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 이병초의 역사소설
7. 이영남, 그가 꿈꾸었던 세상(<3> - 이병초의 '노량(露梁)의 바다'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한, 전의인(全義人) 이영남 장군의 불꽃 같은 삶!
전북포스트  |  jbpost2014@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22.06.21  16:52:21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07. 이영남, 그가 꿈꾸었던 세상

<3>

이영남 장군은 두 아들을 돌아보았다. 내일 아침 자신은 다시 고금도 통제영에 돌아가야 했다. 이 전쟁도 곧 끝날 것이었다. 통제사 이순신 장군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 전략을 짰다. 통제사는 조선의 무인이자 조선의 바른 선비였다. 그러나 자신이 군인이라는 것을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군령을 어긴 이에게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했다.

통제사 이순신 장군은 이영남을 아꼈다. 조카나 자식뻘이 된다고 생각했으므로 자신을 곁에 두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소주라도 한잔하는 날이면 무척이나 살갑게 말을 잇곤 했다.

“이 첨사, 자네도 곧 두 아들과 정답게 살아갈 날이 올걸세.”

통제사는 무엇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건넸는지 모르겠지만 이영남은 그저 마음이 따뜻해질 뿐이었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전쟁은 곧 끝날 터이고 그러면 자신은 군복을 벗고 두 아들과 전주부에 있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이영남은 곤히 잠든 두 아들을 바라보았다. 전주부 구이면, 모악산이 눈앞에 있는 고향집에 돌아가면 자식들에게 제일 먼저 붓과 벼루를 장만해 주리라. 통제사 이순신 장군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모질게 고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만백성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 등등의 모함에 몰려 의금부에서 모질게 고문을 받았다.

이순신 장군의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을 때 군왕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풀어줬다(1597년 4월 1일). 흰옷을 입고 의금부 밖으로 나온 이순신 장군은 다리를 절뚝였다고 한다. 장군은 치료받을 곳을 찾기보다는 당신을 마중 나온 부하에게 “여기 어디에 붓을 매는 노인이 있을 터이니 그를 찾아서 붓 다섯 자루를 매어 오게.”라고 첫입을 떼었다고 한다.

얘기를 전해 들은 이영남은 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다. 기억력을 믿기보다는 기록을 믿어야 한다는 장군의 지론이 만신창이가 된 입장에서도 변함없었단 말인가. 칼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글도 중요하다던, 무인이자 선비이고 영웅이자 성웅인 이순신 장군께 글줄의 중요함도 배웠던 것이었다.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옆구리에 낀 자식들에게 붓과 벼루를 정성껏 마련해 주리라. 글줄의 엄정함과 고결함을 가르치리라.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에 전주를 지켜냈던 황진 장군과 자신의 6촌 형인 이정란의 얘기도 들려줄 것이었다.

왜적이 부산포를 침범한 임진년(1592년 4월 13일) 조선의 육군은 연패당했다. 부산포해전 패배 후 불과 보름여 만에 한양이 점령되었고(5월 2일) 군왕 선조는 몽진길에 나섰다. 당시 조선팔도에서 유일하게 지켜진 땅이 전라도였다. 왜군이 전라도를 제외한 전 지역을 짓밟으며 국왕 선조를 평안도 의주까지 몰아냈어도 전라도 땅은 온전했으므로 조선군 부대에 식량과 물자를 보급할 수 있었다.

임진년 왜군의 수륙병진 작전을 좌절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전라좌수영에서 비롯되었다. 옥포해전으로부터 치르는 해전마다 왜장들은 전라좌수영의 이순신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혀 박살나버렸다. 조선의 남쪽 바다에서 이순신의 수군과 해전을 벌일 때마다 자기 부하들의 피가 바다를 붉게 물들일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었다. 왜장들은 이 원수를 기필코 갚고 싶었다. 또한 전라도를 함락하는 일도 왜군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일본 본토에서 보급이 끊어지다시피 한 왜군의 입장은 전라도를 함락해서 군량미와 소금을 취하는 일이 시급했던 것이다. 왜군의 육군 총사령관인 고바야카와는 병력 1만 5천 명을 이끌고 금산에 진을 쳤다. 전라도를 함락한 후에 육지에서 이순신 장군을 칠 생각이었다. 여수에 주둔해 있는 이순신의 수군, 자신들의 군사가 육지와 바다에서 협공하면 능히 승리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었다.

이것은 왜장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신 꼴이었다. 전주에는 전주수성장이자 의병을 끌어모은 이정란(李廷鸞, 1529~1600)이 있었고 황진(黃鎭, 1550-1593) 장군이 있었다. 왜적이 진안군으로 들어왔을 때 하필 7월 2일에 전주부윤 권수가 병사했다. 전라관찰사 이광은 이정란을 전주수성장에 임명했다. 당시 전주 방어선은 1차 방어선이 웅치였고 2차 방어선은 안덕원, 3차 방어선은 전주성이었으며 최후의 방어선은 남고산성이었다. 이광은 남고산성에 주둔하면서 총지휘를 하고 있었다.

총지휘부에서는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경기전에 있는 태조의 어진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 당시 경기전에는 참봉 오희길이 있어 책임자가 있었지만, 실록을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이광 등은 처음에는 사고의 바닥에 땅을 파고 묻으려고 하였으나, 성주에서 땅에 묻었던 사고를 일본군들이 가지고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른 곳으로 옮기고자 한 것이다.

태인 출신의 일재 이항의 제자 안의와 손홍록이 자원하였다. 이들은 나이가 많아서 의병으로 참전하기가 어렵게 되자 노비를 의병으로 보내고 실록을 옮기는 일에 자원한 것이었다. 이들은 말과 소 등과 노비들을 동원하여 실록과 태조의 어진을 정읍 내장산에 있는 용굴암으로 옮겼다. 성주, 충주, 춘추관에 있던 실록이 불타서 없어졌어도 전주 사고에 있던 실록은 남겨질 수 있었다.

전주를 수성하려는 조선군 입장에서는 대둔산과 운장산 사이에 있는 이치를 지켜내야 했고, 마이산과 운장산 사이에 있는 웅치도 지켜내야 했다. 이치와 웅치가 전주성을 함락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적장 고바야카와가 모를 리 없었다. 고바야카와는 부장 안코쿠지에게 웅치를 먼저 치라고 명령했다.

7월 7일 안코쿠지는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웅치를 공격했다. 전라관찰사 이광은 김제군수 정담과 나주목사 이복남, 의병장 황박에게 웅치를 지키게 했다. 의병과 합세한 병사들은 용맹했다. 상주 전투와 탄금대 전투, 용인 전투에서 조선 육군은 제대로 진영도 못 갖추고 일본군에 패퇴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웅치에 운집한 조선군은 이와 달랐다. 용맹 무쌍했다. 전혀 두려움이 없었고 물러섬이 없었다. 왜군과 벌인 용인 전투(1592년 6월 6일)에서 패퇴한 패잔병이었지만 이들에게는 그때 전투 경험이 생김과 동시에 전략적 용의주도함까지 갖춰진 것이었다. 깡다구가 생긴 것이었다. 그러므로 일본군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언제부터 조선군이 이처럼 강했단 말인가. 7월 7일 일본군은 퇴각했다.

7월 8일 새벽 왜군은 다시 총공격을 감행했다. 이날 조선군 1진의 황박, 2진의 이복남이 힘껏 싸웠으나 물밀 듯이 몰려드는 일본군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결국 황박이 2진으로 물러나고, 이복남도 웅치의 정상으로 물러났다. 웅치의 정상에는 김제군수 정담이 있었다. 정담이 치열하게 왜군과 싸우기 시작하였다. 중과부적이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물러선다면 부상병들과 함께 후퇴하고 있는 조선군에 왜군이 들이칠 것이었다. 후퇴하는 조선군이 안전거리까지 이동할 시간을 벌어주어야 했다. 나머지 조선군은 2차 방어선인 안덕원으로 이동하였다. 정담은 싸움에 나서기 전에 옷깃에 자기의 이름을 실로 떠 두었다. 머리가 없어져도 얼굴이 무너져도 옷에 뜬 이름을 보고 시신이라고 찾아가라는 뜻이었다.

웅치 정상은 외길이었다. 양쪽은 절벽이기 때문에 겨우 한두 사람이 통과할 정도에 불과하다. 이 길의 중앙 우뚝 솟은 바위가 있고, 이 바위를 돌아야 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정담은 이 바위를 통과하는 적들에게 화살을 날렸다. 이 과정에서 백마를 탄 왜군 장수를 죽였다. 선봉장 중의 하나였다. 후에 사람들은 이 바위를 왜장바위라고 불렀다. 왜군이 전주성을 공격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 장수의 죽음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화살이 떨어졌다. 칼로 일본군을 막기 시작하였다. 후퇴는 안 한다,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정담의 피가 바위에 스며들었다.

조선군은 패배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왜군들에게까지 감동을 주었다. 전사한 조선 병사의 시신을 모아서 무덤을 만들고 “조 조선국충의간담(弔 朝鮮國忠義肝膽)”이라는 즉 조선국의 충의지사를 기린다는 팻말까지 세웠다. 왜군은 조선군의 2차 방어선이 펼쳐진 안덕원의 바로 앞 소양평에 진을 쳤다. 담암사에 있는 미륵불이 안개를 자욱하게 끼게 했는지 왜군의 진격은 더뎠지만 결국 전주성이 목전인 안덕원에 진을 쳤다. 전주성은 풍전등화였다. 이때 나타난 이가 동복현감 황진이었다.

처음 웅치에 배치되어 활동하던 황진은 일본군의 전초군 등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며 일본군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이때 일본군이 전주가 아닌 남원 방향으로 이동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에 전라관찰사 이광은 황진을 남원으로 내려보내어 남원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전주수성장 이정란은 의병을 거느리고 전주성에 횃불을 밝혔다. 성에 군사가 많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위장술이었다. 전의이씨 이정란, 나이가 예순을 넘겼어도 그의 눈빛은 형형했다. 선조 1년(156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교서정자·저작박사를 거쳐 성균관전적을 지냈고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승효(承孝)였으며 이영남의 6촌 형이었다. 문관이었음에도 병법에 밝아서 전주성을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남원으로 출병했던 황진은 이광의 명령으로 부랴부랴 올라와 안덕원 방어선에 합류했다. 전주에서 진안을 갈 때에는 안덕원〔현재 전주시 산정동〕을 거쳐 소양천을 길게 지난 뒤 웅치를 넘어서 갔다. 진안에서 올 때도 반드시 안덕원을 지나야만 하였다. 소양에서 전주로 올 때 나뭇짐을 실은 소들도 한 번에 넘지 못하고 중간에 쉬어야만 넘을 수 있는 가파른 길이었다. 황진은 안덕원 높은 곳에서 일본군의 이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코쿠지는 안덕원에서 전주성을 치기 위해 군사들을 쉬게 했다. 황진은 기습작전을 세웠다. 웅치 전투에서 지칠 대로 지친 왜적들이 잠들어 있던 새벽, 황진의 군대는 안코쿠지의 본영을 습격했다. 왜적의 피가 그리운 조선군의 칼날은 눈부시게 빨랐다. 왜적을 베고 찌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도망가는 왜구를 향하는 화살은 정확했다. 이날 새벽에 왜군은 궤멸당했다. 왜군의 전사자만 3천 명이었고 안코쿠지는 후퇴했다. 임진년에 조선의 육군이 왜군의 본영을 쳐서 궤멸시킨 장쾌한 전투, 조선 육군이 승리를 제대로 거머쥔 첫 번째 전투가 이 웅치 전투에 속했던 전주의 안덕원 전투였다.

웅치에서 전투가 벌어졌던 이 날, 이영남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견내량으로 출정했고 한산도에서 학익진의 한 축을 담당하여 왜수군을 격파하였다. 왜수군의 선봉장은 와키자카 야스하루였다. 그는 1592년 6월 6일 용인에서 1,600명의 병력으로 조선군 6만 명을 물리친 장수였다. 조선군의 입장에서는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치욕적인 전투였지만 용인 전투의 승리로 와키자카는 왜군의 떠오르는 샛별이 되었다. 그러나 와키자카는 한산도에서 패퇴했다. 전투선 73척 중 59척이 수장당했고 부하 8,900명이 몰살당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산해전의 패퇴 소식을 듣고 수륙병진 작전을 포기함과 아울러 조선 수군과의 전투를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날 자신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한산도에서 왜군을 격퇴했고 이정란, 황진 등은 웅치와 안덕원에서 왜군을 막아내어 전라도를 지켜냈던 것이다.

전주성을 지켜낸 황진은 이치로 내달았다. 거기엔 권율 장군이 있었다. 고바야카와는 1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이치로 공격할 것이었다. 황진 옆에는 공시억, 위대기 등등의 뛰어난 부하가 뒤를 받치고 있었다. 8월 17일 왜적이 이치 고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의 병사들은 활로 조총과 맞서는 방법을 알아냈다. 조총부대 1선이 빵 총을 쏘고 뒤로 물러나고 2선이 총을 쏘려고 준비할 때 시간의 틈이 있음을 안 것이었다. 조총부대 2선이 미처 총을 쏘기 전에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조선의 사수들이 시간 간격을 타고 일제히 화살을 날려버림으로써 조총 사수들의 목숨을 거둬버린 것이었다.

왜군의 수는 1만 병력이었다. 제 동지들의 시체를 밝고 뛰어넘어서 저들 특유의 백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황진과 그의 부장들과 용맹스러운 병사들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목책을 뛰어넘어 고개로 치닫는 왜적들을 바람같이 내달아 숨통을 끊어버린 것이었다. 황진 장군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의 활은 백발백중이었고 말을 타고 적진에 내달아 왜적의 목을 베는 데에도 탁월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백병전과 궁수들의 화살이 난무하는 종일의 전투에서 조선군은 마침내 승리했다. 장수와 군사가 한몸이 되었을 때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 승리로 전라도가 지켜졌으며, 이 승리로 여수에 주둔해 있는 이순신 장군의 수군이 온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승전의 상황과 조헌 등 의병장들의 죽음의 상황은 곧바로 전라좌수영에도 전달되었다. 소식이 전달될 때마다 조선군은 기뻐하고 슬퍼하였다. 이치에서 전투가 있고 7주야 정도 지난 뒤 8월 24일 이순신 함대는 출정하였다. 28일에 사량에서 원균의 함대와 합류한 이순신 장군은 9월 1일에 부산포를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왜선 430척과 싸워 100여 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도 이영남은 참전하였다.

전주성의 전투에 참여했었다는 듯 이영남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권율 도원수와 친분이 깊었던 이순신 장군 덕에 전주부에서 일어났던 일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영남은 이 승리를 아들들에게 들려줄 것이었다. 황진 장군의 눈부신 활약도 빼놓지 않을 것이었다. 그 뒤에 있었던 수원성 전투에서 왜적에 포위당했을 때도 그는 혼자 이틀간 고군분투로 싸웠고 마침내 왜적의 말을 빼앗아서 본대로 귀환한 것이었다. 1593년 6월 22일 왜적은 진주성을 공격했다. 1년 전에 불과 3,800명의 조선군에게 2만 병력을 잃었던 기억을 씻어내기 위함이었을까. 왜적은 무려 10만의 병력이었다. 조선의 명장 권율, 곽재우, 선거이, 홍계남 등 다른 장수들과 명나라 군대조차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 물러나고 말았다.

황진 장군은 물러나지 않았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조선군은 전투가 벌어진 뒤 7일째까지 진주성을 굳게 지켰다. 8일째가 되는 날 황진 장군은 시체 더미 속에 숨어 있던 왜적에게 조총을 맞았다. 저격당한 것이었다. 황진 장군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진주성은 8일째에 왜적에 함락되었다. 조선의 명장들이 모두 포기한 전투, 그러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어서 그 전투에 참여했고 끝내 전사한 황진 장군. 사람이 다른 생명체와 다른 이유는 약속을 저버리는 고깃덩어리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다.

이영남은 황진 장군의 사람됨을 다섯 아들에게 알려줄 터였다. 아들들을 구이면 두현리 남계정(南溪亭)으로도 이끌 것이었다. 자신이 남계 김진(金瑱) 어른께 예학을 배운 곳이기도 하지만 자식들에게 들려줄 얘기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김진 어른과 가까운 혈육이었던 형조좌랑 김빙(金憑)이라는 지식인을 소개해주기 위함이었다. 김빙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인물이 정여립이었다. 이영남은 기축옥사(己丑獄事)에 해당하는 3년 동안의 참혹한 사실을 들추고자 함이 아니었다. 불행했던 지식인 정여립을 두둔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김빙을 통해 지식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차분하게 일러주기 위함이었다.

전주부 구이면 두현리에 살았던 통천김씨 김빙(金憑)은 1580년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기축옥사 당시 형조좌랑직(刑曹佐郎職)에 있었다. 정여립은 전주부 색장동 사람이고 김빙은 색장동 산 너머에 있는 두현리 사람이니 어려서부터 이들은 서로에게 친절했다. 둘은 조정에 출사까지 했으니 두 사람의 관계가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돈독했을 것이었다.

대동계를 박살내기보다는 동인 집단을 쳐내고 싶었던 군왕 선조와 서슬이 퍼런 위관 정철은 정여립의 시신을 한양까지 싣고 와서 그의 사지를 찢는 육시형을 명했다. 형을 집행하는 자리에 문무백관을 서게 함으로써 반역의 끝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직접 보라고 강요했다. 그에 앞서 조정에서는 소금에 절여져 거적때기에 둘둘 말려온 정여립의 시신(屍身)이 정말 정여립이 맞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전주 사람을 불러서 확인하게 했다. 형조좌랑 김빙도 이 불림을 받았다.

정여립의 시신을 확인하려고 다가섰을 때 마침맞게 바람이 불었다. 김빙은 풍루증을 앓고 있었는데, 즉 바람이 불어오면 눈물이 흐르는 지병이 있었는데 마침 바람이 불어와 김빙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헌납(사간원의 정5품 관직)이었던 백유함이 이 모습을 보고 “김빙이 역적을 보고 슬피 울었다.”라는 보고를 했고 김빙은 의금부에 잡혀 와 장형을 맞는 도중에 사망하고 말았다고들 했다.

풍루증과 관계된 김빙의 죽음은 왜곡이었다. 위관 정철과 그의 휘하 관료들이 얼마나 무뢰배이며 살인자들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지어낸 얘기였다. 서인이었던 정철 일파의 극악무도함을 겨냥한 얘기일지라도 결국 풍루증 얘기는 김빙이라는 지식인을 모독하는 얘기였다. 김빙과 어려서부터 친분이 있었던 사람의 시신, 고향의 3년 선배 정여립의 시신. 평등 세상을 꿈꾸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대동계를 조직했지만 그것과 역모는 아무 관계가 없었던 혁명가의 시신. 평등 세상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 앞에 섰을 정여립도 억장이 막혔겠지만, 소금에 절여진 시신이 고향의 선배 정여립이 맞는가를 확인해야 하는 지식인 김빙의 억장은 더 막혔을 것이었다.

정여립을 익히 아는 관료들은 시신을 보고 정여립〔자는 인백(仁伯), 호는 죽도(竹島)〕이 확실하다는 얘기만 했다고 들었다. 이런 사실을 김빙이 몰랐을 리 없었다. 역적으로 내몰려 죽임을 당한 그에게 감정적 동요를 보인다면 자신에게도 역모죄가 씌워질 수 있다는 것도 김빙이 몰랐을 리 없었다. 그러나 김빙은 달랐다. 정여립의 시신을 보고

“아,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인백 형, 인백 형이 어쩌다 이렇게 되고 말았는가.”

고향 선배의 싸늘한 주검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자신과 생각이 같지 않았어도 진심으로 지인의 죽음을 슬퍼했다. 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한 지식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풍루증을 앓는다는 김빙의 모습이 아니었다. 김빙의 슬픔은 단지 개인의 슬픔으로 치부될만한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군왕 선조의 눈치를 봐야 했고, 위관 정철의 칼날도 피해야 했던- 그러므로 정여립의 시신을 더 싸늘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고, 그가 꿈꾸었던 세상을 폄하할 수밖에 없었던 지식인의 한계를 대변하는 슬픔이었다.

헌납 백유함이 자신의 언행을 어떻게 보고할지 빤히 알고 있었을 형조좌랑 김빙. 얼굴이 푸르딩딩한, 고향 선배의 죽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동인과 서인이라는 당파를 팽개치듯 주저함 없이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인 언행은 지식인이란 낯부끄러움을 씻어내는 중인지도 몰랐다.

김빙의 눈물은 한 개인의 순정한 눈물이자 지식인의 한계를 절감하는 눈물이었고 불행한 시대를 뛰어넘지 못한 절망의 눈물이자 목숨이 천형임을 확인하는 눈물이었다. 이런 감정이 뒤섞여져서 한꺼번에 북받쳐 나온 눈물은 차라리 통곡이었다. 자신의 언행이 어떤 사태를 불러올 것인지를 가늠할 수 없는 엄중한 상황에서도 솔직하고 담대했을 김빙의 눈물.

억울한 죽음 앞에서, 육시형을 당하는 주검 앞에서조차 정치적 실세들에게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던 지식인의 한계. 목숨은 정녕 천벌인가. 조선에서 목숨 붙이고 산다는 것은 지식인의 자존심까지 팽개쳐야 한다는 말인가. 얼마든지 비루해져도 좋은 게 지식인의 목숨인가. 옳고 그름을 냉철하게 판단할 줄 아는 조선의 천재들, 그들의 옹색해진 자리가 더 서글펐는지도 몰랐다.

이영남은 김빙이라는 지식인의 일화를 통해 자식들에게 삶의 의로움을 말해줄 것이었다. 지식인이 어떤 존재이며 왜 우리가 사람인지, 사람의 참다운 삶이 어떤 것인가를 깨우쳐 줄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 모두가 아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이 왜 평등인가를 매우 느리게 설명하면서 비빔밥처럼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평등한 진리, 대동 세상은 멀리 있지 않음을 가르칠 것이었다. 여기에 성리학이라는 학문은 결코 기득권 세력의 정치적 생명력을 연장하거나 그들의 경제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가 아님을 먼저 분명히 할 터였다.

만백성의 입장에서 잘된 것과 잘못된 것을 가려서 언행을 삼가되 그 행정적 실천이 왕족과 일부 양반의 영광에 초점이 맞춰진 게 아니라 만백성의 안위에 초점이 맞춰진 것임을, 이런 자세가 문무를 수련한 지식인의 태도라는 것도 놓치지 않을 것이었다. 어른으로서 그리고 아비로서 부끄러운 역사는 부끄러웠다고 고백할 수 있을 때 그가 아비와 어른으로서 대접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되며 그 행위가 왜 인간의 도리인지도 밝힐 것이었다.

입만 열면 사회와 역사의 진정한 발전을 논하면서도 이를 실천에 옮기려 할 때 기꺼이 빠지는 지식인, 부끄러운 역사를 반성하지 않는 지식인은 결국 허무주의의 늪에 빠질 뿐이라고 자신 있게 가르칠 것이었다. 성리학을 앞세워 제 잇속의 노예가 되는 불행한 일이 더는 생기지 않도록 야물게 가르칠 것이었다.

잘난 적도 없고 잘나지도 않은 백성의 삶을 정답게 설명해주리라. 양반이나 상민 따위, 지배층이나 피지배층 이따위가 없는 세상, 서로를 존중하고 존중받는 세상, 붓쟁이도 땜쟁이도 농사꾼도 선비도 장사꾼도 벼슬아치도 너나들이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을 두고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하는 것임을 가르치리라. 이것이 정치사 그리고 전쟁사의 요약에 불과한 역사를 넘어서는 진짜 살아 있는 역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조선 역사의 승리 주체는 만백성이었음을, 생지옥 같은 최전선에서 최악의 상황을 견뎌낸, 전투 병력의 핵심 또한 만백성이었다는 점도 명백하게 가르칠 것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글쓴이 /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전북포스트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560-022)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성당길 13. 호운빌딩 3층  |  대표전화 : 063)231-6502  |  등록번호 : 전라북도 아 00076  |  발행인·편집인 : 강찬구
등록 및 발행일 : 2014년 8월 7일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현영
Copyright © 2022 전북포스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