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하지 않을 패자의 서

•작품: 『고요한 밤의 눈』

•글: 황혜림(경기 평택시, 25세)

길몽을 꿨다. 큰 재물이 들어오고 주변 사람들에게 명성을 떨치게 되는 대길몽이란다. 오랜만에 잊고 있던 복권 사이트에 접속했다. 6개의 번호를 정성스레 입력하고는, 복권에 당첨되면 무엇을 할지 생각했다. 부모님께 절반을 드리고, 1억은 기부를 하고, 1억은 주식을 사고, 나머지로는 성수동에 있는 아파트를 사야지. 행복한 상상이었다. 성수동 아파트 시세를 보기 전까지는...

▲ 우수상 수상자 황혜림 씨

부모님께 절반을 드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성수동 아파트는 로또 당첨금을 죄다 들이부어도 살 수 없는 가격이었다. 로또에 당첨될 확률이 814만분의 1이었던가. 벼락을 한 번도 아니고 연속해서 두 번 맞을 확률과 같다.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평범한 직장을 가지고 살아갈 내가, 서울에 자가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확률은 벼락을 연속으로 두 번 맞을 확률보다 낮은 것이다. 묘한 불쾌함이 일었다. 하지만 이내 지워 버렸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니까. 814만분의 1의 확률로 로또에 당첨되더라도 성수동에 있는 아파트를 살 수는 없겠지만, 내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살아가면 된다.

○ ‘원래’의 폭력성

언젠가부터 집이 없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집은 고사하고, 학자금과 생활비 대출 때문에 청년들은 사회생활을 시작해 보기도 전에 빚쟁이가 된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본적인 것들을 갖추기 위해 빚을 지는 것이 당연해지고, 내 집 마련이 로또 맞기보다 어려워진 사회를 우리는 그저 받아들이며 산다. 그걸 청춘이라고, 어른이라고 부른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분명한데,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런 사회 속에서 『고요한 밤의 눈』은 침묵하지 않는 소설이다. 어딘가 잘못되지 않았느냐고, 침묵하는 사람들을 향해 고요히 읊조리는 소설이다. 소설 속의 세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묘하게 다르면서도 같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스파이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실존하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존재한다. 기득권의 이익을 위해서만 아는 것을 뱉어내고, 그럼으로써 기득권과 평범한 사람들 사이의 격차를 벌리고, 압도적인 격차를 통해 사람들에게 절망과 체념을 학습시키는 사람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것’이라는 말 아래 사람들이 마주하고 싶지 않아 했던 실체 없는 불편함을, 소설은 스파이라는 형태로 구체화한다.

“그동안 나는 ‘왜’라는 질문 없이 살아왔다. 내게는 언제나 목적이 주어졌고, 그 목표는 어떻게가 중요할 뿐이었다. (중략) 처음에는 남들도 다 나처럼 산다고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다음에는 내가 남들보다 나은 삶을 산다고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다음에는,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유능한 스파이인 Y는 어린 시절부터 치열한 경쟁을 통해 스파이로 길러진다. 그녀의 인생에 ‘왜’라는 질문은 없다. 성장 단계별로 목표가 주어지면, 그 목표를 어떻게 남들보다 빨리 달성할 수 있을지만을 고민하며 치열하게 산다. 도태되면 죽어 버리는 세상에서 ‘왜’라는 질문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스파이도 아닌 내가, 날 때부터 스파이로 길러진 Y의 인생에 묘한 기시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목적을 잃어버린 채 수단만 남은 삶이, 언젠가부터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게 되어 버린 삶이 낯설지 않다. 이런 삶 속에서는 나조차도 믿을 수 없다. 세상의 요구대로, ‘왜’ 라는 질문 없이 살아온 내가 과연 진짜 나일까. 사회적 시선이 가치 판단의 유일하고 중요한 도구가 되어 버린 나를 정말 스스로 생각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원래’라는 단어를 자주 쓰기 시작했다. 세상에 억울해질 때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 때마다 ‘원래’라는 말은 만능 해답 같은 것이었다. ‘원래 다 그런 것’이라는 말은 그만큼 편리하고 또 폭력적이다. 90%의 사람들이 10%를 가지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1%의 사람들이 나머지 90%를 독차지하는 세상은 ‘원래 그런 세상’이 아니라 잘못된 세상이다. 무서운 것은 기업의 이윤을 위해 사람들의 생업을 빼앗고, 자본이 사람을 조종하고 희생시키는 것이 당연한 세상을 ‘원래 그런 세상’이라고 믿게 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며 침묵하는 스파이라는 점이다.

90%의 자본을 독차지한 1%는 99% 사람들의 생계를 담보로 10%의 자본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런 세계에서 침묵하는 우리는 모두 스파이이다. 생각하지 않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서로를 견제하고 1%들이 남긴 찌꺼기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이런 때일수록 99%는 생각해야 한다.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자아를 탐구해야 한다. 소설 『고요한 밤의 눈』은 ‘원래’의 함정에서 벗어나 세상의 구조적 모순과 불평등을 멀리서부터 조망한다. 스파이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지독하게 날카롭고 현실적인 이유다.

○ 점이 선이 될 때

“나 하나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생각으로 그 자리에서 멈출까. 나 하나 이런다고 세상은 변하지 않고 나 혼자만 죽게 될 뿐이다. 억울하지만 더 억울해지기는 싫다. 어떤 방법으로도 세상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심지어 목숨을 걸어도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면 세상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악의 악순환을 바꾸어야 한다.”

소설 속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이 사회는 무언가 잘못되었고,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모두가 침묵하는 스파이 역할을 자처하는 이유는 ‘나 하나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라는 생각 때문이다. 실제로 거대한 자본을 무기로 휘두르는 조직에 개인은 필연적으로 패자일 수밖에 없다. 거대한 붓을 쥐고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조직이라면, 개인은 그림을 구성하는 점이다. 점이 하나쯤 없어져도 전체적인 그림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사회에서 점들의 주된 정서는 무력감이다. 무력감 속에서 그들은, 선이 되지 못하고 점으로 태어나 점으로 죽는다.

『고요한 밤의 눈』은 세계를 이렇게 절망적으로 묘사하면서도, 한 가지의 독특한 희망을 남긴다. 바로 점은 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소설 속 조직은 스파이들이 선이 되는 것을 경계한다. 선은 면을 만들고, 면은 그들의 그림을 바꿔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점은 큰 그림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하지만, 선과 면은 다르다.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각성하기 시작한 X가 Y의 마음을 움직였고, 당장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것 같아 보였던 Z의 소설은 Y를 비롯한 독자들을 각성시켰으며, 각성한 독자들은 독서 클럽을 만들어 또 다른 사람들을 혁명의 장으로 초대했다. 하나의 점이었던 언니가 사라진 이후 D는 세상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으며,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았던 패자들의 실종은 조직 깊은 곳에 있는 B를 움직였다. 이처럼 패자들의 이야기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선과 면을 만들어 내며 사회를 조금씩 움직인다. 생각하는 한, 소설을 읽는 한 패자들은 진정으로 패하지 않는다. 패자들은 무언가를 할 때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진정으로 패한다.

이 소설은 스파이가 사람들을 감시하고, 사람들이 한둘씩 사라지는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묘사한다. 하지만 세계를 냉철하게 통찰하는 소설가들이 있는 한, 그리고 이를 읽고 생각하고 서로를 사랑할 패자들이 있는 한 세상은 그저 디스토피아로만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는 기꺼이 패배하고 스러질 패자들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작가가 전달한 패자들의 이야기는, 세계에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가닿을 패자의 서의 한 페이지가 될 것이다.

언젠가부터 청년들은 당연한 것들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내 집 마련이 로또 맞기보다 어려운 세상 속에서, 많은 사람은 무기력을 학습한 채 체념하며 살아간다. ‘왜’라는 질문 없이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가면을 바꿔 쓰고, 그 과정에서 생긴 빚을 기꺼이 떠안는다. 90%는 삶을 포기했고, 10퍼센트 내에서 다시 9퍼센트는 화가 났고, 1퍼센트는 단단히 뭉쳤다. 90퍼센트는 노예일 뿐이다.

그럼에도 소설이 있기에, 현실을 기록하고 패자들에게 귀 기울이는 소설가들과 기꺼이 패배할 패배자들이 있기에 세상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나는 기억하고 관찰할 것이다.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고요한 밤에 내린 눈처럼 차곡차곡 쌓여 소리 없이 세상을 하얗게 뒤덮을, 점에서 선이 될 패자들의 이야기를 믿을 것이다.

소설 『고요한 밤의 눈』이, 그리고 소설을 읽고 적어 내려간 나의 글이,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 또 다른 패자의 서로 기록되길 바란다.

수상소감: 황혜림(25․경기 평택시)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도서관에 가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도서관 구석에서 책을 열면 펼쳐지는 또 다른 세상이 좋았습니다. 책을 읽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도서관에서 수백 년 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여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책과 멀어지기 시작한 것이 언제쯤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책 읽기보다 중요한 것이 많아지면서, 저는 읽는 것을 멈췄습니다. 읽는 것을 멈추니 생각도 멈췄습니다. 생각이 멈춘 저는 사회가 제게 요구하는 것들을 그저 열심히 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에서 열심히 사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혼불의 메아리를 들었습니다. ‘홍도’라는 작품을 품고 앓던 어린 시절의 밤이 떠올라 오랜만에 책을 펼쳤습니다. ‘고요한 밤의 눈’은 쉽지 않은 소설이었습니다. 읽고 멈추고 생각하고 쓰기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책 속에서, ‘원래 그런 것’이라는 구차한 변명 아래 외면해 온 세상의 징그러운 민낯과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삶은, 진정으로 저 자신의 삶이 아니었다는 것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소설에는 커다란 힘이 있습니다. 소설은 밋밋하고 연약한 개인이라는 점들을 하나의 이념으로, 희망으로 이어 선과 면을 만듭니다. 점에서 선이 될, 연약한 개인이자 필연적인 패자들의 이야기에 따스한 시선을 보내 주신 혼불의 모든 관계자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고요한 밤의 눈’이 제게 준 선물 같은 시간을 가슴에 품고, 끊임없이 읽고 생각하며 온전한 저 자신이자 패하지 않을 패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