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있는 동문 Philip Park(필립 박- 한국명 박운택)이 고향 황등 이야기를 꺼냈다. 내게는 눈 내린 황등에 얽힌 아련한 추억이 있다.

강주영씨는 전북 정읍 출신으로 전북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학생 운동을 하다 감옥에 들어간 뒤 건축 공부를 해 지금은 건축기술사로 일하고 있다. '목수'를 자칭한다.

그 애는 고향역 앞길에 핀 코스모스처럼 가냘프거나 그러지 않았다. 도리어 고향역 앞 국밥 집의 더운 김 같고, 거칠 것 없는 넉넉한 주모 같았다. 자신을 버린 고향을 찾아가는 소설 ‘삼포 가는 길’의 따뜻한 고향을 그리는 ‘백화’ 같기도 하였다.

어느 해 겨울, 작당을 한 남학생 몇이 황딩이(익산 황등) 그 애 집을 쳐들어갔다. 그 애는 생고구마를 토담벽 수수깡 바자에서 꺼내주고는 커다란 무쇠 정지칼을 덜퍼덕 내밀었다.

- 깎어 처먹어라. 몇 개 후딱 쪄 오께.

여대생이었던 그 애는 몸빼바지를 입고 털신을 끌고 다니며 분주를 떨었다.

- 아가씨가 이게 뭐냐. 명색이 남학생들이 왔으면 챙겨 입을 줄도 알아야지...

- 누가 오랬나? 여기서는 다 이렇게 살아. 보기 싫으면 너네가 가라. 상거지들이 따로 없구만...

그 애가 대소쿠리에 다 쪄진 황딩고구마를 내왔다.

- 목 맺힌 게 싸목싸목 먹어라. 동치미 내올게.

얼핏 드러난 그 애의 목은 촌년답지 않게 살얼음에 뜬 동치미 무처럼 하얬다. 하얀 함박눈이 동치미 양푼으로 내리기 시작한다.

- 눈 내리면 차 일찍 끊어진다. 후딱 가든지 아님 여기서 자고 가라.

- 나갈 일 없어. 자고 가지.

- 니들 나가서 군불 좀 더 때라.

나는 잠이 와서 손때 묻은 퇴침을 당겼다.

- 야, 일루 머리 대봐라.

그 애가 몸빼 허벅지를 대준다.

- 숭허다. 치워라.

- 잡것, 뭐가 숭허냐. 안 잡아먹을 텐 게 일루 머리 대라.

못 이긴 채 머리를 그 애 허벅지에 대었다. 퇴창 밖에 내리는 눈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 너 밥은 잘 먹고 다니냐? 언제 잡혀가냐?

- 다가오는 가을까지는 잘 도망 댕겨야지. 가을에 해소(신변정리의 은어)할 거야.

그 애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 근디 너 소설은 언제 쓸 건디? 너 마르크스 읽다가 영 소설하고 남 되는 거 아녀?

- 소설은 나중 일이여. 나 졸린다.

물방울이 내 이마 위로 떨어졌다. 그 애 머리카락에 묻은 눈이 녹은 줄 알았다. 눈동자가 젖어 있었다. 예쁠 것 없던 그 애가 순간 예뻐 보였다. 그 애가 내 이마에 뽀뽀를 했다.

- 잘 도망 댕겨라. 밥 꼬박꼬박 챙겨 먹고...

그녀의 따뜻한 우정 덕에 나는 예정대로 다가온 가을에 잡혔다. 그녀가 흘린 따뜻한 눈물, 몸빼 허벅지, 동치미, 고구마, 함박눈... 내게 황등은 그런 곳이다. 황딩댁 어디서 살고 있나. 인자 내가 허벅지 내줄게. / 강주영 목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