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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혈 청년 이영남의 역사 '노량의 바다' 책으로....이병초 시인이 전북포스트에 연재했던 장편 소설 단행본 출간
전북포스트  |  jbpost20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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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8.02  16:3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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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과 마지막 전투를 함께 치른 의기, 열혈의 청년 장군 이영남을 만나다!

- 노량해전을 통해 살펴보는 전의인 이영남 장군의 불꽃같은 28년

 

“장군, 출정해 주시옵소서. 경상우수영의 바다를 지켜주시옵소서!”

4월 18일에 한양에서 출발하여 23일에 경상우수영에 도착한 이영남. 원균이 육지에서 싸우겠다고 하면서 함선과 무기를 수장(水葬)시킨 뒤 육지로 도망치려고 했을 때 이를 만류하고 이순신과 협력하여 같이 바다에서 싸우자고 역설한 이영남. 그리고는 24일에 이순신을 찾아왔던 것이었다. - 본문 38쪽

 

   
이병초 시인이 전북포스트에 연재한 '노량의 바다'가 책으로 나왔다.  

이병초 시인(웅지세무대 교수)이 전북포스트에 연재했던 역사소설 '노량의 바다'가 책으로 엮였다. 도서출판 '작가'에서 펴냈다. 그는 전주 예수병원에 지인을 문병하러 갔다가 그 옆에 있는 선충사(宣忠祠)를 우연히 찾게 되었는데 거기서 전의인(全義人) 이영남을 만났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마지막 전투를 치른 청년 장수 이영남(李英男, 1571-1598), 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공교롭게도 당시 흔한 이름이 영남(英男)이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7년 동안 이영남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여러 명이다. 『난중일기』에 이영남으로 추정되는 이름과 관직이 60회 이상 나타났어도 그가 어떤 집안의 이영남인지 명확하게 가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글은 한 사람의 성씨(姓氏)를 찾는 것에 몰두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라는 불행 속에서 전사했거나 전쟁에 참여했다는 점만으로도 동명(同名)의 이영남들은 충신이기 때문이다.

이병초는 글머리에서 “이영남에 대한 내 관심은 유생의 글줄에 있었다. 그가 순절한 지 무려 200년이 넘는 순조 6년(1806)에 송상열 등 전라도 유생 75명이 조정에 상언(上言)한 지점, 초야에 머물지언정 조선 역사의 생명체로 움직이고자 했던 선비들이 이영남의 불꽃 같았던 28년의 삶이 역사에서 제대로 평가가 이루어지도록 붓끝을 벼린 지점”에서 소설이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500여 년 전의 일인 데다 이영남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아서 글을 쓰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전했다.

『노량의 바다』는 ‘노량해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중심축으로 잡고 사건의 앞과 뒤를 촘촘히 짚어갔다. 소설 속에는 이영남의 고향인 전주의 풍광이 유려하게 펼쳐지고 그가 무예를 닦았던 모악산도 정답게 다가온다. 반면에 전주 사람들에게 피바람으로 들이닥쳤던 기축옥사(己丑獄事)가 가슴 아프게 형상화되어 있다. 싸늘한 주검이 되어 한양에 압송된 정여립을 보고 사람답게 다가섰던, 전주부 구이면 출신인 통천김씨 김빙(金憑)의 모습도 절절하다. 총알과 화살이 빗발치는 최전선에서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산화(散華)했던 병사들의 대부분이 백성의 아들이었다는 점도 소설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잘난 적도 없고 잘나지도 않은 백성의 삶을 정답게 설명해주리라. 양반이나 상민 따위, 지배층이나 피지배층 이따위가 없는 세상, 서로를 존중하고 존중받는 세상, 붓쟁이도 땜쟁이도 농사꾼도 선비도 장사꾼도 벼슬아치도 너나들이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을 두고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하는 것임을 가르치리라. 이것이 정치사 그리고 전쟁사의 요약에 불과한 역사를 넘어서는 진짜 살아 있는 역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조선 역사의 주체는 만백성이었음을, 생지옥 같은 최전선에서 최악의 상황을 견뎌낸, 전투 병력의 핵심 또한 백성의 아들이었다는 점도 명백하게 가르칠 것이었다. - 본문 155-156쪽

 

   
'노량의 바다'를 쓴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던 이영남,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선에서 그와 맞짱 떴던 이영남은 열혈남아였다. 찬란한 불꽃이었다. 공중에 튀어 올라서 일격에 적을 베고 찌르는 검법은 피의 굶주림 너머에서 반짝이는 황홀경이었다. 아니다, 그의 칼춤은 백성의 원혼을 모시는 피의 제문(祭文)이었다. 잘못된 욕망을 가진 자들이 써 내려간 거짓의 역사를 깡그리 베어버리고 싶은 저주의 춤사위였다.

전쟁이 끝나면 칼에 묻은 피 냄새를 바닷물로 씻어내고 전주로 돌아가서 농사짓고 싶던 사나이. 이영남은 사람다운 세상을 그리워했다.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가 존중받는 세상, 붓을 매는 사람도 땜쟁이도 농사꾼도 선비도 장사꾼도 벼슬아치도 평등하게- 너나들이로 사는 세상을 그리워했다. 이 소설은 전의이씨(全義李氏) 이영남이 용장(勇將)이었음을 드러냄과 아울러 지식인 이영남의 치열한 내면, 자연인(自然人) 이영남의 인간적 면모에 가깝게 다가간 것이다.

 

소설가 김병용은 “오백여 년 가까이 책갈피 안에 갇혀 있던 청년 이영남을, 책 밖으로 역사 바깥으로 이끌어낸 소설이다. 과거와 현재는 이렇게 한 시인의 붓끝에서 만난다. 거기, 이순신 장군과 함께했던 우리 청년들이 있다. 거친 바다, 더 거칠게 휘몰아치는 외세의 침탈 앞에 젊은 조상들은 生을 던져 우리의 바다를 지켰다.”면서 앞으로 남해를 볼 때마다 이영남, 이순신과 함께했던 수만의 이름들이 떠오를 거라고 평했다.

 

이병초는 소설의 맨 끝에 이영남 외전(外傳)을 붙여놓고 “이 글은 유생들의 상언(上言)이 사실과 다름이 없음을 밝혔다기보다는 역사에 묻힐 수 있는 일을 찾아내어 그 뜻을 넓힌 조선의 선비정신을 받들었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라고 적었다.

외전은 전의이씨(全義李氏) 이영남 장군으로 시야를 좁혀 류성룡의 『징비록』에 기록된 내용 일부와 숙종 조에 우의정을 지낸 만암 이상진의 ‘묘표’ 및 순종 조에 올린 전라도 유생의 ‘도유상언’과 그것에 관계된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에 적힌 기록이며 『이충무공전서』에 언급된 일부 기록, 전라관찰사의 첩보 등을 외전(外傳)으로 삼았다. 역사의 기록이라고 내세우면서도 후대에 여러 번 손을 댄 ‘가리포첨사선생안’과 같은 자료는 역사의 순결성이 훼절된 듯한 인상이 있어 외전에서 다루지 않았다.

총 224쪽에 책값은 1만4천원.  / 조미진 시민기자

 

<본문속으로>

전의인(全義人) 이영남. 혼자서 능히 천 명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무예가 뛰어났고 부하와 백성의 뜻을 떠받들 줄 아는 장수. 그는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이 조선의 실체임을 자각한 선비였고 사람의 결을 간직한 무인이었다. 하지만 왜적 앞에 서면 그는 날랜 범으로 포효했다. 함부로 칼을 뽑지 않지만 일단 칼을 뽑으면 여지없이 적의 숨통을 끊었다.  - 본문 20쪽

 

“장군, 출정해 주시옵소서. 경상우수영의 바다를 지켜주시옵소서!” 

4월 18일에 한양에서 출발하여 23일에 경상우수영에 도착한 이영남. 원균이 육지에서 싸우겠다고 하면서 함선과 무기를 수장(水葬)시킨 뒤 육지로 도망치려고 했을 때 이를 만류하고 이순신과 협력하여 같이 바다에서 싸우자고 역설한 이영남. 그리고는 24일에 이순신을 찾아왔던 것이었다. - 본문 38쪽

 

이영남은 조선 땅의 명문가로 알려진 전의이씨(全義李氏) 집안의 후손이었다. 그의 가문에서는 문과 급제자도 많았지만 무과 급제자도 많았다. 그의 관심은 무(武)에 있었다. 사서오경에 문리(文理)가 트여 한세상을 풍미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기질은 무(武)의 기질이 강했다. - 본문 46쪽

 

이영남은 오늘, 여기 노량의 바다에서 끝을 보리라고 다짐했다. 장쾌한 승리를 백성들에게 꼭 선물하고야 말겠다고 이를 다시 악물었다. - 본문 94쪽

 

그러다가 이순신 장군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서찰을 받았다. 이럴 수는 없었다. 국왕이 이럴 수는 없었다. 아니 조선이란 국가가 이순신 장군을 버릴 수는 없었다. 이영남은 그 즉시 한산도 통제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이 28명 최정예병의 일원이 되어, 한 마리 야수가 되어 더 독한 훈련에 돌입했다. 자신이 모악산에서 수련할 때 입에 거품을 물었을 때처럼 부하들 입에 거품이 물려지기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이 없는 지금 통제영의 군사들의 기세를 더 날카롭게 벼려야 한다는 것이 이영남의 생각이었다. - 본문 106쪽

 

남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하는가라는 반문이 따라올 수 있지만, 이 문제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돌아본다면 별개의 문제였다. 세상이 돌아가는 형세와 양반과 상민으로 나뉜 불평등한 사회의 모순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이런 자신은 캄캄한 불감증 환자에 불과했다. 이영남은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자신의 삶이 절해고도가 되어서는 안 되었고 불감증 환자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안 되는 일이었다. 먹물같이 캄캄한 세상을 캄캄한 먹물로 밝히고 싶었던 선인들의 뜻이 무엇인가를 캐는 데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무예 수련을 핑계로 글줄을 멀리하는 것은 무인의 명예에 먹칠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 본문 137-138쪽

 

잘난 적도 없고 잘나지도 않은 백성의 삶을 정답게 설명해주리라. 양반이나 상민 따위, 지배층이나 피지배층 이따위가 없는 세상, 서로를 존중하고 존중받는 세상, 붓쟁이도 땜쟁이도 농사꾼도 선비도 장사꾼도 벼슬아치도 너나들이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을 두고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하는 것임을 가르치리라. 이것이 정치사 그리고 전쟁사의 요약에 불과한 역사를 넘어서는 진짜 살아 있는 역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조선 역사의 주체는 만백성이었음을, 생지옥 같은 최전선에서 최악의 상황을 견뎌낸, 전투 병력의 핵심 또한 백성의 아들이었다는 점도 명백하게 가르칠 것이었다. - 본문 155-156쪽

 

이영남은 분개했다. 차라리 이 못난 세상의 주인이 되고 싶은 이영남의 진정 속에는 배신감이 짙게 자리하고 있었다. 캄캄한 세상을 먹물로 밝히고자 하는 지식인일수록 지식을 조선의 새 길을 트는데 전력하는 베풂의 등불로 써야 한다는 게 이영남의 주장이었다. 지식인을 자처하는 일부 벼슬아치와 국왕은 지식을 조선의 새 길을 트는 등불로 썼던가. 전쟁이 낌새가 여의치 않으면 국왕과 벼슬아치들은 얼마든지 명나라로 망명하고 싶었던 게 사실이 아니었던가. 이런 국왕을 두고 지나가는 개도 웃었다는 풍문은 사실 풍문이 아니라 사실일 터였다. - 본문 161쪽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눈이 맑아지는 것일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목숨이 몸을 포기해버린 것은 아닐까. 이영남의 눈앞에 아침노을이 붉게 타올랐다. 지난 7년, 이 바다에 수장된 조선 병사들의 원혼이 붉게 타오르는지도 몰랐다. 팔도에서 살육당했던 조선의 혼령들, 자신이 벤 수천 왜군의 혼령들이 이영남의 목숨을 탐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아침노을은 찬란한 것일까. 수천수만의 목숨을 빨아들이고서 찬란해졌다면 그 찬란함은 지워버려야 마땅했다. 그러나 지우고 싶은 욕망이 강할수록 아침노을은 더 찬란하게 타오르던가. 남해의 일출은 빠져 죽어도 좋을 만큼 아름다웠다. - 본문 176쪽

 

<'노량의 바다' 차례>

책머리에 • 11

01 출정出征 • 17

02 전의이씨全義李氏 이영남 • 46

03 적선賊船에 배를 붙여라! • 69

04 새벽어둠이 걷히다 • 80

05 아침노을의 기억 • 108

06 능금빛 노을이 물들 때• 117

07 이영남, 그가 꿈꾸었던 세상• 129

08 바다에 떨어진 겨울 햇살• 157

09 길을 터다오, 바다여 • 170

10 전주의 아침 • 178

11 이영남 외전外傳 • 18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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