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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침 노을의 기억<1-2> - 이병초의 '노량(露梁)의 바다'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한, 전의인(全義人) 이영남 장군의 불꽃 같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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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5.28  11:3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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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량해전 승리 후 고화도에 통제영을 두었을 때 병사들이 더 많이 모여들었다. 산으로 피난을 갔던 백성들도 모여들었다. 13척이던 판옥선은 50여 척이 되었고 수군도 4000명이나 증강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통제영을 고금도(현재 완도)로 옮겼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과 병사는 정말이지 구름떼같이 모여들었다. 명량해전의 승리를 발판삼은 고금도 통제영에는 수군이 8,000명으로 늘어났으며 판옥선도 80여 척으로 불어났으며 군량미 또한 1만 섬을 확보한 상태가 되었다. 
  한산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을 두었을 때보다 판옥선 수는 적었지만 물자나 병력은 오히려 풍족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명량해전의 승리가 결정적이었다. 이순신 장군 옆에 있으면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조선 수군은 장군과 병사만이 아니었다. 통제영 근처에 몰려든 엄청난 백성들 그들도 조선의 수군이었다. 기적이었다. 중과부적의 숫자로 적을 물리친 것만이 기적은 아니었다. 궤멸당하다시피 한 수군, 오합지졸에 불과한 병사들의 힘을 한데 모아서 모두가 너나들이로 살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만든 것은 그 어떤 기적보다도 값졌다. 이런 기적이 일어난 한복판에 늘 이영남이 있었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아끼는 최정예 무사 27명을 모아놓고 말한 적이 있었다. 장군이 무심코 지나가다가 들은 것이었는데 이영남이 무사들에게 해준 말을 듣고 통제사는 마음이 한결 더 가벼워졌다고 했다.
  “전쟁이 없었다면 지금 세상은 아름다웠을 것이다. 아니 지금의 국왕이 조선의 국왕이 아니었다면 세상은 아름다웠을 것이다. 지금의 국왕 곁에는 퇴계 선생과 남명 선생의 제자들이 국정을 도왔고 여기에 율곡 선생을 비롯한 성혼, 기대승, 유성룡, 이발, 이산해 등 조선 역사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들이 임금 옆에 있었다. 학자들뿐만 아니라 새 세상을 꿈꾸었던 허균, 인체의 내부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동양 최고의 의학자 허준, 중국에서도 이름을 떨친 명필 한석봉, 도교에 능통했던 남궁두, 문장으로 이름 높은 매창, 유몽인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인재들이 조선에 들끓었다.
  임진왜란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군왕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금상의 시대인 지금은 조선 역사 중에서 가장 찬란한 시대였을 것이다. 이분들 중에 임란이 일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분들도 있지만 여기 한산도 통제영 근처로 모여들었던 사실을 나는 잊지 않는다. 이분들은 전쟁터에 없었으므로, 군왕조차 피난길에 나섰으므로 당연히 이순신 장군 곁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는 통제사 옆에 가면 살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통영에 모여들었던 분들을 다 말할 수는 없다. 팔도의 장인(匠人)들까지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이영남은 오늘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무사들에게 조선의 원통한 현실을 깨쳐주고 있었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빛나야 할 시절이 왜적의 칼날 아래 짓밟히고 있음을 알리면서 왜 절치부심(切齒腐心)이 필요한지를 명쾌하게 인식시키고 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어깨가 절로 펴졌다. 모름지기 싸움은 마음에서 승패가 나기 때문이었다. 이영남이 심혈을 기울였고 저 무사와 함께 지옥 같은 훈련을 견뎌냈으므로 이들은 어떤 적이 쳐들어와도 패할 이유는 없었다. 칼은 이미 무사들의 몸이 되어 있었으므로 적이 칼을 겨누기도 전에 적의 가슴 안쪽으로 파고들어 목숨을 거두는 야수(野獸)가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영남이 위태롭다. 이 노량의 바다에 이영남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자신의 최측근 부하 이영남 첨사가 통제사인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왜장 와키자카의 안택선으로 뛰어들어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영남의 좌우와 뒤엔 그가 조련한 무사들이 태산이라도 베어버릴 기세로 왜적을 무찌르고 있었다. 이영남 그가 부하들을 어떻게 조련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의 검법에 일본의 검법을 응용한 살상술(殺傷術)이 그것이었다. 검술을 넘어선 검의 이치(理致), 검의 이치를 넘어선 검의 도(道) 그것을 무시하기로 작정한 검법이었다. 하여 이영남과 무사들의 검법에는 활인(活人)이라는 조선 검법의 덕을 버렸고 그 대가로 비정함을 얻었다. 적선의 갑판에서 휘두르는 조선 무사들의 칼은 예외가 없었다. 칼날이 번뜩이는 순간마다 왜구의 피가 갑판에 시뻘겋게 뿌려졌다. 
  시간이 갈수록 적선의 갑판은 피로 물들었다. 조선 무사들의 신변은 위태로웠다. 왜적들은 죽어가면서도 발악했다. 무사의 팔뚝이며 옆구리, 무릎 아래에 상처를 남겼다. 작은 상처들은 결코 작은 상처가 아니었다. 피가 흐르는 상처들은 무사의 몸을 점점 둔해지기를 요구했다. 목숨보다도 먼저 몸이 살고 싶은 것이었다. 잠시라도 쉬면서 상처를 치료해주기를 몸이 먼저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아차, 하는 순간 자신의 목숨이 날아갈 판이었다. 왜적들도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었다. 조선 무사의 칼에 죽지 않으면 대장 와키자카의 칼에 죽을 판이었다. 적들은 살기 위해서 발악할 수밖에 없었다. 죽음을 작정하고 덤비는 데에서 살 길이 열린다고 느꼈을 것이었다. 
  통제사가 눈을 들어 위를 보니 안택선 지휘부인 망루에서 와키자카가 이영남 첨사와 무사들을 싸늘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 이러면서 조선 무사들의 죽음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인간은 얼마든지 잔인할 수 있고 인간은 얼마든지 악귀가 될 수 있으며 인간은 얼마든지 인간임을 포기할 수 있었다. 이것이 전쟁이었다. 이영남과 무사들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이영남은 휘하 무사들과 적의 안택선에 뛰어듦으로써, 왜적들을 닥치는 대로 무찌름으로써 자신이 탄 대장선을 보호할 판옥선들을 기다리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배를 보호하고 호위할 판옥선들을 도착하지 않았다. 도망가는 왜선들을 끈질기게 추격하면서 함포사격을 해대고 있었다. 
  아아, 이영남. 첨사 이영남이 위태로웠다. 
  이 사람아, 아침노을에 빛나는 전의인(全義人) 이영남, 이 무모한 사람아. <다음 편에 계속>

 

   
글쓴이 /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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