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방 없이 자던 날씨가 달라져 간밤에는 보일러를 틀고 자야 할 만큼 추워졌다. 배낭 가득 잔뜩 짐을 꾸렸으나 겉 옷과 속 옷 할 것 없이 여유가 별로 없다. 종일 땀을 흘렸던 옷은 물에 대충 빨아 선풍기를 틀어놓고 잔다. 아침이면 뽀송뽀송해진다. 이 날은 방이 뜨끈했기에 잘 말라있었다. 어제 입은 걸 다시 입지만 내 몸을 통해 마음까지 전해지고 포근해졌다.

출발에 앞서 '오늘은 전주에 돌아가게 될 것 같다.'고 아내에게 통화를 하고 아침을 먹었다. 추령을 넘어 내장사로 가서 산을 등반할 예정이다. 다시 정읍 시내를 거쳐 전주로 달리는 길을 선택할 요량이다.

내장산 쪽에서 차를 몰아 넘어본 일이 있는데 만만치 않은 고개임에 분명하다. 300m를 넘는 큰 고개다. 여행 내내 초반에 고개를 만나곤 했고, 이날도 예외가 아니다.

장성군 북하면에서 시작되는 길은 좌측으로 백암산과 내장산을 끼고 감성굴재를 넘으면 전남이 전북으로 바뀐다. 다시 복흥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내장사 쪽으로 길이 나 있다. 얼마 안가 백토고개를 지나고 다시 추령 넘어서는 구불구불한 길을 내달려 내장사에 달한다.

길순이와 45kg 무게의 배낭.

아직은 단풍이 제철이 아닌 듯 하지만 그래도 내장인지라 평일임에도 제법 사람이 있다.

내장산 등반은 처음이었고 욕심을 내 일주라도 할까 싶었다. 하지만 전주에 가까워지면서 일정을 오늘 중으로 끝내기로 마음 먹으니 하는 것마다 달라진다. 서래봉으로 올라 불출봉까지 찍고서는 망해봉까지는 가 보겠다는 애초의 마음은 이내 변심을 한다.

예정을 따르는 대신에 내려가는 길을 선택해 내장사로 되돌아와 다시 자전거에 오른다. 아침에 큰 고개를 넘었고 다시 산에 올랐다 왔으니 지칠 법도 하다. 늦은 점심을 먹고 전주로 가는 길을 재촉한다.

남은 거리는 40여Km, 멀지 않은 거리다. 정읍 시내를 우회해 정우, 태인 쯤을 지나니 모악산이 바라보인다. 이제 거의 왔구나 싶다.

체력을 일정에 맞춰 분배하는 신통력을 얻었는지 어제까지와는 다르다. 전주에 가까워질수록 국도1호선, 뜨거운 아스팔트에서의 토막 쉼이 잦아진다.

담배 한 가치, 물 몇 모금, 그리고 다시 30여분의 달려 나가는 패턴이 반복하여 재생된다. 아침의 산행과 여기까지의 주행만으로도 이날 이미 많은 에너지를 쏟은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마음이 느슨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호사를 일갈이라도 하듯 느슨해진 상태를 긴장하게 만드는 일은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태인 지나 원평으로 넘어가는데 난데없이 터널이 나타난다. 이름을 확인해보니 솟튼재 밑의 솟튼 터널. 운이 좋아서였는지 6일 만에 처음으로 터널을 만난 것이다.

터널을 자전거로 달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자전거에서 내려 터널 가장자리의 턱 위로 올라 끌고 갈 것인지, 빠르게 터널을 지나는 게 나을지에 관한 고민이 급격하게 찾아왔다.

곡성 부근의 섬진강.

이론적으로는 인도에 오르는 게 나을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육중한 몸매거나 가냘픈 몸매거나 터널 속에서 내 곁에 남기고 가버리는 차들이 두렵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굉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이 공포는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고 가급적 빠르게 터널을 빠져 나가야 한다는 충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자전거를 타고서 지나는 길을 선택하였다. 마침, 깜빡이등을 준비해 두었고 깜빡깜빡 점멸하게 조작하고 가슴 쓸어 내리며 터널을 지났다.

이제 정말 다 왔다.

원평 지나 금구에서 마지막으로 캔 맥주를 하나 마시며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삼겹살이 먹고 싶다."고... "6시쯤이면 도착할 것 같으니 아이들과 함께 삼겹살을 먹자"고 했다. 왜 갑자기 삼겹살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마침내 박물관에 달했고 삼천에 이르렀다. 이제 남은거리 5Km. 심리적인 느슨해짐 이었을 수도 있다. 체력이 고갈된 상태였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집에까지 가야 이 여정이 끝남을 잊지는 않았다. 그렇게 자전거를 저어 집에까지 도착한다. 참으로 재수 없다고 해야 할 지 신통하다고 해야 할 지, 금구에서 아내에게 말한 도착 예정시간을 딱 맞추어 그렇게 도착했다.

집을 떠난지 다섯 밤을 자고 엿새째 저녁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 여행의 후유증은 이튿날부터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치질이었다.

그 땐 그렇게 해석을 했다. 장시간 고생을 하느라 힘들었던 항문이 성질을 낸 치질이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 추정은 그 후의 몇 번의 장기간 여행(또는 힘든 산행)후 똑같은 양상을 만나고서 교정되었다.

오랜 시간의 운동후 원기가 소모되어 중기가 밀어 올리지 못하고 아래로 빠진 탈항(대장이 아래로 빠지는)이었던 것이다. 이른바 한의학에서의 중기하함(中氣下陷)에 의한 탈항(脫肛)이었던 것이다. 여행의 뒤 끝에 삼겹살이 아니라 백숙이나 삼계탕을 먹어야 했던 것이다.

그때는 몰랐고 다음에 다시 탈항이 생겼을 때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론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격한 운동 후엔 삼계탕을 챙겨먹고 있다.

길 위의 길벗 김길중 한의사.

누군가는 나의 이 여행을 고행을 통해 뭔가를 털어내고 채워가는 목적이냐고 물었지만, 나의 길 떠남에는 목적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의미를 부여해 보자면 왠지 길이 나를 불렀고, 그 길을 통해 내게 여러 가지를 묻고 일러준 것으로 여긴다. 그거나 저거나 매한가지인가?

어쨌거나 이 여행은 내게 참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십 몇년간 의료생협과의 관련된 나의 고민을 털어내고 새로운 길로 시작된 여행이었다. 무지개한의원을 그만두고 그 다음날 출발하였다. 아울러 길과 고개를 통해 새로운 활력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는 취미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넘어서고 쉬고, 오르다 지치고 다시 기운을 내 넘어서야만 다시 내일을 만난다는 깨달음이 매일같이 내게 주어졌다. 그렇게 넘고 또 넘어가면 내가 가야할 길이 다시 전주였다는 것으로 깨달아진다. 그리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가 확인되는 것임을 찾아낸 여행이기도 하다.

여행은 끝나고 다시 얼마 후 일상이 시작되었다.

새롭게 시작된 일상은 현재로 이어지고 있으며 만족하고 있다. 스스로는 그 여행 이전과 이후가 달라진 분수령이었다고 여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프롤로그에서 언급한 바 있다. 나의 긴 여행이 시작되기도 한 짧은(?) 여행이었다. 누군가 자전거 여행을 동경한다면 이렇게 조언하고 싶다.

길이 어떻게 이어질 것이고 그 길에는 얼마나 큰 고개가 기다리고 있을지를 알려하지 마라. 계획 단계에서 만나는 고갯길에 대한 탐사는 도움이 되기보다 장애가 될 공산이 크다. 제목에서 달아둔 것처럼 고개 뒤를 염두에 둔다면 길을 나서지 못 할 가능성이 크다. 길을 나선다 하더라도 길이 달라지고 엉뚱하게 흘러갈 공산이 크다.

처음부터 어느 길, 어느 고개를 넘고 어떠한 길을 만들어낼 것인지를 계산 하는 것은 불필요하거니와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이 여행에서 넘어야 했던 수십 개의 고개와 예기치 않게 만났던 사건을 애초부터 알고 시작했다면 떠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한 걸음 한 걸음으로 하루가 만들어진다는 사실 뿐이다. 또한 하루가 여러 날이 됨으로써 하나의 여정이 만들어 지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가야 할 길을 가고 봄으로써, 비로소 그렇게 완성되는 여정에 불과하다는 점 때문이다.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지를 상상하지 말고 그냥 맞아들이고 넘어서는 습관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말처럼 쉽지 않은 대목일 테지만, 이 여행에서의 나의 교훈이 그랬다. 또한 지난 몇 십년간의 내가 걸어온 삶의 역정 속에서의 교훈이기도 하다.

지구가 평평한 땅이고 먼 바다엔 깊은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었던 사람들은 지구가 둥근 천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어떻게 건너왔을까?

새로운 세상을 동경했던 서유럽 사람들은 대서양을 건너면 아시아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 아래 이 길을 내기 위해 도전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믿음은 미약하고 희미했을 것이다. 바다 멀리에 용이 지배하는 바다와 땅이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까지 떨쳐낸 것은 아니었다.

지구가 둥글다고 믿었거나 평평하다고 믿었거나 사람들은 대륙을 더듬어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나섰고 그것이 이어졌다고 추측해본다. 그로써 비로소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길 뒤에 아시아가 있기를 바랐을 뿐이지 자신하지 못했다. 해서 더듬더듬 아프리카로 돌아 아라비아 반도를 따라 인도를 찾았다. 땅이 보이는 대륙을 따라 더듬어 내려갔을 것 같다. 그렇게 하면 먼 바다의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을 것을 믿어 그렇게 새로운 길을 조금씩 내왔을 것이다.

그 길이 이어져 대서양을 건널 용기를 내고 마침내 지구가 둥글다는 가정을 사실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두려움이 지배했을 것이다. 두려움을 이겨낼 용기와 부단한 노력이 마침내 새로운 길을 냈다고 할 것이다. 누구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날이 새롭게 이어지는 나의 여행은 그런 여정을 밟아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 여정을 즐겁고 기꺼이 넘어서려 노력하는 중이다. 자전거로 넘어서는 고개를 통해 나는 자신감을 가져가는 중이다.

가보지 않은 길을 나선다는 건, 먼 바다의 낭떠러지를 향해 나를 몰아 넣는 게 아니라 새로운 세상으로 조금씩 더듬어 가며 옮겨놓는 일이라 할 수 있다. 5박6일간의 남도여행이 준 고마운 선물이 아닐까 싶다. / 김길중 한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