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보다 사랑한 당신

           – 강주영 목수

나의 20대인 80년대는 자랑도 영광도 아니었다. 청춘의 사랑도 숨어서 해야만 했다. 청춘은 고통의 날들이었고 우울했다. 며칠 전에 만난 소설가 이광재와 나는 몽땅 취해 재인이와 철수가 어쩌고저쩌고 적힌 신문이 구겨져 내팽겨진 쓰레기통을 껴안고 부르짖었다.

- 니기미 씨팔 데모하느라 사랑도 제대로 못 해봤는데, 87년에 그렇게 물러나는 것이 아닌데. 니들 멋대로 찢어지면서, 뭐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야 이놈들아 니네나 잘 하세요.

돌이켜 생각하니 난리 중에도 사랑은 꽃피고 아이들은 자랐다. 게릴라 마냥 숨어서 한 사랑이었을망정 애뜻하고 그리웠다. 불씨를 살려나갈 씨화로 아이를 둘이나 키웠으니 그만하면 됐다 싶다. 지금은 마누라님 눈치 보며 젖은 가랑잎 마냥 찰싹 붙어사는 처지이지만 뜨거운 시절이 있었다. 여기 묵었으나 여전히 빛나는 청춘의 편지, 째와 어설픔이 가득하지만 진지했던 사랑을 올린다. 25살, 봉함엽서에 적혀 검열을 통과해서 교도소 담장 밖으로 훨훨 날아갔던 청춘의 언어들......

당시 감옥 안에서 보냈던 연서(戀書)와 편지 봉투. 당시 봉함엽서여서 봉투 안쪽에 글을 썼다.

<편지 전문>

그리움을 드는 칼 삼아 고적한 긴긴 날을 끊어내어 이 글을 쓰오.

연인과 친구들을 무문관(無門關)에 보내놓고 당신 심사야 오죽하겠오. 하지만 여하튼 학사모를 쓰고 졸업하는 당신을 상상하니 내 마음도 좋으이. 가슴에 서린 저마다의 청춘의 고뇌를 안고 식장을 떠나는 발길은 무거울 것이오. 나는 당신의 내일을 근심하여야 하고 같은 무게의 내 내일을 설계하여야만 하오. 독거수의 고뇌스런 밤을......

현실의 이 생활 속에서 민주주의보다 당신이 더욱 그립소. 비 오는 날이면 거의 좌불안석이오. 밥알을 넘기기가 지겹단 말이오. 작은 서재와 사랑이 녹는 커피, 귀여운 눈망울의 아이들, 고난의 한 때를 줄곧 나와 함께 한 당신! 이러한 것들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오. 접견실에서 당신이 내게 말한 그 계획도(영문과를 졸업한 나의 연인은 노동운동한다고 7년을 공단에서 미싱사로 지냈다.) 웬지 모르게 싫고, 만류하고 싶어진단 말이오. 나는 두려워지오.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자꾸만 불확실한 내일이 두려워서 나는 견디기가 힘이 든단 말이오. 되돌아본 길은 조야했고, 갈 길은 험난한데, 이 밤을 나는 슬퍼하고, 그리고 아무개가 아무개한테 (대학졸업선물로) 쌍가락지를 두 돈이나 해주었다는 이야기며, 당신에게 졸업반지 하나 못해주는 것을 슬퍼하고 있단 말이오. 백무동 시린 계곡물로 작수성례(酌水成禮)하던 그 5월의 봄날에도 나는 당신에게 하다못해 꽃반지도 못해주었으니 어찌 슬퍼하지 않겠오.

누구랑 누구는 곧 출소한다고 들떠있고, 나는 다시금 다시금 마음을 다잡어 모아서 이를 아앙 다물어야 하는 것이오. 나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 속에 잠긴 슬픔과 고뇌를 읽어야 하고, 내 좌절을 상실해버려야 하고, 그리고 당신을 사랑해야 하고, 나를 증오스러운 나를 사랑해야 하고, 나아가 당신과 나의 내일을 진정으로 훌륭하게 설계하여야만 하오.

민주주의보다도 당신을 더욱 그리워하는 당신의 주영. 1987. 2. 23

강주영씨는 전북 정읍 출신으로 전북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학생 운동을 하다 감옥에 들어간 뒤 건축 공부를 해 지금은 건축기술사로 일하고 있다. '목수'를 자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