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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맑은 시비평'> 25. 파도 소리가 들리는 책장 - 서 하
이병초  |  jbpost20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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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3.24  11:3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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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정리하다가 파도소리를 듣는 시인이 있다. 높낮이 다른 책들 키순으로 정리했더니 책장에서 파도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눈을 반짝이게 하는 상상력이다. /

  책장을 정리하다가 파도소리를 듣는 시인이 있다. 높낮이가 다른 책들이 손에 잡히는 순간 접신(接神)하듯 “성대가 없는 활어”가 건져지기도 한다. 시는 삶의 가까운 곳에 있으며 시의 상상력이란 것도 일상을 재해석하는 지점에서 촉수를 빛낸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높낮이 다른 책들 키순으로 정리했더니 책장에서 파도 소리가 들린다 둥둥 떠다니는 달을 건졌는데 활어였다 성대가 없는 활어의 이야기는 유효기간이 없다 내 활활 죽고 나면 지느러미 꽁꽁 묶여 횟집 저울추처럼 파들거릴 활어

 

  움푹 패인 곳에서 건져 올린 물미역 같은 가름끈 옮겨가며 읽은 책 또 펼쳐 읽는다 당신을 읽는데 내가 젖는다 갈매기 깃털 닮은 책갈피가 할딱이는 해변, 난독의 해안선 한 권을 온전히 읽지 못하겠다 뭉툭한 눈이 삐댄 염분 탓이다

 

 비린 해초가 더듬더듬 코끝에 매달리는 시간이다 높고 낮음이 없는 저 수평선,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건 흰 구름, 그의 몫이다

                                      -서하「파도소리가 들리는 책장」, 전문
 

 

 목숨의 끝을 보았다는 듯 “내가 활활 죽고 나면”이라고 가슴을 긁는 구절이 묘한 생동감을 불러낸다. 활활이라는 음성 상징어를 물고 생의 욕망이 꿈틀거린다. 지느러미가 꽁꽁 묶여 “횟집 저울추처럼 파들거”릴 수 있다는 미학은 “성대가 없는” 낮은 휘파람소리 같다.

 

   
서하 시인

  시에 적힌 파도소리, 해변, 염분, 수평선, 해초 등의 단어들은 시인의 어제와 오늘을 짭쪼롬하게 펼쳐놓는 데 복무한다. 유효기간이 없는 그 기억은 축축하다. “당신을 읽는데 내가 젖”고, 도무지 “난독의 해안선 한 권을 온전히 읽지” 못하겠다는 씁쓸한 입맛을 얻는다. 소금기 때문에 글을 못 읽겠다는 진술은 시인이 물미역 같은 기억을, “비린 해초가 더듬더듬 코끝에 매달”렸던 시간을 여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갈매기 소리에 감긴 기억의 토막들은 허공에 튀어오르는 활어처럼 시인의 마음을 한번 더 휘어지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시의 상상력은 난독의 해안선을 독공으로 독파해내려는 속내를 감추고 있다. 비린내 묻은 시상을 펼쳐놓고 “높고 낮음이 없는 저 수평선”으로 시의 눈길을 돌리듯 마지막 페이지를 그의 몫으로 돌리는 정결함이라니. 당신에 기대어 시의 순정에 닿고 싶은 치열성은 시인에게 2020년 <제1회, 이윤수 문학상> 수상자의 영예를 안겼다. / 이병초 시인(웅지세무대 교수)

 

   
이병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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