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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영남, 그가 꿈꾸었던 세상(<2> - 이병초의 '노량(露梁)의 바다'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한, 전의인(全義人) 이영남 장군의 불꽃 같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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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6.20  17:2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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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이영남, 그가 꿈꾸었던 세상

<2>

영남은 짬이 나면 김 씨가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초가에 들렀다. 임진년, 그러니까 1592년 여름에 영남은 순옥을 만났고 아들 둘을 얻었다. 집에 들어오면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어떤 일에든 선봉에 서서 일기당천(一騎當千)의 용맹무쌍을 몸소 보여줘야 한다는 것과 왜선의 침략 노선을 예측하면서 짜는 전투전략은 긴장과 긴장의 연속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그도 사람이기 때문에 피곤했다. 여인의 품이 그리웠다. 누가 보더라도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똘똘 뭉쳐진 사나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불패의 장수가 이영남이었다. 하지만 김 씨 품에 안길 때면 이런 긴장이 눈 녹듯 사라졌다. 김 씨 품에서는 따뜻한 피가 끓었다. 무럭무럭 크는 의길, 득실 두 아이의 재롱은 산천초목도 덜덜 떨게 한다는 천하의 이영남을 몽근불처럼 정감 있는 아버지, 살가운 아버지로 돌아오게 했다.

전쟁이 끝나면 두 아들과 함께 전주부 구이면으로 돌아가리라. 서자나 얼자 따위의 깡마른 관념을 팽개치고 둘째 부인 태인허씨와 순옥과 함께 다섯 아들을 당당하게 키우리라. 영남은 자식들에게 승암산을 굽이돌며 퍼렇게 물결이 이는 한벽루의 풍정을 제일 먼저 보여줄 생각이었다. 승암산 옆구리에 박힌 바위들을 의지한 한벽당 앞에 서면, 저 멀리 슬치재에서 발원한 물이 고덕산에서 쏟아진 물과 합해져 소쿠라지고, 맨몸끼리 뒤엉켜 휘감기는 물길들을 어쩌지 못하고 남고산이 헛감시나하며 늘어뜨리는 낙낙한 그늘 속에서는 오모가리 속 전주 팔미의 하나인 모래무지매운탕이 다갈다갈 끓고 있을 것이었다. 한벽당 발밑은 사계절을 이끼 낄 새 없이 맑디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굴뚝새 소리가 정답게 들리는 저녁 무렵이면 한벽당 기와가 노을빛 구름을 빨아들일 것이로되, 그렇게 먹물이 마를 새 없이 그려지는 진경산수화를 전주천은 끝없이 만경강으로 실어 나를 것이었다.

그런 설명이 끝나면 배가 고플 터, 아들들을 초록바위 아래 남밖장(남문 밖에 장이 선다고 해서 남부시장을 예전엔 남밖장이라고 불렀다.)으로 데려갈 것이었다. 싸전다리를 지나자마자 흥정하느라고 떠들썩한 장의 풍경을 구경하게 하리라. 그리고 거기 아무 밥집에나 들어가서 갓 뜯어온 푸성귀와 고사리나물이며 취나물과 참기름이 한데 어우러진 비빔밥을 달게 먹이리라. 천하에 평등한 것이 밥인데 어째서 임금이 먹으면 수라이고, 양반이 먹으면 진지이며, 하인이 먹으면 입시인지를 설명하면서 밥과 나물과 푸성귀가 어우러진 비빔밥의 평등과 상하 구별 없이 너나들이로 퍼먹는 밥의 평등을 자식들에게 수저처럼 쥐어줄 것이었다.

이뿐이랴. 한갓진 날을 잡아서 봉상천〔현재 완주군 봉동읍, 용진면〕의 압대산(鴨垈山) 앞으로 다섯 아들을 데려가리라. 동포귀범(東浦歸帆)이라고 했던가. 동포는 봉상의 장기리, 신기리와 마그내 다리 부근을 가리킨다. 마그내 선창인 만가리천에 들어오는 소금배, 젓가리배, 시탄(柴炭)배, 생강배, 곡식배 등의 행렬이 이어지는 진풍경을 보여주리라. 만경강을 따라서 황돛배가 들어오는 모습은 한 폭의 산수화 같을 것이었다. 고산천에 배를 둥둥 띄워 봉상천으로 내달으며 이 물길이 한내다리에서 전주천과 합세하여 만경강이 된다는 설명을 덧붙일 것이었다. 물길 옆으로 드넓게 펼쳐진 논밭으로 가랑가랑 물길을 내준 마음씨 어진 봉상천, 그래서 봉상천을 냇가랑이라고도 한다는 말을 가르쳐주되 더 짬이 나면 삼례의 비비정이나 전주가 만년 도읍임을 상징한다는 완산칠봉과 송광사 너머에 있는 위봉폭포로 데려가서 몸과 마음이 배워야 할 첫 번째가 자연임을 가르치리라.

마한과 백제와 후백제의 역사도 말해줄 것이었다. 김유신 김춘추 부대에 무자비하게 짓밟힘과 동시에 당대의 서적이 모두 불태워져서 한민족 오천 년 역사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는 저수지, 김제의 벽골제(碧骨堤)가 어느 시대 것인지조차 모르는 답답함도 토로할 것이었다. 백제의 11대 비류왕 27년(330)에 축조된 저수지라는 설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한의 역사가 빠진 설에 불과할 뿐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식량과 무기의 공급처 역할을 맡았던 전라도. 이순신 장군은 1593년에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라는 문장을 썼다. 전라도가 없다면 조선이 없다는 뜻이었다.

조선팔도에서 조정에 세금을 제일 많이 바치는 풍요로운 고장이 전라도이며 이것을 총괄하는 전라감영 즉 관찰사가 상주하는 곳도 전주에 있음도 알려줄 것이었다. 전주가 포함된 백제권의 경제영역이 중국 산동이나 상해는 물론 필리핀과 일본에까지 미쳤음도 역사적 근거를 들어 설명해 줄 것이었다. 세계관은 삶의 형체를 구체화하는 데 소용되는 정신적 자산이니 되도록 유적지를 자주 데려가리라. 산과 바다와 들판- 유무형의 것들과 대화하는 사색의 시간을 가지게 하리라. 그러함으로써 자식들이 발 딛고 선 곳이 어디든 조선과 세계 역사의 한복판임을 깨치게 해주리라. 이것이 아버지 된 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이영남은 생각했다.

구이면에 있는 모악산(母岳山)에도 데려갈 것이었다. 자신이 모악산인(母岳山人) 김철을 스승으로 모시고 무예를 연마하던 곳. 대원사와 수왕사에도 데려가서 불심(佛心)의 역사를 설명할 것이로되 그 먼저 모악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가슴을 활짝 펴게 해줄 것이었다. 모태정을 지나 남릉과 신선바위를 거쳐 남봉, 그리고 꼭대기에 도착할 수 있는 산길로도 데려가리라. 이 산길을 오르다 만나는 꽃들이며 식물들을 자세히 설명하리라. 노란 여우팥이며 뻐꾹나리며 노랑원추리, 하늘타리며 서어나무며 주름조개풀도 가르쳐주리라.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바람 소리며 산새 소리를 오래 들려주고 계곡물에 발을 담그게도 해주면서 걸음을 재촉하지 않으리라.

자신이 피땀 흘리며 무예를 수련했던 대원사 아래, 오른쪽으로 굽이굽이 들어가면 문득 펑퍼짐한 곳으로 발길을 옮길 것이었다. 갈대로 지붕을 이었던 움막, 뼈마디 쑤시는 고통을 함께 나눴던 움막이 없어진 것처럼 이미 종적을 감춘 모악산인 김철 스승님. 그분이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해주신 분이라는 점을 다섯 아들에게 일러줄 것이었다. 사람이 다른 생명체와 달리 사람인 것은 가르침 즉 교육이 있기 때문이었음을 차근차근 말해갈 것이었다. 그리고 사서오경을 줄줄 꿰어 이름 높은 선비가 되는 것도 무예를 익혀 고수가 된다는 것도 모두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임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리라.

스승님의 가르침 중 군자불기(君子不器)가 있었다.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그릇은 고정된 형태가 있어 고정된 틀로만 생활하는 것이다. 군자는 그릇처럼 고정된 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가지 재능에만 얽매이지 않고 두루 살피고 원만해야 한다.

노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설했으니 가장 좋은 선은 물과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물은 네모를 만나면 네모지고, 세모를 만나면 세모지고, 막히면 채우고 채워지면 흐르는 것이다. 가장 낮은 바다를 향해서. 한순간도 쉼 없이 흘러가 가장 낮은 곳을 채우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 저 높은 어느 산야에서 다시 내려와 또다시 쉼 없이 흘러서 내려가는 것, 이것이 물이다.

도가도는 비상도요 명가명은 비상명이라. 이미 하나의 이름이 지어지면 그 이름이라는 틀에 박혀 다른 것은 돌아보지 못하는 그릇과 같은 존재를 두고 군자라고 하지 않는다. 두리뭉실하니 너나들이 살아가는 이것이 삶이리라.”

영남은 자식들에게 이 뜻을 오래오래 설명해 줄 것이었다.

자신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모악산인(母岳山人)을 만나 무예를 익혔다. 왜 사람은 글과 무예를 익혀야 하는지를 서서히 깨달아가던 시기였다. 무예 수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열네 살 때던가. 이영남은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칼이나 호랑이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것을. 나이가 차차 들어감에 따라 이 생각은 굳어졌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는다면 이런 자의 삶은 절해고도(絶海孤島)와 다름이 없었다.

남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하는가라는 반문이 따라올 수 있지만, 이 문제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돌아본다면 별개의 문제였다. 세상이 돌아가는 형세와 양반과 상민으로 나뉜 불평등한 사회의 모순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이런 자신은 캄캄한 불감증 환자에 불과했다. 이영남은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자신의 삶이 절해고도가 되어서는 안 되었고 불감증 환자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안 되는 일이었다. 왜 만백성의 뜻이 곧 하늘인가를, 만백성의 뜻을 저버리는 행위가 왜 역사에 큰 죄를 짓는 것인가를, 먹물같이 캄캄한 세상을 캄캄한 먹물로 밝히고 싶었던 선인들의 뜻이 무엇인가를 캐는 데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무예 수련을 핑계로 글줄을 멀리하는 것은 무인의 명예에 먹칠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치사와 전쟁사를 요약한 역사, 당쟁과 사화 그리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해자 누명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오천 년의 역사에 백성의 곤고했던 생활사(生活史)는 빠져 있었다. 역사 기록에 원칙이 있을지라도, 특이하고 이상하고 변화하는 것을 기록하는 게 역사일지라도 음식과 의복과 집의 형태와 거기에 구체적으로 깃든 백성들 삶의 형태를 외면한 역사는 반토막짜리 역사였다. 기득권층을 옹호하는 변명에 불과한 역사였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사람을 하늘처럼 대하는, 모두가 서로 존중하고 서로 배려하고 사랑할 줄 아는 조선 백성의 품성에 다가서는 진짜 역사는 어디에 있는 것이냐.

때를 알아서 논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모내기하는, 김을 매고 베를 짜고 염천을 견디고 난 뒤에 곡식을 거두는 일- 거기에 목숨을 바치다시피 했던 만백성의 역사.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한민족 오천 년의 역사가 면면히 이어졌을 리 없었다. 조선의 역사에 지식인의 천재적인 역량이 보태어졌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백성이 피땀으로 일궈낸 역사이므로 오천 년의 역사 어디에서든 백성의 생활사가 빠져서는 안 되었다. 양반층에 함부로 무시당하고 멸시당했지만, 헐벗고 굶주린 조선 백성의 피눈물이 어째서 조선 역사 발전의 주체가 되었는가를 분명하게 짚어줄 글줄은 어디에 있는가. 차라리 저 논밭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의 몸에 무형의 글줄로 배어 있는가. 당시 이영남은 앎에 허기가 졌다.

자신은 피할 수 없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양반가의 자손이었다. 18세에 무과에 급제했고 임진년 당시 여러 해전에서 승리한 뒤 이순신 장군의 조방장이 되었으며 산함직이었을지언정 가덕진 첨사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이영남은 집안 얘기를 뻥끗도 하지 않았다. 집안을 따져봤자 왜적에게 국토를 내준 조선의 형세는 달라질 게 없었고, 왜적에게 무차별 도륙당했던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오늘이었다. 군량미가 필요했고 병사들에게 입힐 베가 필요했으며 병장기를 제작할 쇠와 판옥선을 건조할 재목과 인력과 기술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은 집안도 있었지만 잘난 양반 집안에서 이런 것들을 쉽게 내줄 리 없었다. 선비 출신의 의병장들과 일부 양반들을 제외하면 전쟁이 터지자마자 제일 먼저 피난 보따리를 꾸린 치들이 양반네였다. 그러므로 전쟁에 필요한, 각 군영(軍營)에 필요한 거의의 보급품들이 백성들의 품에서 나왔고 백성들 손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장수가 이영남이었다. 총알과 화살이 빗발치는 최전선에서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산화(散華)했던 병사들의 대부분은 평민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이영남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출신을 따지지 않고 실력 좋은 병사를 권관으로 추천했다.

양반과 상민으로 딱 갈라놓은 제도, 기술을 경시하는 풍조가 조선을 이 지경으로 몰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가를 통치할 능력도 없는데 왕위를 대대로 물려받듯이 쥐뿔도 모르는 것들이 양반을 대물림받아서 사회에 떵떵거리는 말도 안 되는 이치를 도대체 누가 만들어냈는지 생각할수록 기가 찰 노릇이었다. 농기구를 만들고 화살촉과 칼과 창을 만들고 포를 만드는 기술이 왜 천대받아야 하는지는 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임진년 이후 명량해전에 이르기까지 백성의 도움은 결정적이었다. 백성이 없었다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투였다. 이 전쟁에 참여한 9할이 백성이기 때문이었다. 이영남은 백성이고자 했다. 최전선에서 이름도 빛깔도 없이 전사한, 떼죽음당한 병졸들의 핏방울이고자 했다.

이런 삶의 방식 밑바탕에는 모악산인 김철이 있었다. 사람이 언제부터 양반과 상민으로 구별되었냐는 듯 평등하게 병사를 대하는 이영남의 행위 밑바탕에는 스승인 모악산인의 가르침이 깔려 있었다. 볼에 와닿는 따뜻한 바람을 기꺼워하듯 사람을 대함에 차별이 없었고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를 아꼈으며 짐승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않았던 스승님. 햇살이 만물을 차별하지 않고 온기를 나눠주듯이 지식인의 언행도 이와 같아야 할 것이라면서, 무시당하고 멸시받는 백성이 조선의 주인이라는 가르침이 오늘의 이영남을 있게 한 것이었다.

자신이 직속상관으로 모시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평소에는 누가 봐도 말수 적고 마음씨 어진 선비의 모습이었다. 원체 말씀이 적은 분이셨지만 행동도 늘 무거웠다. 전략회의를 할 때도 자신의 말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휘하 장수들의 의견을 충실하게 들었다. 통제사가 장수들의 의견을 떠받들다시피 했다고 적어야 옳을 지경이었다. 이런 통제사였으므로 휘하 장수들은 전략회의에 전심전력을 다했고 전략회의에 빠짐이 없었으며 결론 지어진 그의 말을 따랐다. 주도면밀한 전략과 전술 없이는 어떤 전투에서도 이길 수 없음을 장수들은 확인했으므로 조선 수군은 항상 만약을 대비했고 어떤 전장(戰場)에서도 패하지 않았다.

부하들이 자신의 명령을 하늘처럼 받들었다는 것은 먼저 이순신 장군이 부하들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다는 말일 수 있었다. 주선 수군의 1차 출정이었던 옥포에서 승리했을 때 조선 수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2차 출정을 해서 왜수군의 군함 67척을 침몰시키고 왜수군 9천여 명을 수장시켰을 때 조선 수군에도 피해가 있었다. 13명의 병사가 전시한 것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13명의 시신을 거두어 나룻배에 각각 태우고 사공을 붙여서 고향의 유족에게 인계한 뒤 장사를 지낼 수 있는 경비까지 마련해 주었다. 말로만 부하들을 아끼고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일개 병사의 사후까지 책임지는 언행일치를 실천함으로써 부하들에게 신실함을 얻었고 장군 또한 부하들의 신실함을 얻은 것이었다. 이것이 지휘관이 갖춰야 할 첫 번째 조건이며 이러함으로써 전투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터 닦음이 된다는 것이 이순신 장군의 신조였다. 어떤 일에든 자신의 잇속을 버릴 때 사람을 얻는 법이며 서로를 믿고 아끼는 사람- 그것보다 더 큰 재산은 없다고도 했다. 통제사 이순신은 사람을 씀에 귀천을 따지지 않았고 전략회의를 할 때도 병졸의 의견조차 무시하지 않았다. 일개 병사의 의견일지라도 승리에 도움이 된다면 그 뜻을 좇는 것이 바른 이치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글쓴이 /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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