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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새벽어둠이 걷히다 <2-2> - 이병초의 '노량(露梁)의 바다'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한, 전의인(全義人) 이영남 장군의 불꽃 같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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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5.13  08:5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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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새벽어둠이 걷히다

 

< 2-2 >

부산 앞바다의 파도가 평소에도 2미터 이상을 넘나든다는 것, 조선의 군함 판옥선은 평저선이므로 파도에 약하다는 것, 1592년 9월 1일에 조선 수군이 부산을 쳤을 때는 파도가 제일 잔잔한 날이었고 도처의 섬이나 육지에 왜성이 없었으며 왜구가 주둔해 있지도 않아서 부산을 공격했을 때 조선 수군이 등 뒤에서 공격받을 일은 없었다는 것을 조정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군왕 선조와 조정의 대신들과 도원수 권율 장군의 의도는 조선 수군 전(全) 병력을 부산으로 이끌고 가서 일본군을 궤멸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조정은 새 통제사가 원균에게 결코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한산도 본영에 있는 조선 수군 전체를 이끌고 나가서 부산 앞바다에 주둔해 있는 왜구의 본진이자 전진기지를 박멸하라는 명령도 내린 적이 없었다. 전라우수영과 전라좌수영, 경상우수영이 각각 독립된 부대로 편성한 다음 시간과 물때를 맞춰서 교대로 부산 앞바다로 출정하기를 원했다. 왜구의 전투선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위협함과 동시에 적의 보급선을 끊음으로써 조선 수군의 위용을 보이라는 게 명령의 주된 내용이었다. 왜선들이 남해를 타고 서해로 들어와 도성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조선 수군의 위용을 보이라는 것이 조정의 명령이자 전략이었다.

새 통제사 원균은 뭐가 무서웠는지 그것도 하지 않고 매일 술만 퍼먹었다. 이런 사실을 안 권율 도통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이런 인간 말종을 보았나, 왜구의 전투선 앞에 나가서 전쟁하라는 것도 아니고 위협만 주고 오라는 데도 그것도 안 한단 말인가. 정말로 원균은 이순신 장군의 직함이었던 통제사 자리에만 눈이 어두웠단 말인가. 권율 장군은 원균을 불러들여 곤장을 쳤다.

“끼니때마다 술병을 차고 사는 너 따위가 조선 수군의 안위를 책임지는 지휘관이 틀림없으렷다! 네 이놈, 이러고도 네가 삼도수군통제사란 말이냐!”

권율 장군의 노기로 턱수염을 덜덜 떨었다. 부하들 앞에서 모욕당해서 그랬을까. 그에게도 자존감이 있었던 걸까. 곤장을 맞은 뒤 통제영으로 돌아온 원균은 통제사의 방에 들어가서 나오질 않았다. 그러더니 1597년 7월 14일 새벽에 작전회의도 없이 조선 수군이 가진 판옥선 134척과 전(全) 병력을 이끌고 견내량을 지나 칠천량 해협에 다다른 뒤 쉬지도 않고 곧바로 부산으로 진격했다.

새 통제사 원균은 작전회의를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작전회의를 하더라도 휘하 장수들의 의견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밀물과 썰물의 때를 맞춘 어느 시기에 출정할 것인지, 판옥선이 지나가는 바다의 길목에 왜선의 매복은 없는지 탐망선을 띄우고 판옥선들이 지나가려는 사방팔방에 포작선을 깔아둬서 적정을 살피는 일은 상식이었다. 판옥선 한 척에 몇 명의 병사가 승선해야 하며, 함포사격에 필요한 화약이며 물과 식량을 얼마나 실어야 하는지 등을 꼼꼼히 따지는 휘하 장수들의 얘기를 원균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것이 새 통제사 원균의 모습이었다.

조선의 판옥선 134척을 이끌고 가덕도를 지나 부산 앞마다 초입에 이르니 왜선 서너 척이 보였다. 때마침 왜구의 보급선 몇 척도 올라오는 중이었다. 원균은 기다렸다는 듯이 왜선을 잡으라는 명령을 했다. 그러나 새벽에 한산도를 떠나서 쉬지도 못하고 오후까지 노를 젓고 있는 격군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속도로는 왜선을 잡을 수 없는 조선의 판옥선인 데다 격군들까지 지쳤으니 원균의 명령은 헛된 고함 소리에 불과했다. 왜선을 잡으려다가 되레 조선의 판옥선 10척이 물길에 떠내려 가버렸다. 일국을 대표하는 전투선이 적의 상선(商船) 몇 척을 잡으려다가 표류해버리는 촌극(寸劇)을 왜군들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조선의 병사들이 지쳤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격군이며 병사들이 지쳤다면 아무리 용맹스러운 조선 수군이라고 하더라도 함포사격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아챘다. 일본 수군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키부네를 앞세운 왜선들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물길을 가르기 시작했다. 여기에 놀란 통제사 원균은 다급하게 가덕도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새벽부터 하루 종일 바다에 떠 있었던 판옥선도 조선 수군도 목이 탔다. 가덕도에 닿자마자 물을 떠오려고 400여 명의 수군이 하선했다. 그런데 가덕도는 이미 다카하시의 왜구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섬에 들어선 조선 수군 400여 명은 순식간에 전멸당했다. 통제사 원균은 이 모습을 보고 급하게 후퇴 명령을 내렸다. 아군 400명이 전멸당하는 모습을 눈앞에 지켜보면서도 원균은 그들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부하의 목숨을 자신의 목숨같이 아꼈던 이순신 장군과는 너무나 다른 상황이었다. 건장한 부하들의 생목숨 400여 명을 포기하고 후퇴 명령을 내린 뒤 통제사 원균은 캄캄한 밤에 거제도 영등포에 도착했다.

영등포는 파도가 심했다. 7월 15일 아침 원균은 함대를 칠천량 좁은 바다에 진을 치게 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았다. 작은 포작선까지 합세한 조선 수군의 함대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적게 잡아도 삼백여 척을 웃돌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휘관은 여기 칠천량 해협이 조선의 함선이 정박할 곳인가를 먼저 살펴야 했다. 탐망선을 띄우고 섬 여기저기에 있는 조선인들의 말을 경청하면서 왜군들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살펴야 했다.

그런 뒤 진을 치기에 적당한가를 따져본 후에 명령을 내려도 늦지 않았다. 사태가 급박해질 수도 있으니 조선의 함선이 바다를 뚫고 나갈 퇴로를 방비해두는 것도 상식이었다. 통제사 원균은 그런 생각이 없었다. 그럴 생각조차 없었는지도 몰랐다. 조선의 전(全) 함대가 주둔한 칠천량의 앞과 뒤는 바닷길이 뻥 뚫려 있었다. 수백 척의 왜선이 앞뒤로 들이닥치면 조선 수군은 좁은 해협에서 함포 한번 제대로 쏘아보지 못하고 전멸당할 수밖에 없는 형세였다. 그런데도 통제사 원균은 태평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조선의 함대를 한산도 본영으로 돌리는 것이 누가 봐도 옳았다. 과거 학익진을 펼치면서 일본군을 대파한 한산도대첩을 떠올린다면 조선 수군이 바다를 지켜내지 못할 이유가 없었고 이 전투를 소상하게 알고 있는 일본 수군들도 쉽게 접근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칠천량에서 원균은 유유낙낙했다. 자신이 출정을 원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 전투에 책임이 없다는 투였다. 조정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출정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최고 지휘관인 원균이 이런 모습은 자멸의 길이었다. 자신이 지금 조선 수군의 최고 지휘관인 것은 휘하 장수들과 1만의 병사가 있었으므로 가능한 것이었다.

통제사는 장수들과 병사들의 뜻을 받들 줄 알아야 했다. 수군의 위용을 펼쳐 보이듯 함대와 병사를 보호할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함과 동시에 왜선들이 급습해 올 것을 염두에 두고 역습할 수 있는 계책을 짰어야 했다. 그러나 통제사 원균은 장수들의 의견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장수들과 만나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원균은 이런 사람이었는지 몰랐다. 정말로 이순신 장군의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만 눈독 들였던 졸장부였는지도 몰랐다. <다음 편에 계속>

 

   
이병초 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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