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관계라는 선물 : 팜파스그래스 ‘써닝데일 실버’와 호피무늬억새

그것들은 수렁보다 더 험한 데서 온 것 같았다. 윗동강은 싹둑 쳐내고 뿌리만 남은 채 비닐에 돌돌 감겨 있었다. 두덩이 씩이나 마당에 던져 놓고 그들이 총총 가고 나자 내 입에서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수선하고 심란해서 거들떠보기도 싫었다.

집 지은 선물로 저들 딴에 신경 써서 가져온 식물인데 어쩌자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하루를 방치해 뒀다. 다음날 어제 갖다 준 식물들 잘 심었냐고 묻더니 곧 오겠단다. 이것 참 야단났다. 남편은 나를 향해 검지를 들어 입단속을 시켰다.

그럴 줄 알았다.그는 거절하거나 내색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번 일도 질질 끌려가게 생겼다. 싫은 티 나지 않도록 연기를 해야 할까. 저 눈빛을 무시하고 악역을 해볼까나.

왼쪽이 팜파스그래스 ‘써닝데일 실버’. 오른쪽이 호피무늬억새. 팜파스그래스는 남아메리카의 팜파스 지역이 원산지이다.

억새가 어떻고 무슨 실버라는데 이름도 거시기하다. 듣도 보도 못한 저 몰골이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나와 동기이면서 입이 두툼한 그는 본인 시골집에서 포기를 나누어서 캐 왔다고, 키도 훤칠해서 두고 보면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한다.

바늘과 실처럼 붙어 다니는 그의 후배는 한 술 더 뜬다. 제일 좋은 곳에 심어 놓을 만 하단다. 우리 부부와의 인연도 만만치 않으므로……. 나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웃었고 속으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들은 우리 집에 가끔 드나들 것이므로 이왕지사 거실에서 잘 보이는 곳에 심기로 손을 들어줬다. 사람 좋은 그 동기와 후배는 땀을 뻘뻘 흘리며 모래땅을 깊숙이 팠다. 다음에 더 좋은 것 있으면 캐 가지고 오겠다면서 껄껄 웃었다.

그런데 이름도 요상한 그것들은 내 예상을 뒤집었다. 지난 사계절 돌아보니 어여쁘면서도 긴 시간 자세가 견고했다.

풀 종류인 하늘하늘한 ‘써닝데일 실버’는 흰색 머리털에 노란색 물 한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우아했고, 초록이파리에 노란점이 간간이 박힌 ‘호피무늬억새’(나는 노랑점박이억새로 부르고 싶다)는 또 어떤가. 쏙쏙 올라온 연한 금빛 화서가 이리저리 흔들거린다.

‘써닝데일 실버’가 먼저 올라왔다.

불볕더위를 몰아내고 가을의 낌새를 알리는 전령사들 같다. 한국 최초의 여성 조경가 정영선은 다큐 「땅에 쓰는 시」에서 “겨울에 아름다워야 봄도, 여름도 아름답다.”고 했다.

작년 겨울에도 나는 보았다. 누렇게 변했으나 폭삭 주저앉지 않았고, 눈송이를 소담스럽게 받아들이더니 눈꽃을 매달기도 했으며, 날리는 바람에 눈송이를 흩뿌리기도 했다. 그 과정을 나는 모두 눈여겨보았다. 매우 흡족하였다. 겨울에 보잘 것 없던 우리 집 마당을 아름답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도맡았다.

사는 동안 이런저런 일로 힘들었지만, 그중에서도 인간관계는 풀리지 않을 숙제처럼 느껴진다. 어떤 관계는 처음에 확 달아올랐다가 한방에 훅 사라지기도 했고, 뜨뜻 미적지근하지만 길게 가기도 하고, 유야무야한 관계로 명색만 갖고 있기도 했으며, 수십 년 친밀하게 유지하는 사례도 있었다.

우리 부부와 그들과는 30~40년 끊이지 않고 이어졌지만 그렇듯 친밀하다고 볼 수 없는 사이였다가 최근 밀착이 재생성 되는 관계로 바뀌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우리 부부가 주택을 지어 이사했는데 그들의 집과 거리가 비교적 가까운 것도 한 몫 한 것 같다.

지난 겨울 눈이 내린 어느 날.

사람을 안다는 것, 다들 쉽게 말하지만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어떤 관계는 처참하게 참패했으며, 실망도 적잖았다.

엄연히 다른 풀과 억새- 서로를 만지며, 간지럽히며, 부딪고 때리며 꺾였다가 다시 일어나 오랫동안 관계를 이어갈 것이다. 주택을 지은 덕분에 밀착이 재생성 된 우리의 세월도 이와 같으리라.

나는 하루에 대여섯 번 그들을 들여다본다. 그러고 나면 하루해가 저문다. 어떤 날은 늘어뜨린 커튼과 창문 시트지를 걷어내고 온전히 바라보고 싶을 때도 있다. 지금은 거실 한쪽만 가려주지만 ‘써닝데일 실버’의 포기를 나누어 심어서 다른 쪽도 보강해야 할까 요모조모 구상 중에 있다.

내년 가을엔 당신을 초대하리라. / 이현옥 

글쓴이 / 이현옥 전 우석대학교 도서관 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