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길과 고개들을 정리하기 시작한 뒤로 나 역시 사는 땅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타인에 비해 역사나 지리를 비롯한 여러 방면에서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나였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모르는 게 태반이고 아는 것이 미미하다는 자각이 일고 있는 중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 뒤로 고향인 봉동에서 살고 있는 어느 선배를 만난 일이 있다. 세시풍속을 보존한다며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고 정리하고 있었다. 변변한 물적 기반이 없이 홀로 애쓰는 선배를 보면서 문득 나의 이런 글쓰기가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선배는 기억할 법한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녹취하고 기록해 가고 있었다. 소리면 소리, 진술이면 진술, 풍물이면 풍물 굿의 원형을 남기고 복원하고자 해야 할 모든 노력들을 다하고 있었다.

나한테 당부한 게 있다. 떠도는 소리들을 담아둘 게 아니라 어떤 주장이나 말이 나온다면 근거를 남기고 증거로서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이번 글을 쓰면서 새로 알게 된 신정일 선생에 대한 외경심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존함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뵌 적은 없다. 다만 그 분이 이 땅 위의 많은 길을 걸으며, 길과 그 길 위의 사람들에 대한 수많은 연구 결과의 흔적들이 나의 이런 추적과 겹치면서 들게 된 존경이라 할 수 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거론한 고개가 강당재와 마당재, 보광재였다.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거론한 고개들이다.

전주 안에 있는 고개들을 여러 경로를 통해 찾아보았다.

용머리고개(용두치, 용두현, 용머리고개), 강당재(선너머 고개, 서원너머 고개), 보광재, 장항치, 노루목재, 장승백이, 보광재(보광치), 장고개, 쑥고개(숙호재, 숙호치), 탄치(숯재), 만지고개(만절리고개), 달룬개재, 마당재, 막은담이재(색장치), 눈소고개, 돌팍재, 소리개재, 수리재 등이 발견된다.

전주에 이렇게 많은 고개가 있나 싶을 정도로 이름도 생소하다. 그리고 저 많은 고개들이 어디에 있나 싶을 의아함도 함께 한다. 대략 위치가 짐작이 가지만 정확하게 어딘지 잘 모르겠다 싶은 고개도 있다. 아예 이름만 남아 있지 어느 곳인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고개도 있다.

소개하는 김에 간략하게 몇 고개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용머리 고개는 김제, 부안에서 금구를 거쳐 삼천을 건너 전주로 입성하기 위해 마지막 쉼터가 될 만한 고개였고, 대장간이 많았던 고개라고 한다. 아울러 역사적 사건 속에 등장하는 요충지이기도 했다.(고려시대의 강감찬 일화에 등장했고 동학농민전쟁의 격전지)

강당재는 꽤나 역사가 오래된 고개다. 향교에서 서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경기전의 어진에 누를 끼칠까 두려워 서원을 서문 밖 화산 기슭 삼계리로 옮기면서 서생들이 넘나들던 고갯길로 알려져 있다. 엠마오 사랑병원에서 화산동으로 넘어가는 길이 강당재다.

장고개는 서신동(서신초 부근)으로 마전 방면을 거쳐 삼례로 통하는 길이 있어 자연스럽게 장이 섰으며 재에 인접한 재뜸 마을의 이름이 지금도 쓰이고 있다.

막은담이재는 군사시설로 이야기가 전해진다. 도둑이나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만든 울타리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침범 했을 때 이 고개에 허수아비를 세워 적을 막은 적이 있어 이렇게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다.

기린봉 뒷편의 동부우회도로 근처로써 좁은목이 아니라 아중리 방면으로 돌아 쳐들어올 것을 막아서기 위한 것으로 추정해 볼 만하다. 그래서 막은담이재가 아니었겠냐는 나의 주장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마당재는 기린봉 자락(지금의 기린봉아파트 인근)에 위치한 너른 마당 같은 터로 인근의 동고사, 남고사 등 여러 사찰의 불교행사를 연합하여 치르기 위해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아동에서 소양으로 넘어가는 금상동(천주교 공동묘지 부근)에는 소리개재라는 고개가 있는데 6.25 무렵의 보도연맹원들이 학살 당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방목신(四方木神)이라 하여, 구이에서 들어오는 길목의 장승백이, 북쪽의 가리내(추천교쯤), 서쪽의 중화산동 가마귀골 등 네 곳의 전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장승을 세워둔 곳 중 하나로 소리개재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 글을 쓰다가 본 자료 중에 2004년 전주 종이박물관에서 전시한 100년 전의 전주 사진들을 접하였다. 우선 사진부터 소개하면 이렇다.

다가교(1920년대로 서문교회에서 제공된 사진)

첫 번째 사진은 다가교 건너편의 신흥학교방면에서 다가교를 건너 호남의 최초 개신교회였던 서문교회로 예배하러 오는 사진이다.

신흥학교

두 번째 사진은 1900년에 개교한 신흥학교와 기전학교를 담은 사진으로 역시 서문교회에서 제공된 사진이다.

옛 예수병원.

세 번째 사진은 다가공원 정상의 옆에 있는 옛 예수병원 사진으로 1910년대 사진이다.(현재, 엠마오사랑병원으로 활용되는 병원이다.)

용머리 고개 확장공사(1968년)

그리고 마지막 사진은 1968년에 진행된 것으로 보이는 용머리 고개 확장공사 사진이다. 철거되는 육교 높이까지를 깎아 길을 냈다.

이 사진들을 종합해 보건데, 현재 곁에 들어선 건물들이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지만 여러 길을 내면서 산세나 지형이 상당히 달라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가 전주에서 살기 시작한 것이 1983년 말부터인데 30년이 경과한 그때와 지금은 매우 다르다. 구 시가지와 서학동, 평화동에 이르는 가도변에 주택이 있었다.

북으로는 덕진동 전북대학교까지 역시 길을 따라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용머리고개 넘어 효자동 삼천동 방면에는 상산고와 동암고 같은 학교들이 외딴 곳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막 전주역이 옮겨와 인후동과 우아동 역시 길가에 주공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던 참이었다.

지금의 전주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시절이다.

그 사이 고개도 없어져 평지처럼 된 곳도 여러 곳이다. 삼천동에서 중인리로 넘어가는 길목의 해성학교 못미쳐 효천지구에서 야산이 사라지고 있다. 이곳이 아파트로 변해가는 광경을 상상하면 어렴풋이 이해가 갈 것이다.

100년 전의 전주와 30년전, 그리고 지금의 전주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 할 것이다. 다시 30년이 흐르고 100년이 흐른다면 오늘의 이야기조차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다시 처음에 언급했던 선배와의 대화로 돌아가 본다.

시골 어지간한 데는 향토지(읍지, 면지, 군지 같은)가 있는데 봉동과 삼례 같이 조금 큰 동네에는 없다고 한다. 선배와 나는 일제와 현대사를 거치면서 부끄러운 일이 많았던 집안사람들이 여전히 힘을 쓰고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그 자손들이 건재하는 한 역사가 제대로 기록되기 힘들 것이라 말하며, 선배는 하는 데까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갈 것이라고 다짐한다.

강당재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헤매도록 만든 가장 큰 것이 강당재의 위치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문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D포탈 사이트에서 잘못 알려준 탓도 있다.

이 사이트에는 고개를 표시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엠마오 사랑병원 앞의 강당재 대신에 엉뚱하게 신흥학교 뒷편으로 알려주고 있다. 예수병원 앞 길이라는 어떤 기록과 현재의 예수병원의 위치가 옮겨온 것을 감안하지 못하고 고증이 어려워 인근의 적당한 곳에 점이 찍어지지 않았나 싶다.

물론 전후를 따지자면 이 사이트가 아니라 지역에서의 연구가 있지 못한 책임이 먼저여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글을 쓰다가 국도 1호선은 지금처럼 용머리 고개가 아니라 애초에는 강당재였다는 기록을 접했다. 언제 그게 바뀐 것인지, 그 기록이 믿을만한지를 따져보려 했지만 내 수준의 접근에서는 찾기가 어려웠다.

아시다시피 국도는 종종 이렇게 길이 달라지기도 한다. 팔달로와 충경로가 국도의 통과지점이지만, 전에는 전주우체국 앞이 국도였었다고 한다. 국도 이정표가 구KBS(현재의 환경운동연합 건물)앞 사거리에 있다.

판단이 엇갈려 아직은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은 있다 하더라도 기록해 둘 수 있는 것들은 제대로 기록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으로써 후대가 제대로 써먹을 반듯한 기록들은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것이 시대를 넘겨줄 고갯길을 내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또한 이런 노력들을 행하고 있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길이란 이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지는 법이다.

더 이상 기억이 사라지기전에 이런 기록들을 해 나갈 필요가 있다. 이름만 남아있는 고개들의 기록을 찾아내고 내일로 넘겨주는 일도 필요하다.

옛 사람들이 우리에게 남겨주고자 했던 메시지를 소중하게 담아두고 또다시 물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길이 그냥 길이 아니었고 사람들의 삶이고, 역사를 간직한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란 그래서 제대로 기록되고 기억되어야 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 김길중 한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