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서고금을 회통하는 명소 

서학으로 조선을 후천개벽하려던 서학인이 처형된 곳이다. 동학으로 후천개벽하려던 동학인들도 이곳에서 숨졌다. 전주천 싸전다리 부근 초록바위이다. 초록바위에서 전래 동요 ‘두껍아’를 부른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어릴 때 모래 놀이하며 불렀다.

그 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다만 형, 누나에게서 배워서 불렀다. 정신의 유전자가 질기다. 지금 생각하니 반역의 노래인 혁명가이다. 근대 백여 년 결국은 조선의 헌집(?)을 허물고 새집을 준 것은 서학이었다. 동학으로 새집을 짓지 못했다. 서학이 준 집을 억지로 받았다. 조선이 존재하던 동방의 천하체계 질서와 그 정신은 과연 헌집이었을까?
 

좌측의 전주천옆 작은 동산이 곤지산 초록바위이다. 우측의 숲은 경기전이다.

지난 글에서 전주 객사 풍패지관에서 오목대와 향교를 거쳤다. 전동성당에서 전주천을 건너면 곧 초록바위이다. 서세동점한 서구적 근대와 천하공물 대동세계가 대립한 상징이 펼쳐진다. 내 나라의 근대 150여 년의 동서고금을 회통하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150여년의 우승열패와 생주이멸한 정신의 모든 상징이 다 보인다.

동학인과 서학인의 순교지가 같다. 천주의 세계 서학성당이 보인다. 천하체계의 유기적 세계관을 가진 향교도 보인다, 임금의 뜰인 경기전과 민의 마을, 한옥마을과 모던한 신시가지, 후백제의 옛 성터에서 아파트 성까지 다 보인다. 서학의 성당은 하필이면 임금의 뜰인 경기전과 길 하나 사이에서 건축되었을까?

고와 금이, 동과 서가 대립하고 살육한 곳이다. 조선 왕조국가의 지배기구인 전라감영과 동학혁명의 관민상화 집강소가 있었다. 새 세계의 촛불이 봉화로 타오른 곳이다. 동서고금이 맺힌 곳에서 이제는 동서고금이 회통하는 신시대를 사유해본다. 때문에 진작부터 이 자리에 동서고금을 소통하여 예술성을 가진 전망대형 조형물을 세우고 싶었다. 아직은 꿈이다.

내 나라에서 서학 천주교가 전래되던 시기의 탄압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여 여기 더 적을 까닭은 없다. 동서고금을 기억하는 초록바위에서 스마트폰을 켜고 이병한의 동서고금을 회통한 글을 읽는다. 솔깃하니 새롭다.

“고로 동학 또한 서학의 반대말만은 아니라고 하겠다. 서학과 유학의 상호진화 끝에 탄생한 개신유교, 민주유교, 민중유교로서 동학이 발화되었던 것이다.”라고 한다. 동학과 서학이 서로 대립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동서양의 선비들이 인문을 교류하고 사색하였다. 동학의 발화를 보는 관점도 특별하다.

 (2) 동서 교학상장의 빛나는 결정체

“나(이병한)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중국에 천주교를 전한) 마테오리치의 무덤 앞에서 절을 드린 조선인 선비들이 있었다. 담헌 홍대용을 비롯한 이른바 '북학파'들이다. 연행으로 중국을 방문하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서학 서적을 맹렬하게 수집하고 학습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천주실의>를 읽은 흔적이 여러 곳 등장한다. 서학 공부에 몰입하다가 서교에도 입신했던 다산 정약용도 빼놓을 수 없겠다. 즉 유라시아의 동쪽 끝 조선에서도 서학은 19세기 이후에나 밀려온 낯선 학문이 아니었다. 17세기 이래 이미 서학과 유학의 대화가 깊이 이루어지고 있던 것이다.

그 200년의 소화가 있었기에 19세기 말 천하대란 속에 솟아난 동학에서는 '시천주'(侍天主)라는 신조어까지 고안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고로 동학 또한 서학의 반대말만은 아니라고 하겠다. 서학과 유학의 상호진화 끝에 탄생한 개신유교, 민주유교, 민중유교로서 동학이 발화되었던 것이다.

서학과 동학이 상부상조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동아시아로만 한정할 수도 없겠다. 성호 이익부터 다산 정약용까지 열렬하게 서학을 학습하던 바로 그 시기에 유라시아의 극서지방에서는 중국학 열풍이 굉장했기 때문이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독교 소개 이상으로 동방의 사서삼경이 유럽으로 전수되었던 것이다. 라이프니치부터 칸트를 지나 헤겔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계몽철학 곳곳에 '중국의 충격'이 아로새겨져 있다. 공자를 모셔야 나라가 산다고 했다."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2017. 5.19 프레시안>

이병한이 말하는 동방의 유학이 서구에 끼친 영향을 더 옮겨보자. 줄여서 그 핵심만 옮긴다. 

“동쪽의 선비들이 서쪽의 과학에 매혹되었다면, 서방의 문인들이 찬탄해마지 않은 것은 동방의 인문주의였다. 기독교에 의탁하지 않고도 고도의 문명국가를 이룬 나라가 있었다...성경을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믿었던 신앙에 금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최초의 경제학자 프랑수아 케네는 '유럽의 공자'라고 불렸다. 즉 (유럽의) 급진개화파들은 중국을 모델로 삼아 유럽을 개혁하고자 했다. 전면적인 중국화, 전반동화(全般東化)를 외친 것이다.

그 "탈구입중"(脫歐入中)의 기수로 볼테르를 꼽을 수 있다. 종교에 구애됨 없이 세속정부를 운영하는 중국의 정치야말로 장차 유럽이 가야할 길이라고 했다...

<대학>이 처음 번역된 것은 1592년이다. 핵심 개념인 '明德'(명덕)을 'Humanae Instituionis Ratio'라고 풀었다. 인간 교육의 원리쯤으로 옮길 수 있겠다. 理는 ratio(이성)로, 性은 natura(자연, 본성)로, 德은 virtus(덕)으로 옮기면서 성리학의 세계에 입문한 셈이다......

무엇보다 <맹자>의 번역이 눈에 띈다. 혁명을 설파하는 불온서적이었다. 왕보다 인민이 위에 있다는 주권재민을 설파했다...나아가 성선설을 통하여 원죄론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인의예지의 존중으로부터 인권과 민권에 눈을 뜬 것이다. 교황과 군주에서 벗어나 '새 정치'를 궁리하던 유럽의 개화파들에게 참신하고 청신한 가르침이었다.

전위에 선 이는 라이프니치이다. 송명의 '이학(理學)'으로부터 유럽의 이성(Reason)을 도출해냈다..... 복희씨의 음과 양으로 전개되는 태극세계가 신통하고 방통하다고 여겼다. 이로부터 고안해내 낸 것이 2진법이다. 극동의 음과 양이 극서의 0과 1로 진화한 것이다. 2진법이란 현재 컴퓨터 기술의 근간이 되는 기초 이론이라 하겠다.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나부끼는 태극기.

1721년, 볼프는..... 1천명 관중 앞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보다 인민의 복지를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하여 천하를 주유하며 사상을 확립한 공자를 더 높이 친 것이다. 계몽주의의 정수로서, 합리주의의 지존으로서 공자를 추킨 것이다. 볼프는 결국 망명객이 된다.

'執其兩端 用其中'(집기양단 용기중, 극단을 취하지 않고 가운데를 취하라)! 청년 칸트는...  배중률을 돌파할 수 있는 새 길이 보이는 듯 했다. 배중률은 참과 거짓 사이에 제3의 영역은 없다는 원칙이다......완전한 참도, 완전한 그릇도 아닌 중간 영역이 부재하다. '기우뚱한 균형', 그 중간 항을 개척하는 것이 칸트의 평생 과제였다.

선악논리,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진리의 정도 여부를 따지는 발상의 전환을 이룬 것이다. 그래서 완성한 저술이 바로 그 유명한 비판 3부작이다. <순수이성비판>(1781), <실천이성비판>(1788), <판단력 비판>(1790). 이 세 저작은 <중용>의 독일어 해설서이자 최신판 주석서이기도 했던 셈이다. 실제로 이성, 비판, 실천, 판단 등 기본 개념에서부터 성리학 냄새가 물씬하다.

 
칸트를 이은 거물은 헤겔이다. '이성적인 것은 곧 현실적인 것(理卽性)이요, 현실적인 것은 곧 이성적인 것(性卽理)이다.'라는 <법철학>의 서문부터가 성리학의 변주였음이 확연하다. 즉 유럽의 계몽주의 또한 자가발전, 내재적으로 발전했던 것이 아니다. 'Made in Eurasia', 동서 문물 교류, 융복합과 통섭의 소산이었다.

마치 뉴턴이 이슬람문명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가 근대과학의 법칙을 세운 것처럼, 칸트와 헤겔은 중화문명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근대철학의 원칙을 이룬 것이다. 유라비아와 유라시아가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빛나는 결정체였다.”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2017. 5. 26 프레시안>

(3) 근대 춘추전국시대의 질문들  

다시 초록바위로 돌아온다. 허나 식민주의자들이 기술과 산업문명으로서 조선의 개화파들을 유혹하였다. 무지하고 무능한 조선의 개화파들이 전기, 자동차, 전화에 홀렸다. 외세 식민주의자들과 손을 잡았다. 개화파의 우측은 친일파가 되었다. 동방의 천하체계를 잊은 사대부들이 왕조라는 기득권 유지에 급급하였다. 하여 서학과 동학을 탄압하였다.

서학 역시 조선의 문명을 무시하였다. 일례로 공동체 유지의 한 덕목인 제사를 미신으로 치부하였다. 조급하였다. 서양 선비다운 맛이 없었다. 배타적인 신앙인들이었다. 동방의 천하체계를 무시하였다.

허나 근대 백여 년의 우승열패는 서학이었다. 동학은 우금치에서 무너졌다. 왕조국가도 멸하였다. 하여 임금의 뜰 경기전 앞에 하늘로 솟은 첨탑의 성당이 건립될 수 있었다. 순교 성지에 성당을 짓고 싶었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 아니다. 허나 무엄하다. 향교와 임금을 모신 경기전과 감영 앞이라니 그 시건방이 첨탑처럼 하늘을 찌르다면 과도할까...?

서학의 전동성당과 동학의 경기전이 서로 마주 본다.

중층적이고 유기적인 동방의 정치질서 ‘천하체계’ 는 사라졌다. 동방의 천하체계는 대청제국에서 보는 것처럼 강국이 소국을 업신여기지 않았다. 중층적으로 서로 큰 힘에서 살아남는 지혜인 사대를 하고,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소로서 천하체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근대 백여 년으로써 어찌 우승열패를 말하겠는가? 유럽이나 미국 등의 연방국가 원리는 동방의 오스만 제국, 원제국, 청제국에서 복사해간 것이다. 아니다. 그들은 식민하였다. 하여 형식만 빌려갔지 천하체계의 높은 정치원리는 유럽인으로서는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의 EU는 동방의 천하체계에서 빌려간 것이다. 그럼에도 남유럽은 EU의 강국들로부터 몸살을 앓고 있다. 동방이 천년 제국이었다면 오늘의 EU는 몇 십 년도 가지 못해 난리법석이다.   

신중국은 여전히 천하체계이다. 50여개의 민족이 신중국을 이루고 있다. 근대 민족국가 개념으로 신장위구르족이 독립하여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동방에서 국가란 살아있는 유기적 생명이다. 흐르는 것이다. 어느 한 국경에 메이지 않는다. 멕시코와의 사이에 철조망을 친다는 트럼프 같은 옹졸한 국경이 아니다. 서구의 근대 국민국가는 개인주의만큼이나 배타적 단독자 국가였다. 동방의 국가는 천하체계에서 서로 유기적인 생물이었다.
 

어디까지가 조선이고 어디까지가 청인지 굳이 논할 이유가 없는 천하였다. 국경분쟁은 근대의 논리일 뿐이다. 왕조국가의 분쟁은 국경의 분쟁이 아니라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분쟁이었다. 여진과 조선의 싸움은 국경분쟁이 아니라 생존조건에서 오는 유목과 정주농의 충돌이었을 뿐이다.

명을 섬기던 조선이 대청의 천하체계를 인정하지 않으니 남한산성까지 왔다. 대청천하를 인정하니 물러갔다. 삼전도의 치욕이라 하지만 사대와 사소의 정치질서가 재작동하였다. 영국이나 미국처럼 청은 조선을 식민지로 경영하지 않았다. 청군은 곧 철수하였다.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은 삼전도의 1637년에서 1910년, 273년 후였다.

공부가 짧아 1637년 남한산성에서 척화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의 사유를 알지는 못한다. 다만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과  영화 「남한산성」은 근대 민족국가의 프리즘으로 1637년을 보았다는 혐의만은 지울 수 없다.

근대 민족국가 원리가 동방의 천하체계 유기적 원리보다 더 진보한 것이라는 주술에 빠져 있는 것일까? 옛은 항시 낡은 것인가? 지금보다 아름다운 옛은 없다는 일직선의 진화사관에 빠진 것은 아닌가?

다시 초록바위로 온다. 어디 동학인들과 서학인들 뿐이었으랴. 초록바위는 왕조의 온갖 반역인, 살인 죄인들이 처형된 곳이다. 아마도 정여립의 기축옥사 때에 죽은 이들도 이곳에서 목이 베어졌으리라. 동학혁명군이 전주감영을 점령하였을 때에 홍계훈의 경군(京軍)은 이곳 일대에서 농민 군영을 포격했다. 왕조와 혁명군, 동학과 서학, 축생지옥의 살인죄인과 지배계급이 대립했다.

전주천의 1920년대 풍경.

근대 백여 년 조선과 한국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동학혁명, 청일전쟁, 러일전쟁, 의병전쟁, 독립전쟁, 남북전쟁이 있었다. 조선인들은 동학혁명군으로, 의병으로, 독립군으로, 중국 홍군으로, 소비에트 적군으로, 일본 황군으로, 인민군과 국방군으로 1894년부터 1953년까지 800만 가까이 죽었다. 필자는 1894~1953년까지 ‘60년조선전쟁’으로 지난 글에서 이름하였다.

이 ‘60년조선전쟁’을 한방에 꿰는 성격은 무엇인가? 아니다. 4.19가, 광주가, 6월항쟁이, 촛불항쟁이 있었다. 1884년의 갑신정변으로부터 촛불 2017년까지 133년이다. 이 133년을 한방에 꿰는 정신은 무엇일까?

왕조국가의 지속, 개화, 보국안민, 독립, 사회주의, 민족주의, 분단, 민주, 신자유주의, 백두혈통국가, 통일을 초지일관하는 뜻은 무엇인가? 민주화 이후의 근대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남북통일이 말하는 통일의 세계는 무엇인가? 마르크스 식으로 133년 계급투쟁이라고 하면 되나? 편하고 게으른 정명이다.

좌우 이념으로 보지 않겠다. 민주적인 근대국가 형성으로 보지도 않겠다. 진보 보수로도 보지 않겠다. 원자화된 개인으로 보지도 않겠다. 수많은 책들이 이미 붕어빵처럼 하는 말을 여기 또 적을 까닭이 없다. 그냥 백년의 춘추전국시대라 하겠다. 한반도의 백년은 동서고금의 모든 것들이 들끓는 용광로였다. 몇 천 년 역사에서 백년은 잠깐이다. 

진보는 어제보다 나은 내일이 아니다. 진보는 지금보다 나은 내일이다. 때로, 지금보다 나은 내일은 어제일 수 있다. 오래된 미래라고 하지 않는가!   

1884년의 갑신정변으로부터 133년은 파발마에서 스마트폰으로 물질은 개벽하고 진보하였다. 하면 사회, 정치, 문화, 국가체제도 진보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가?

․ 천하체계의 유기적 국가원리가 배타적 단독자 국민국가로는 진보인가?
․ 후천적 인격도야의 천인합일의 인성이 후천 노력 없는 천부적 개인의 인격은 진보인가?
․ 천하공물의 민본은 사라지고 이기적 개인 간의 민주는 진보인가?
․ ‘하늘 천 따 지’ 우주원리부터 배우던 소학이 ‘나는 철수이다’ 라는 개인원리를 배우는 소학은 진보인가?
․ 향약과 두레의 자치공동체로부터 계약 공동체로 이행은 진보인가?
․ 군자정치로부터 선거정치로의 이행은 진보인가?     
․ 자유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가 모든 것을 담지한다는 국가주의는 진보인가?
․ 하면 민주 이후의, 근대 이후의 국가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 인간적 규모의 마을이 국가를 매개하지 않고 천하체계로 진세계화로 직행하는 것은 주권국가를 역행하는 반동인가?

이 글 첫머리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동요를 이리 고쳐본다. "두껍아 두껍아 너희 집 줄게 우리 집 다오." 너와 나가 아니고 유기적 우리이다. 저쪽의 우리는 너희들이지 우리가 아니다. 다만 공존할 뿐이다. 하니 너희들은 너희 집에서 살고 우리는 우리 집서 산다.

개인 자유가 아니고 우리들의 사회적 자유이다. 옛집이 다 낡은 헌집은 아니다. 천년을 가도 아름다운 집이 많다. 헌집은 낡아서 소멸하지만, 아름다운 옛집은 오늘로 소통하니 늘 새집이다. 너희와 우리가 서로 더하여 천하를 이루니 그 천하 역시 우리 모두의 집이다. 하니 천하공물이요, 천하대동이다.   

(4)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전주를 모르는 분을 위해 사족을 단다. 윗글의 내용 배경이기도 하다. 약간의 사유를 더하였다. 건너뛰어도 무방하겠다.
 
초록바위에서 남으로는 후백제 견훤의 옛터 남고산성이 있는 고덕산이다. 동남으로는 승암산과 천주교 성지인 치명자산이다. 동북으로는 한옥마을이다. 북으로는 전주 구시가지가 보인다. 한 곳에 같이 있었다. 오늘이 전라북도 구도청은 사라지고 전라감영을 복원하는 중이다. 지금 무엇을 복원하는가? 옛 건물 감영의 복원이되 감영인가? 관민상화(官民相和)의 집강소인가?   

옛과 오늘이 공존하는 전주 풍경, 고금소통의 사유를 해본다. 앞이 한옥마을이고, 오른쪽 아래는 향교, 사진 중앙의 숲이 오목대.

초록바위는 곤지산(坤止山)의 동쪽 끝자락이다. 조선지문학(朝鮮地文學)인 풍수(風水,조선지리학도 바른 정명이 아니다. 풍수는 지리만 논하지 않고 문사철(文思哲)이 있다.)에서는 이 산을 갈마음수봉(渴馬飮水峰), 즉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형국의 산이라 한다. 물을 마시는 곳은 전주천이다. 목마른 말들인 동학인(東學人)과 서학인(西學人)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으니 풍수가 그르지 않다.

전주 북쪽에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의 전주 이씨 시조 이한(李翰)을 모신 조경단(肇慶壇)이 있는 산이 건지산(乾止山)이다. 전주의 진산(鎭山, 혹은 주산(主山), 애국가의 남산은 남쪽 산이 아니라 진산을 말한다.) 건지산을 진산으로 삼기에는 산이라고 하기 어려운 동산인데 다만 조선 왕조의 탯자리가 있다 하여 진산이라고 한다는 견해도 있다. 기린봉이 진산이라는 주장도 있다.

전주의 북과 남에 건지산과 곤지산이 있다. 주역에서 ‘건’은 강하다는 순양(純陽)의 괘이자 천(天)의 괘이며 남자의 괘이다. 방위로는 서북을 지칭한다고 한다. ‘곤’은 순음(純陰)의 괘, 대지(大地)의 괘, 여자의 괘라 한다. 방위로는 서남이다. 건과 곤의 합일을 곧 천지인합일로 보니 곧 대동사회이다. 하니 온전한 곳, 제 정신인 세계, 전주(全州)라 이름할만 하다.
 

초록바위에서는 전주의 멋진 풍경들이 손에 잡힐 만한 거리이다. 젊은이들에게는 뜻으로 와닿지 않으면 별 볼일 없는 풍경이다. 기린봉에 떠오르는 달 기린토월(麒麟吐月), ‘한벽루와 어우러지는 맑고 푸른 전주천의 아침 물안개와 낮게 깔리는 저녁노을의 빼어난 풍광’인 한벽청연(寒碧晴烟), 고뇌를 위로하기도 하고 깊어지게도 하는 고덕산 남고사의 저녁종소리 남고모종(南固暮鐘), 다가천변 활터에서 활 쏘는 모습인 다가사후(多佳射侯)가 있다.

지금도 ‘버들잎을 화살로 꿰뚫는다’는 뜻의 천양정(穿楊亭, 1712, 숙종 28년)에서 활을 쏜다. 눈 앞의 한벽당과 남천교 부근에서 빨래하는 아낙네 들의 모습인 남천표모(南川漂母)는 지금은 사라진 옛일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삶과 뜻을 되새김질하기에 이만한 풍경이 없다.

다가사후의 활소리가 들린다. 전주 사람 진동규 시인의 시 「파랑새 울음 웁니다」를 떠 올리며 시대를 겨눠본다.
 
“휘어도 휘어도 꺾일 수 없는 활, 하루에도 몇 번씩 시위를 당깁니다. 수렁에 빠져도 사는 그 억척의 물소뿔을 휘어 쑤꾸욱 쑤쑤꾹 억겁의 세월 날고 풀어 시위를 당깁니다.
진안 곰티재 아기바투 목구멍에 쏘아 박고 만수산 드렁칡을 당기어 정몽주 뒤통수에 날린 살, 단풍보다 더 붉게 다가산을 덮어 흐르던 동학의 꽃 붉은 함성, 타는 보리 모가지에 또 한 대 살을 날립니다.
금강 섬진강 만경강 황토땅 흐르던 파랑새 울음을 시위는 울어줍니다. 맨발의 견훤대왕 등창에 박히어 울던 살, 오늘은 그대 가슴의 찬 바위에 쏘아 박을 한 대 살을 재어봅니다. 시위를 당깁니다.”

다가사후 천양정에서 활 쏘는 이들. "활짝 당겨 개이는 먼오금/ 숲과 들을 벗어나 휘달려/ 그는 죽음의 사랑에 접근한다" <윤후명, “명궁”>

시대를 겨눠보니 가난한 마음에 오금이 저리고 아뜩하다. 싸전교 지난 시린 물은 초록바위 앞에서 한바탕 지몸을 부려 굽이친다. 속살을 드러내 부서지며 갈 길을 바투잡는다. 동짓달 어둠이 곤지산을 덮어간다. 팽팽한 겨울 바람이 남고사 저녁 종소리에 흩어진다.

동구를 나서 돌아오지 못한 1894년도의 조선 사내들을 떠 올린다. 나머지들이 새로 피리라던 사내들의 목이 떨어진 초록바위, 조선낫처럼 그믐달이 뜬 밤이다. 입춘을 지난 눈이 내리기로 ‘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롭다.’ 전라도 사내야! 벼려둔 이야기가 바람에 한 잎 두 잎 날려서, 너 그리웠다는 말 못하겠구나. 돌아오지 못한 사내들은 천리 천리 단풍이 불타는 전라도를 남기고 두만강을 건너갔을 것이다. 이용악의 시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가 절절하다. 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로우니....

“나는 죄인처럼 숙으리고 / 나는 코끼리처럼 말이 없다 /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 너의 언덕을 달리는 찻간에 / 조그마한 자랑도 자유도 없이 앉았다 /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다만 / 너의 가슴은 얼었으리라 / 그러나 / 나는 안다 / 다른 한줄 너의 흐름이 쉬지 않고 / 바다로 가야할 곳으로 흘러내리고 있음을.……잠들지 말라 우리의 강아 / 오늘밤도 / 너의 가슴을 밟는 듯 슬픔이 목마르고 / 얼음길은 거칠다 길은 멀다 / 기리 마음의 눈을 덮어 줄 / 검은 날개는 없나냐 /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 북간도로 간다는 강원도치와 마조 앉은 / 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롭다.”(이용악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수많은 동학인들과 서학인들이 초록바위에서 처형되었으나 김개남의 이야기만 전한다. 

김개남(金開南, 1853~95)은 정읍 산외 사람이다. 농민군 주요 지도자 중에 가장 급진적이었다고 전한다. 기범(箕範)이었는데 김개남으로 스스로 고쳤다고 한다. 개남의 開南(남은 남녘 남이 아닌 나머지 남으로 읽는다.) 천대 받는 나머지 사람들이 개벽을 한다는 뜻이리라.

일찍이 동학의 후천개벽에 눈을 떠 접주가 되었다. 봉기하여 전주화약 집강소 시기에는 남원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2차봉기 실패 후 정읍의 산외에서 피체되었다. 도움을 청한 임병찬의 배신과 밀고였다. 훗날의 의병장 임병찬(林炳瓚1851~1916)의 밀고로 1894년 12월 2일 전녹두와 같은 날 산외에서 피체된 김개남은 초록바위에서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의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설치한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에서 주고 받은 문서를 정리한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에서는 내용이 다르다.

김개남은 전주 서교장에서 처형되고 머리는 한양으로 보내져 12월 24~27일까지 서소문 밖 네거리에 효수됐다고 한다. 서교장은 진북동의 옛 해성학교 자리, 지금의 동국아파트 ‘서교장’에서 처형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전라감사 이도재가 서울로 압송하여야 할 김개남을 전주에서 처형한 데에는 여러 설이 있다. 탈출에 대한 염려, 김개남에 당한 양반들의 처형 요구, 흥선대원군과의 연관설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입막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황현의 오하기문(梧下記聞)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적 김개남이 형벌에 복종하여 죽음을 받았다. 심영(沁營)의 중군 황헌주가 개남을 포박하여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 이도재가 개남을 신문하였다. 개남은 큰 소리로 “우리들이 한 일은 모두 대원군의 은밀한 지시에 의한 것이다. 지금 일이 실패한 것은 또한 하늘의 뜻일 뿐인데 어찌 국문한다고 야단이냐”라고 하였다. 도재는 마침내 난을 불러오게 될까 두려워 감히 묶어서 서울로 보내지 못하고 즉시 목을 베어 죽이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냈는데 큰 동이에 가득하여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투어 내장을 씹었고, 그의 고기를 나누어 제사를 지냈으며, 그의 머리는 상자에 넣어서 대궐로 보냈다.”

동학 접주인 김개남.

김개남과 임병찬은 친구였다. 허나 왕조를 대하는 태도는 이리 달랐다. 임병찬은 일제에 맞서 의병 투쟁을 하다가 유배지인 거문도에서 순국했다. 우국지사로 알려진 황현(黃玹1855~1910)도 동학혁명에 대해 오하기문에서 감사 김학진의 머리는 아침에 메달고 적괴 전봉준의 시체는 저녁에 찢고 싶었다고 한다.

고답한 유학자의 생각은 동학이나 서학이나 이름만 다를 뿐 천주(한울님)을 섬기기는 마찬가지라 보았을 것이다. 또한 무지몽매한 천한 것들이 병장기를 얻어 양반을 능욕하는 것으로 밖에 보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를 생각하는 것이 이리도 달랐다. 
           
이를 소설가 이광재는 「나라 없는 나라」에서 이렇게 묘사하였다.

 - 이 나라는 너희 따위가 활개칠 나라가 아니다. 지금은 비록 병장기를 가졌다 하나 장대 끝에 목이 걸리는 날이 올 것이다.
 - ...... 정법이 시행되어 억울한 일이 없게 되거든 우리는 향리로 돌아갈 것이오..... 도적이 재산을 훔치는데 허울 뿐인 집안의 규율을 탓하시렵니까? 
 - 감사(김학진)의 머리는 해 아래에 매달리고, 적괴(전봉준)의 시체는 달 아래서 찢길 것이다. 

그가 잡혀갈 적에 백성들은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그 많던 군대 어데 두고 짚둥우리가 웬 말이냐” 또는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많은 군사 어데 두고 전주야 숲에는 유시(遺屍) 했노”라고 노랫가락으로 안타까워했다 한다.

잊혀진 전주의 노래가 여러 곡 있다. 이 자리서는 「고향초」를 부른 송민도의 「전주의 왈츠」가 그럴 듯 하다. 노래를 들어본 적은 없다. 어디엔가 이 노래가 있으리라 본다. 

그대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풍남문 종소리에 나를 깨워서 남고산성 달빛 아래 나를 재워주 (후렴) 아 - 아 - 덧없이 세월은 흘러가도 백제 서울 옛 꿈은 마냥 새로워 / 그대가 홀로 지나가는 길손이라면 모악골 길목마다 정을 남기고 기린봉 넘어 울면서 가리 (후렴) /그대의 마음 말해주기 부끄럽다면 덕진 못 맑은 물에 비쳐 주거나 한벽루의 옥돌처럼 간직해 두오 (후렴)

초록바위에서 한옥마을 속으로 간다. (끝) / 강주영 편집위원

글쓴이 강주영 전북포스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