民視천시자아민시 天聽自我民聽천청자아민청-書經 泰誓中 서경 태서중) 오늘의 천하가 어떻게 가야 하는가? 눈이 어둡고, 귀가 어두워 천명을 듣지 못한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 오십을 훌쩍 넘겼다. 민심의 소리 곧 천명을 듣기는 커녕 뜻을 세우지도 못 했다.

 

   
눈 덮인 전주 한옥마을.

그런데 무엄하다. 하필이면 동방의 정신인 경기전 앞에 성당을 지었을까? 공존공생한다 하여도 동방예의지국에서 하필이면 경기전 앞에 성당을 세웠을까? 남산 자락의 명동성당은 경복궁을 위에서 아래로 굽어 본다, 전동성당의 첨탑도 임금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을 굽어본다.

동이구득하려면 다른 곳에 세워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무엄하다. 아니다. 조선을 서학이 깔본 곳이다. 우리를 미개한 이단자로 본 것이다. 그 작태가 아시아 전역에서 식민지 건설로 제국주의로 드러난 것이다. 천하제국이 아닌 식민제국이었다. 

처음에는 성당을 태조 이성계의 유적지인 오목대에 지으려 하였다. 전주 선비들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곳 저곳으로 몇 번을 시도하고 반대하고 무산되었다. 드디어 조선의 힘이 빠지는 조선의 황혼인 1908년에 착공하여 1914년 준공되었다.

하필이면 그 양식도 비잔틴요소를 혼합한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조선에 왔으니 조선의 한옥으로 지을 수는 없었나? 그것이 다르되 공생하는 것이 아니던가?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그러나 역사로 생각하고 뜻으로 보니 오만방자한 것이다. 

  

어느 봄날이었다. 저문 오월의 밤, 오방빛이 어리비친 왕의 뜰 경기전에서 백성들은 놀았다. 날라리는 서편의 초승달을 가쁘게 뒤쫓고, 타악은 성당의 첨탑 너머로 봄을 배웅하였다. 무예 시연의 검날이 봄밤을 가르자 백성들은 날숨에 탄성하였다. 봄밤의 연인들이 깔깔대는 백성의 골목에서는 막걸리가 들숨을 쉬었다. 왕의 뜰에는 늦은 매화가 져가고, 백성의 골목길에서는 막걸리 냄새나는 봄비가 내렸다. 임금의 뜰과 백성의 골목길에서 봄밤이 울었다.   

잠시 환영을 보았다. 1894년 5월 말(음력) 전주 삼천에서 숙영하는 동학군들이 노는 모습을 떠올렸다. 전주부성 입성 전야이다. 놀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군영의 온갖 재주꾼들이 소리하고 풍물을 친다. 곱사등이 춤을 추니 허리가 펴지고, 앉은뱅이 춤을 추니 일어선다. 심봉사 새세상을 보는 개안(開眼)잔치를 벌렸으리라. 전주 기접놀이를 하는 군중들이 동학군으로 보인 것이다. 서학의 성당 앞에서 동학을 생각한다. 내 나라의 근대는 동학이 만든 천하가 아니다. 서학이 만든 세계이다. 

   
오방빛이 어리비친 경기전.

유학의 향교와 서원이 동학의 '접'(接)으로 진화했다. 사대부와 선비의 천하가 무지랭이 민중의 시천주(侍天主)로 진화한 것이다. 유학이 민중화했다. 양반, 사대부의 지배논리로 썩어 죽어 가던 유학을 새로이 일으켰다.

눈이 번쩍 띄였다. 무릎을 치며 탄복했다. 베 짜는 아낙이, 코흘리개 어린 것이, 천한 노비가 하늘이라니, 맞상에서 진지를 나누다니, 청상과부를 개가하라니, 부인을 공경하라니, 공감하니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향교와 서원을 뛰어 넘었다. 접과 접이 장소의 혼으로 삼천리 경향각지로 연결되었다. 때는 천하대란의 난세였다. 동방의 공공재 천하, 사대와 사소로서 공존하던 천하체계를 일본이 대동아공영으로 바꿔치기 하고 있었다. 영, 미,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이 왕도가 아닌 패도를 휘둘렀다.

 

개화당이 있었다. 동도서기(東道西器)가 아니었다. 동을 접고 서에 홀렸다. 조급했다. 동도로 서기를 접하지 않았다. 무능하고 게으른 개화당들이 일본의 접을 만들었다. 청과 공존한 조선처럼 일본과도 공존할 줄 알았다. 하니 무식하고 게으른 것이다. 유학을 진화시키지 못한 정체된 사림들이 천하체계를 잊고 사리의 왕권에 탐닉했다. 위정척사였다. 과연 고이면 썩는다. 동학과 서학을 사악한 것으로 척사했다.

시천주 인내천, 상하와 남녀노소가 어찌 대등하지 않으리. 천하에 경계에 있으리오. 거기에 있음으로써 어울려 존재하는 것이다. 하여 민족으로 나뉘고 민족으로 자결하고 자강하는 것이 아니다. 천하인으로 자결하고 자강하는 것이다.

 

   

전주 한옥마을 일원에서 열린 조선왕조실록 포쇄 재현행사에서 사관행렬이 태조로에서 경기전으로 행진을 하고 있다. / 문요한 기자

다만 천하를 교란하는 반천하를 거역하는 것이다. 가물치, 쏘가리, 붕어의 조선 하천 생태계에 침투한 포식자 블루길과 베스를 거부한 것이다. 천하를 잊고 권력에 탐닉한 사림모리배를 격퇴하려 한 것이다.

반외세, 반봉건이 맞는 말이다. 그러나 부족하다. 드러난 형세만을 보는 것이다. 천하를 민족으로서 근대국가로서 쪼개려 한 것이 아니다. 근대 민족국가의 자강과 자각의 투쟁이 아니다. 오래된 미래, 천하일가의 투쟁으로 동학혁명을 본다.
 
동학인들은 민족인이기 전에 민심은 천심으로 일어섰으니 천하인이다. 시천주에 어찌 피부색과 말의 다름, 남녀노소가 작동하겠는가. 모두가 천하인 것을. 패도로서 천하를 교란하는 천하교란자에 대응한 것이다.

일본 민족국가에 대응한 것이 저들과 같은 조선 민족국가였던 것인가. 포식자들의 헛세계화로 사멸해가는 민족국가라면 저 동학의 혼은 그 수명이 150년도 못 된다는 것인가? 헛세계화에 대응하는 진세계화로 오늘의 동학을 다시 새겨야 하는 까닭이다. 저 서구의 논리는 패도의 헛세계, 근대의 십자군일 뿐이다.

민주교조, 자유교조, 사회교조, 민족교조에 맞서 다시 신동학을 호출하는 까닭이다. 1884년 갑신개화로부터 내 나라의 근대 134년은 천하대란 춘추전국시대였다. 개화, 위정척사, 동학, 서학이 대립하고 앞으로 같이 나가지 못했다.

서구의 이식된 근대 개화의 터전에서 개화파의 좌파는 사회주의로 우파는 반공적 자유주의로 분단되었다. 2개의 주권국가가 탄생하였으나 광복은 오지 않았다. 고금의 분단 속에서 천하체계의 민(民)이 하늘인 민본(民本)의 의(義)가 단독자 개인의 이익을 다투는 자유민주교조로 변질되고 있다.

천하공물(天下公物), 천하는 너와 내것이 아닌 모두의 것인데 어찌 국가로서 경계를 다투며, 상하와 빈자와 부자로서 나뉠 것인가.

   
전동성당 앞에서 기접놀이하는 이들.

천하무외(天下無外), 천하의 안과 밖이 없는데 인간이 자연을 수탈하고 자본과 시장이 민을 침탈하는 것인가?

어찌 혁명의 법칙으로 민들의 삶까지도 간섭하여 혁명의 속도전으로 내모는가? 물질개벽만의 사회인민독재를 만드는가? 삶의 부침이 어찌 혁명의 과학으로 판단된단 말인가? 나의 20대를 반전(反轉)한다.

서학의 천주(天主)천하와,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천하가 같은데, 어찌 동과 서과 공생공존하여 진화하지 못하겠는가? 다만 서학의 십자군교도들이 근대 백여 년을 전쟁과 침탈로 새겼을 따름이다.

 

민본 없는 욕망자 개인의 질서화인 민주교도들이 민심이 없는 투표 기술인 민주로서 역사의 종언을 외친다. 민본이 없는 민주는 권력의 합법성 장치에 불과하다. 자유교도들이 천하와 나를 대동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자유의지를 시장자유로 대체하여 만세삼창을 부른다. 당을 천명의 담지자로 하는 프롤레타리아독재 사회주의로 역사의 종언을 노래한다. 자유교도, 사회교도들에게 대안은 없다. 또 다른 백년은 없다.

자유교도의 대한민국과 백두혈통 사회교도들이 통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고백해야 한다. 달라도 너무 달라졌다. 남은 것은 희미해지는 민족뿐이다. 서울과 평양이 정반합, 동이구득하여 진화해야 한다. 정치와 권력의 분점형식에 불과한 연방국가는 잠자는 내전이다. 하여 오래된 동방의 천하체계를 호출한다. 서구의 연방이란 것도 천하체계에서 다만 그 형식을 빌려간 것이다.

‘다른 백년의 기획’이 필요하다. 민본 없는 민주의 허상을 경계한다. 천명을 거스르는 시장의 자유를 거절한다. 당이 천명의 소유자라는 인민독재를 작별한다. 

이런 뜻으로 또 다른 백년을 겨눠 본다. 전주 한옥마을 전동성당 앞길 태조로를 또 다른 백년 창업의 ‘태조로’로 여긴다. 

 

   
또 다른 백년을 창업하는 태조로.

정여립의 천하공물과, 그대가 나이고 하늘인 것의 인내천의 전봉준! 하여 전라도 전주, 장소의 혼으로서 대동사회를 호출한다. 무릇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잘 배우고 행하는 것이 대동의 출발이다. 민주에 머물지 않고 민본의 천하를 추구하는 것이 대동이다.

그 민본의 천하 실체를 실사구시로 찾고자 한다. 아직은 뚜렷하지 않다. 서로 모여 놀고, 배우고, 행하면 또 다른 백년의 기획이 가능하며 통일의 실체도 분명해지리라.

하여 우리는 장소의 혼으로서 마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시장의 단위 시민도, 국가의 국민도, 자유교도도, 민주교도도, 사회교도도 아니다. 우리는 어떤 교도도 아니다. 다만 다름을 인정하되 다름의 교도가 아니고 열린 대동이고자 한다. 시민도 국민도 아닌 마을 자치민이다. 자치민이되 천하를 품는 천하민이다.

마을과 마을을 연대한다. 연대된 마을들이 헛세계화가 아닌 진세계화의 천하마을들과 교류하고 협력한다. 불통의 동서고금을 소통의 동서고금으로 한다. 좌/우, 진보/보수의 진영을 벗어나 자각하고 자강하는 마을 천하를 품는다.

한 나라 안에서 이 마을과 저 마을은 다를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 보수 마을이 있고 진보 마을이 있다. 원하는 그것이 그것이게 한다. 국가에 의해 표준화된 복사 마을을 거절한다. 천하대란의 난세에서 또 다른 백년의 기획으로 경향각지에서 사통팔달하기를 염원한다.

창업의 ‘태조로’에서 나와 사통팔달의 ‘팔달로’로 접어든다. 전라감영 옛터로 간다. / 강주영 편집위원

 

   
강주영 전북포스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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