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은 여인숙 수준의 숙소였고 광양에서의 두 번째 밤은 제법 근사한 모텔이었다.

밤사이 장흥이나 목포로 이동해 제주로 갈지 남도를 더 돌지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남도여행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순천을 들려 낙안읍성 정도로 목적지를 정하게 되었다.

제주로 가기 위해서는 항구까지 서너 시간이 소요 된다. 다시 제주로 간다 한들 배로 너댓 시간을 써야 하는 것에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다.

힘겹게 고개는 왜 오르냐는 질문은 사투 끝에 오른 높은 산에서의 벅찬 감동이 어떻게 생긴 것이냐는 질문과 같을 것이다. (이 여행길에서의 고개는 아니었고 올해 오른 안양산 부근의 고갯길 정상에서 찍은 사진이다.) / 김길중

아침을 챙겨먹고 광양의 중마(신시가지)에서 일단 광양읍으로 가야 한다. 길이 마땅치 않아 보인다. 남해고속도로 곁의 국도를 따라 가면 될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자동차 전용도로로 보인다.

이 길을 피해 좀 더 세밀하게 길을 찾는데 출발한 지 30분도 되지 않아 이름 모를 고개를 만났다. 내가 가진 것은 핸드폰상의 지도 뿐. 누군가에게 묻는다 해도 자전거로 광양읍까지 어떻게 갈수 있는지를 말해줄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이른 아침부터의 고갯길도 그렇거니와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고개를 오르고 지도에 의지해 산속 마을에서 헤맸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시멘트 길을 감에 의지해 내려가 보니 가까스로 지도상의 고속도로와 그 곁의 국도가 보인다.

짐작했던 대로 자동차 전용도로다. 돌아간다 한들 내가 원하는 길을 만나리라는 보장도 없고 해서 그대로 국도에 올라섰다. '송치재'라는 고개의 부근이었고 거기서부터 10여 Km 가량을 달려야 광양읍이 나온다.

덩치 큰 트럭들이 유달리 많을 수밖에 없는 광양항을 낀 도로였기에 살 떨리는 주행을 조심스럽게 이어가야 했다.

가까스로 광양읍에 도착해 한숨을 돌린다. 여기서 다시 순천만의 정원과 늪지의 갈대밭을 돌아 낙안읍성 까지 가는 길을 확인해본다.

하지만 순천을 넘어서면서 다시 길을 잃게 된다. 2차선 도로가 4차선 도로로 바뀌면서 선형이 직선화되고 전에 길로 쓰였을 2차선 도로가 끊기면서 방황이 시작된다. 이때는 이를 몰랐으니 길을 잃는 것이 외려 이상하지 않다.

4차선 도로의 사나움을 피해 찾은 길은 지도상에 표시되지 않는 산속의 임도가 되어 있었다. 그 산속에서 다시 고개를 두 번 넘어 마침내 순천에 도착한다.

아침부터 시작해 세시간만에 순천에 겨우 온 것이다. 정원과 늪을 돌아 점심을 먹으니 대략 50여 Km를 달렸다. 얼마 못 온 것 같지만 따지고 보니 올만큼 온 것이다. 이제 오늘 저녁에 머물 곳을 정하고 오후를 달려가야 한다. 뜻밖에도 낙안읍성 대신에 조계산과 선암사가 나를 부르는 것 같다.

오전에는 힘이 들더라도 기다리고 있을 길들에 들뜨지만 오후가 되면 마음이 급해진다. 하룻밤 유할 곳을 정하고 시간 안에 가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다.

오전의 고행으로 충분하지 않았는지 남은 길이 만만치가 않다. 낙안에서 선암사로 방향을 튼 것이 큰 고개를 피하고자 함도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였다.

이틀째의 여행중 가장 높고 힘든 고갯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순천에서 낙안으로 가는 중간에 상사호를 끼고 돌아 선암사로 가는 길의 도둠막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작가 김훈은 '자전거여행'에서 고개를 오르는 대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심장에서 비롯된 열정이 다리의 근육으로 전해지고, 그것이 페달과 체인을 통해 바퀴로 전달됨으로써 중력을 이겨 땅을 굴러 나아간다."라고... 심장과 다리와 페달과 바퀴와 땅은 그렇게 연결되며 땅위의 라이더와 땅을 혼연일체로 만드는 매개물들이라는 표현이다.

나는 여기에 보태 이렇게 말을 해보고 싶다.

"고개의 정점에 달할수록 나는 점점 낮아지고 바닥에 닿아 땅속으로 꺼져드는 느낌이 든다. 땅속으로 나의 혼이 온전히 파고 들어갔을 때 고개를 넘어서며 중력을 이기고 올라설 수 있다."고...

땅속으로 파고듦과 중력을 이긴다는 것이 모순되어 보이지만, 내 혼이 들어가지 않으면 다시 떠오를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고개에 올라 지나온 길이 내려 보이는 정점에 서면, 길을 따라 힘겹게 애써온 나의 기특함이 선으로써 형상화되어 보이기도 한다. / 김길중

땅은 수영장의 물이 되는 셈이다. 수영장의 바닥을 딛고 힘껏 치솟아오를 원동력을 얻어내지 못하면 다시 수면으로 떠오름에 있어 힘찬 추진력을 얻어내기 힘들다는 의미가 될 듯하다.

바닥에 닿지 않아도 발로 버티고 추진력을 얻어 솟구치지 못할 바는 없을 것이다. 가장 힘차게 고개를 넘어섬은, 파고들만큼 파고든 후에야 넘어선다는 주장이라 할 것이다. 한마디로 그 고개가 어느 고개든, 숨이 턱까지 차고 오르고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후에야 비로소 고개를 넘게 된다.

고개의 정점에 이를수록 땅을 향해 맹렬히 파고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정점의 바로 직전에서 맛보는 힘껏 넘어섬의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고갯길 오르기의 최고 정점은 내리막길에서 바람을 가르는 게 아니라 이 순간에서 느껴지는 벅참과 환희라는 설명이 핵심이 될 것이다.

어쨌거나 Anyway(길이 어떤 길이라도)...

산을 갈라 나 있는 길이고, 계절이 그런 만큼 슬슬 걱정이 고개를 든다. 늦어도 5시반 까지는 선암사까지 가야 하는데 어쩌나 하는 생각이다.(이 여행 당시의 나름대로 설정해둔 마지노선이었다)

쉼은 항상 이런 계산과 염려로 망가진다. 어쩌면 지도상에 표시되지 않는 작은 고갯길들이 얼마나 기다리고 있을지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행하게도 도둠막재 이후로는 대체로 내리막이었다. 선암사에 이르는 10여 Km를 바람을 가르며 목표한 시간인 5시반에 도착하였다. 아직도 여전히 다음날의 일정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결정하지 못한 채, 일단 셋째 밤을 이렇게 넘기는 것이다.

집 떠난 후로 세 밤을 모텔과 여관에서 보냈다. 그새 날이 제법 쌀쌀해졌다. 조계산을 넘어 송광사까지 산행을 하고 돌아 오는 게 나을지, 그냥 도로 선암사로 내려올지를 고민하였다.

집주인은 나에게 뜻밖에도 자전거를 가지고 올라가라 한다. 그러는 사람들도 있다고 덧붙인다. 실제 그런 사람들도 있고 산악 300랠리라는 대회의 코스 중에 이 코스가 포함되기도 한단다. 포장된 길도 힘든 나에겐 안될 말이었고 귀로 흘려 넘긴다.

자전거와 무거운 짐들을 맡기고서 산행을 시작한다. 장군봉과 연산봉을 비롯해 몇 개의 봉우리를 찍고 중턱의 보리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내려와 보니 3시가 채 안되었다.

다시 어디로 향할지 지도를 놓고 고민한다. 이때부터는 귀향이 슬슬 머릿속에서 자리잡기 시작할 무렵이다. 어쩌면 대상을 확정 지을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이, 단단하게 마음 먹어야만 나아가는 여정 속에서 슬그머니 싹트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또는 짐짓 씩씩한 척 했던 마음속에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피어 오른 것 일수도 있다.

기다림에 대한 그리움인가? 그랬던지 아니었던지... 다시 애니 웨이...

승주에서 좌측으로 돌아 주암 화순 방면으로 갈지, 승주에서 구례 방향으로 틀어 다시 섬진강을 타고 전주 쪽으로 향할지에 대한 선택에서 쉽고 집에 가까운 쪽으로 마음이 쏠린다. 그래 오늘 밤은 구례로 하자!

구례까지의 거리도 만만치 않다. 지도로 보건데 어제의 고개보다 더 큰 고개가 기다리고 있었고,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여행길에서 가장 높은 고개 중 하나일 승주, 월등간의 고개를 힘겹게 올랐다. 고개야 어제와 그제보다 높았지만 그사이 체력이 커졌는지 자신감이 붙었는지 힘겹지만 어렵지 않게 올랐다. 오른 만큼 길게 이어지는 내리막을 타고 바람 위를 달려 월등과 괴목, 황전을 거쳐 구례구에 이른다.

세상사 계산대로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목적이 분명해지면 사람의 몸과 발걸음이 목적지로 수렴하기 위해 맞춰진다고 여길만 하다. 적어도 이 여행길에서는 그랬다.

제법 컸던 산행과 큰 고개 하나를 넘었던 자전거까지 이날도 이렇게 저문다.

숙박비 2만원의 여관을 운좋게도 구례구역 앞에서 잡았고 쉴 수 있었다. 날은 어제와는 또 다르고, 출발할 때 입었던 여름 등산복은 이제 밤바람을 견뎌내기엔 버거움이 드는 저녁이다.

전주->곡성->광양->선암사->구례구->백양사->전주의 5박 6일간의 여정.

애초5일 내지 6일, 길게는 7일간의 여정으로 시작된 여행의 다섯 번째 날.

대략 나머지 일정이 윤곽을 잡아간다. 이제 순창을 거쳐 담양, 그리고 백양사까지 가기로 한다. 그리고 내장산을 들러 고창쯤으로 들러 하루 더 묶고 전주로 갈지, 아니면 바로 전주로 향할지에 대한 결정만 남은 것 같다. 어쨌거나 일단 백양사를 향해 출발한다.

한번 와본 길이라고, 3일전에 와본 구례에서 순창까지의 길은 단조롭고 지루하기까지 했다. 점심을 순창에서 먹고 담양으로 넘는 과정에서 다시 문제가 생긴다.

순창에서 금과면 금성면을 거쳐야 담양이 나오는데 고갯길 정상에서 길순이의 상태가 이상하다. 여태까지는 기어가 잘 작동이 되지 않은 것에 불과했다. 굳이 기어를 바꾸자면 손으로 체인을 밀어 올리면 되는데 이제 아예 먹통이 되어버렸다.

오르막길이 아니라 내리막길을 달려가는데 페달을 굴려도 헛도는 것으로 느껴진다. 낮은 기어에 고정되다 보니 내리막에서 굴러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담양까지 속도를 높이지 못하고 겨우 겨우 힘겹게 갈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힘이 들지 않아 힘든 상태를 만난 것이다.

자전거 수리점에 들러 상태를 확인해보니 예상대로 기어가 완전 망가졌다. 케이블을 교체했고 몇 가지 다른 문제까지 손보며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지나온 몇 일을 이야기 해주니 ‘이 자전거로 여기까지 왔단 말이요?’라는 탄성이 나온다. ‘기어가 작동이 잘 안돼서 그렇지 올 만 하던데요?’라고 답하니, ‘거참...’그러신다. 무엇을 생략했을지 궁금하지 않다.

여하튼 지체된 시간도 있고 해서 서두른다. 다시 4시 가까이 되었으니 백양사까지의 길을 서둘러야 한다.

이때의 여행에 대해 후회된다면 너무 목적에 집착하고 계획에 연연하지 않았나 싶을 만큼 매일 저녁시간이 가까워지면 쫒기곤 했던 것이다. 이날도 예외 없이 그랬다.

그리고 어둑해질 무렵 백양사 앞의 한옥펜션에 들어설 수 있었다. 제일 호사를 누린 저녁이었던 듯 싶다.

100km가 조금 넘은 상태로 네 번째 날 밤을 보낸다. 어쨌거나 오늘도 이렇게 무사하게 달려왔고 뜨끈뜨끈한 황토집에서의 하룻밤 쉼이 내게 주어진 것이다. / 김길중 한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