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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운주 화암사 <이현옥의 타박타박>
전북포스트  |  jbpost20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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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10.12  10: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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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서두릅시다."

여름 오후의 더위를 피해 어디를 휭하니 다녀오면 좋을까. 순식간 정한 코스가 운주의 화암사다.

카카오 맵은 우리 집에서 화암사까지 도보를 포함하여 45분이 걸린다고 나온다. 이 정도라면 느즈막히 출발해도 두어 번은 다녀 올 수 있겠다. 아직은 낮의 길이가 더 길 것이므로 말이다.

자칭 조수 경력 30년이라고 자부하던 모습이 사라진 채 의무감만 남아 있는 남편의 낯꽃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 억지춘향으로 끌려 나온 표정이 역력하다.

 

   
전북 완주에 있는 화암사 극락전. 

푸르렀지만 그 무엇에도 확신이 없던 시절 그는 늘 바깥으로 나돌았다. 가족들이 바람 쐬러 가자고 하면 여간 인색하게 구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그와 반대로 나는 이제 집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진다. 아무래도 그간 묶여 살았던 시간들과 맞장을 뜨겠다는 심보가 터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집안에서 일상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무기력증과 울렁증이 기어든다. 어쩌자고 조물주는 남녀의 라이프 사이클과 성향을 이렇듯 다르게 만들었을까. 나가자는 기색만 보이면 눈길을 피하고 보는 이 작자 없이 혼자 쏘다니는 내성을 키우고 말겠다.

안전하기만 하다면야 내 진즉에 그리 했을 것이다. 선심 쓰듯 방자한 남편의 태도를 앞으로는 봐 주지 않을 것이다, 분을 삭일 새도 없이 잘 닦인 도로에 들어섰다. 속이 뻥 뚫린다.

 

습한 계곡을 따라 모기떼의 습격을 받으며 올라가는 동안 드는 생각은 나의 선택은 옳았다는 것이다.

계곡의 나무 이파리들은 짙은 초록이 아니라 연둣빛을 띠고 있다. 부옇던 내 눈이 조금씩 초점을 맞춰간다.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은 깨끗하고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도 듣기 좋다.

절 들어가는 돌담 위에 능소화는 지지 않고 아직도 꼿꼿하다. 문턱을 넘고 밟은 마당이 너무 고요하다. 발을 잘못 내디딘 것만 같다. 처마 끝에서 몇 마리의 벌들이 윙윙 날아와 겁을 주고 달아난다. 쏟아 붓는 뜨거운 햇살에 어디로들 숨었는지, 이러한 적막도 나는 서툴다.

이런 마음이 되어보자고 오지 않았나? 낯설게 보기…로 말이다. 가슴속 수많은 소용들이들 덜어보자…며 말이다. 막상 그런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니 어색해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인간이지 흔들려야 사람이지, 다들 그렇게 말했다.

 

이 ‘ㅁ’자 절 마당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크기이다. 아니 너무 큰 거 아닌가? 좀 작아도 괜찮겠다. 인간들과의 거리도 딱 저만큼이면 좋겠다.

가까워지고, 깊이 알고 싶어 하다가 관계들이 삐걱거렸던 때가 종종 있었다. 이제 저 거리를 유지하고 사는 것이 옳지 않나 싶다.

 

   
전북 완주에 있는 화암사의 우화루. 보물 662호로 지정돼 있다. / 사진=이현옥

굳고 단단해진 흙이며 경내 군데군데에는 거무죽죽한 이끼, 연한 빛의 흙냄새는 자신이 견뎌 온 세월을 묵묵히 드러내고 있다. 가을 기운이 묻은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들이 지금 당장 이 마당으로 쏟아질 것만 같다.

지금 나는 윤기가 거의 없는 적묵당의 마루에 앉아 있다. 기둥 일부를 수선했는지 교체했는지 약간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시간의 흔적을 때운 것임을 어찌하랴.

그나저나 극락전과 우화루를 보자고 이곳에 들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 명성에 비해 너무 늦게 얘기를 꺼내어 송구하지만 많은 이들이 칭송해 마지않았으므로 슬쩍 지나가도 괜찮을 성 싶다.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를 쓴 최순우 선생이 이 절을 만났다면 어떻게 글을 썼을까.

그 분의 안목에 비하면 별 볼일 없는 나의 식견-- 다만 나는 누가 뭐라 해도 저 낡고 곱게 바랜 때깔이 이래저래 맘 상하고 때때로 곪아 터진 내 속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이 절은 나에게 과한 구석이라고는 없다.

넋 놓고 앉아 있다 보니 송글송글 코끝에 맺힌 땀도 거의 식어간다. 경내 어디에 바람구멍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딴 생각에 빠져서 성질 급한 이 남자를 잠깐 잊었다. 그 낌새를 파고들며 또 조른다. 어서 내려가자고 말이다. 어떡하든 나는 멈추고 싶은데 말이다. 저 아랫녘 세파 속으로 발걸음을 떼기가 싫다. 더군다나 불볕더위를 어쩌자는 말씀인가. 이런 까닭에 혼자 다니라는 말씀이다.

 

   
최순우 선생의 글집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기어이 불명산 오르는 입구 벤치로 떠밀려 나오고 말았다. 골짜기를 타고 올라오는 바람 앞에서 이 핑계 저 핑계도 붙여 본다. 감탄사도 남발해 본다. 그렇게라도 해야 좀 더 멍을 때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최순우 선생의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중에서 ‘달빛 노니는 창살 이야기’가, 손깍지를 끼고 누운 그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 첫 해 늦은 가을 달밤, 나는 옛일처럼 불을 끄고 호젓이 누워 동창에 비친 늙은 감나무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애틋한 사람의 얼굴을 허공에 그려 보곤 했다… 이른 봄날이면 보라색 새벽노을이 이 영창에 물들어 오기 마련이고 초여름 녹음이 짙어지기 시작하면 바야흐로 무성해지는 감나무 그늘에 가려져서 달그림자 없는 한여름을 지루해하기도 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오래 들여다봐야 저런 글이 나오는 지 어떤 풍상을 견뎌내면 저렇듯 무던해 지는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왜 그의 대표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보다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가, 소위 그 아류들에게 자꾸 끌려가는지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다.

 

작지만 쩨쩨하지 않은, 소박하지만 시시하지도 않은 이 절을 오래오래 곁에 두고서 보고 또 보게 되면 최순우 선생의 안목을 갖게 될지... 그 분이 이곳에 다녀가서 글을 쓰지 않았기를 바란다. 우리 문화의 초년생 같은 이 잡문과 당장 비교가 될 테니까 말이다. / 이현옥(우석대학교 도서관 사서)

 

   
글쓴이 이현옥 선생은 완주군 봉동에서 태어나 우석대 국문과와 전북대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우석대학교 도서관 사서로 34년째 재직 중이며, 올해 12월 정년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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