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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형한글체' 창시...선비정신 지킴이 - <작가의 방>4. 김두경 서예가"서예로 표현 못할 문자는 없어...한글의 세계화에 매진할 생각"
강찬구 기자  |  phil6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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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5.13  09:4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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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경 서예가.

“상형한글체를 완성한 뒤 서예로 표현하지 못할 문자는 없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습니다. 대한민국이 세계 정신 개벽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고, 이는 곧 우리의 선비정신이 될 것입니다. 노벨상보다 더 큰 ‘세계선비상‘을 만드는 게 꿈입니다.”

아하(我河) 김두경 선생(62)은 한글의 조형미를 살린 ‘상형한글체’의 창시자, 선비정신이 충만한 서예가로 꼽힌다. 그는 한글의 영역를 넓혀 세계화를 추구하고 있다. 정읍 산내 깊은 산 속에서 그를 만나고 오는 길은 푸르고 맑았다.

 

   
정읍 산내에 있는 선비문화체험관 '우리누리' 입구

◇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익힌 서예

김두경 선생은 어린 시절 서당을 하던 아버지 덕분에 자연스럽게 서예를 접하고 평생 서예가로 살아왔다. 부안에서 나고 자랐고, 고등학교를 전주로 유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붓을 잡았다. 

“서예는 삶‘이라고 그는 정의했다. 다른 예술 분야는 작가의 삶과 작품이 유리되기도 하지만 서예는 작가의 내면이 그대로 투영된다는 의미다. 

“한 유명 시인하고 일을 같이 하게 됐는데, 그의 행실이 그의 시와는 달랐어요. 그래서 ‘선생님의 시는 순수하고 좋은데 실제 사시는 태도는 다른 거 같다’고 말하니 그 시인이 ‘글은 글이고 나는 나...’라고 얘기하더라고요. 충격이었어요. 어떻게 글과 마음이 다를 수 있는 것인지... ”

 

   
 
   
김두경 선생의 영어 상형 문자 'Love'(위)와 'Love You'(아래)

그는 “서예는 속과 겉이 다를 수가 없다”고 말했다. “작가의 삶과 유리되는 순간 더 이상 서예가 아니다. 글씨가 속스럽게 변해 버린다.”며 “서예는 반이 수행”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그동안 한글의 형상화에 집중했고, 이제는 틀을 잡았다.

“글씨를 쓸 만큼 쓰다 보니 그 속에 내 삶을 담고 싶은 마음이 강해지고, 그러다 보니 자꾸 추상 쪽으로 흐르게 된다.”며 “문장으로만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느낌도 전하고 싶은 마음에 상형한글체를 찾게 됐다”고 말했다.

 

   
김두경 선생의 형상 문자 '춤'

“1997년 세계서예비엔날레가 전주에서 열리던 때인데, 당시 중국이나 서양 사람들도 많이 참가했어요, 서양인들은 ”한글 서예가 뭐야...?‘고 정체성에 의구심을 드러냈고, 중국 서예가들 조차 “’우리의 아류 아니냐...?‘고 묻는데 딱이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어요. 그래서 한국적인 서예는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당시는 한글서체가 지금처럼 자유롭지 못했다. 궁서체 밖에 없던 시절. 보다 자유로운 민체가 유행하기 이전이다. 그는 이때부터 '한글은 디자인적 요소가 강하며,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한글의 조형미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한글 조형미 살린 ‘상형한글체’ 완성

“2-3년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한글이 어려워서 도무지 틀이 나오지 않는 거예요. 한글은 단순하게 가로 긁기와 세로 긁기, 동그라미로만 구성돼 있어요. 예술성에 있어서 변화와 다양성을 주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아주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김두경 선생의 문자 추상 작품. 

포기 상태에 있던 그에게 갑자기 계시처럼 깨우침이 왔다.

“어느 날 한옥 문살을 보다가 퍼뜩 깨우치는 게 있었어요. 조형 한글을 포기하기 직전입니다. 옛날 숫대창살을 보면서 글자를 붙여 쓰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2008년 비로소 상형한글을 완성하고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고민을 시작한지 10년이 넘은 세월이었다. 마침 ‘한류(韓流)’가 세계로 번지던 시절이었다. 서예의 한류에 대한 욕심도 생겼다.

그는 전시를 앞두고 이어령 선생의 지인을 만나 작품을 보여줬다. “이런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어령 선생이 보시고 발문을 써주셨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고, 발문을 받았다.

 

   
감두경의 문자 추상 - 휴(休).

이어령 전 장관은 “한글의 기능성을 찬미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조형적 예술성에 대해서는 새로운 발굴 작업이 없었다.”며 “김두경 작가는 서예의 한계를 벗어나 파격적 회화 기법을 도입해 한글의 상징 및 조형성을 재창조했다.”고 가치를 부여했다.

그는 더욱 자신감을 갖고 상형한글에 몰두했고, 서체도 완성해 디자인 등록까지 마쳤다.

그는 상형한글을 바탕으로 다양한 시도들을 하고 있다. 컴퓨터와 결합해 온라인 서예를 연구하고 있다. 글자에 사물이나 형상, 자개를 씌우는 것도 같은 일환이다.

“서예는 color(색)가 없어서 색이 있는 형상이나 화려한 자개 등을 활용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며 “서예를 장식용으로 상품화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김두경 문자 추상 봄(위)과 이웃-E웃(아래).

“일식집이나 중식집에는 상징하는 풍경이 있는데 한식집에는 그런 풍경이 없어요. 서예 작품도 쓸만한 것을 걸어 놓으면 좋은데, 허접한 이미테이션만 있어요. 서예를 하는 사람으로서 창피해요. 만약 우리가 외국에서 한식집을 하게 된다면 어떤 인테리어를 할 것인가에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예와 사진, 컴퓨터그래픽을 결합한 새로운 서예작품을 추구하고 있다. 이른바 트리니티 아트(Trinity-Art). 온라인을 통해 발전시켜 나가고, 장기적으로 문화 상품화 하는 길을 찾고 있다.

 

   
 
   
김두경 선생의 LED융복합아트 '스스로'(위)와 'BTS'(아래). 

그는 지난해부터 서양화를 하는 김부견 화백과 친분을 가지면서 그의 작품에 쓰인 ‘퍼미스젤’이라는 회화 재료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 재료를 써서 나이프로 서예 작업을 하는 데 정말 재미있다.”는 말로 의욕을 보였다.

 

◇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살아 온 이 시대 선비

그는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서예가로 꼽힌다. 서예의 정형화에서 탈피를 꿈꾸듯 서예계의 관행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일부에서는 그를 이단아처럼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작품에 정진해 왔다.

 

   
김두경 상형 문자 '웃어요'

“90년대 후반인데 국전에 대상 후보로 올랐다고 연락이 왔어요. 휘호를 하라고 해서 갔는데, 주최 측에서 대상을 받으면 상금을 반환할 수 있느냐고 제안하더라고요. 그럴 수 없다고 했지요. 그러면 안되니까... 당시는 관례적으로 그래 왔나 보더라고요. 결국 대상은 받지 못했지만 후회는 없어요.”

그 뒤로 그는 공모전에 출품하지 않았고, 서예 판을 기웃거리지도 않았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길을 걸었다. 대신 2000년부터 ‘까마“라는 서예 잡지를 발행하면서 서예계의 문제들을 지적했다. 서예계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 계기가 됐고, 스스로도 상처를 위로 받았다.

 

   
선비문화체험관 '우리누리'에서 김두경 선생. 

“혼자 공부하다가 서예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서른이 돼서예요. 하석 박원규 선생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고식적이지 않으셨어요. 그 분의 가르침은 ‘니 마음이 가는대로..‘ 였습니다. 그게 선생님과 맞았고, 그렇게 이끌어 주신데 대해 지금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정읍시 산내면 청정로 1694번지 ‘우리누리’에 터를 두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누리’는 선비문화체험관이다. 코로나 상황 이전에는 200-500명으로 붐볐으나 지금은 한적한 여백을 녹음이 채우고 있다.  

   
 
   
정읍 산내에 있는 선비문화체험관 '우리두리'. 김두경 서예가의 삶터다. 

”제가 서예를 가르치면서 느끼는 건데 현대인들은 서예의 맛을 몰라요.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 보니 우리 전통 문화를 모르는 거예요. 문화적 바탕이 없다는 거죠. 옛날 선비 집안에는 마음에 침을 놓는 좌우명 등 잠언(箴言)이 있었고, 가장에게는 핵심 사상이 있었는데 그런 것이 없더라는 거죠. 우리 문화를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이곳은 그의 현실적 생활 방편이기도 하다. 부인은 전통음식 및 요리연구가다. 이 시설을 통해 선비 정신을 보급하면서 작품에 정진할 수 있었고, 세 자녀도 키워냈다. 그는 “내 작품 값을 제대로 받기 위해 ‘우리누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이 사람인 까닭이 있듯이 서예가 서예인 까닭이 있습니다. 사람이나 서예나 격의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고, 격 높게 살아온 사람이 존경받고, 격 높은 글이 세상에서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김두경 문자 추상 - 서울 인사동 'I am' 전시 작품. 

말이 나온 김에 미술계의 관행인 작품의 '호당가격'에 일침을 놓는다. 

“괘종시계가 크다고 가격이 비싼 것이 아니고, 손목시계가 작다고 가격이 낮은 것이 아니다”며 "작가가 얼마나 열정을 쏟았고, 작품성이 담겨 있는지에 따라 값을 부를 수 있는 것"이라고 명쾌한 답을 내렸다. 

 

◇ “다시 태어나도 서예의 길을 갈 것”

그는 “다시 태어나도 서예를 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서예는 삶과 통한다’는 말과 상통하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후회없는 서예가, 선비로서의 삶에 수긍이 갔다. 

그도 하고 싶은 만큼 전시를 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다. 서예 장르는 사실 전시 기회가 많지 않다. 화랑가의 관심도 적고, 일반 그림처럼 초대전도 적다. 전시를 통해 팔리는 작품도 적다. 그러니 현실적으로는 외로운 작업이다.

 

   
김두경 문자 추상 - '응원'

“그동안 작품전을 하고 나서도 아쉬움이 남았었어요. 전시를 하면서도 걸리는 게 있었는데 2년전 ‘I am’ 전시부터 마음이 풀렸습니다. 지금은 제가 원하는 감정을 자신 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역량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할 수 있는 전시를 해 보고 싶습니다.”

요즘 열정을 뿜고 있는 꿈은 한글서예의 세계화, 서예의 ‘한류’다.

 

   
 
   
김두경 선생의 상형 문자 '동무'(위)와 트리니티 아트 '물'(아래)

“세계가 한글 서예를 주목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어요. 세계적인 예술로 인정받도록 하고 싶습니다. 제가 한글을 조형화 하면서 세계 모든 문자가 서예로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어요. 한글 서예의 세계화를 위해 차근차근 나아갈 생각입니다.”

과거 서예는 문장 중심으로 회화성을 소홀히 했지만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이미지와 영상의 시대다.

 

   
 
   
김두경 상형 문자 사랑(위)과 '스마일-Smile'(아래).

문장은 어려워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글씨 자체의 아름다움을 통해 서예가 가진 정신과 생각을 느끼고 공감하게 될 것”이라며 ‘보는 서예, 읽는 그림’으로서의 서예를 강조한다.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도 있다. 세계화는 결국 한국문화가 바탕이 돼야 가치가 커진다.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관심을 갖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 문화의 바탕은 홍익정신, 천손사상입니다. 인간 존중 사상입니다. 우리 정신이 대세를 이뤄야 세계 평화가 이뤄지고, 이것들을 아우르는 것이 곧 선비정신입니다. 이 선비사상을 품고 가면 세계 어느 곳에서나 빛이 날 것입니다. ‘세계는 하나’라고 얘기하지만 우리 것이 없으면 전체에 흡수되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다워야 가치가 빛나는 것입니다.” / 강찬구 기자

 

   
선비문화체험시설인 '우리누리'에서 김두경 선생. 

◇ 아하(我河) 김두경 선생

김두경 선생의 고향은 부안이다. 아버지는 한약방을 하시면서 글을 쓰고 가르쳤다. 아하 선생은 그 제자들 속에서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글씨를 썼다. 그는 “스스로 좋아서 글씨를 썼고, 법첩을 보고 쓰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고등학교를 전주로 유학하면서 아산 송하영 선생으로부터 서예를 배웠다. 아산은 그의 친 외삼촌이다. 외할아버지의 동생이 되는 강암 송성용 선생 댁을 오가면서 서예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이런 인연으로 전북대 중문과에서 수학했다. / 강찬구 기자

 

   
 
   
 
   
 
   
김두경 선생의 상형 문자, 문자 추상. 트리니티-아트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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