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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지구공유지의 자치마을과 지구연방 - 2020 신년기획 <지역을 떠올리자>
강주영 편집위원  |  kjyn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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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2.14  13:4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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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 연재 글의 전체를 아우르는 생각을 전해 왔다. 최근 우리나라의 일과 근대와 지구의 위기를 비판적으로 되새기며 지구공유지에서 지역을 사유하는 글이다. 독자들의 토론이 필요한 글이다.(편집자 주)

 

   
새벽닭이 울면 조중러 삼국이 함께 깨었다. 앞이 중국, 왼쪽이 러시아, 오른쪽이 조선 두만강 접경 지역.

 인류의 가을이다. 무한 진보하리라 믿은 근대에 황혼이 내리고 낙엽이 들기 시작했다. 농사의 붕괴, 거대도시병, 전쟁, 초위험사회, 합법적 사기인 금융, 탈노동화 경향, 불평등을 극복하지 못한 한계민주주의, 결코 공동선이 되지 못하는 국가, 초불평등, 핵, 기후위기, 대멸종의 경고 등 인류에 혹독한 겨울이 다가 오고 있다. 

그런데 내 나라에서는 기왕에는 좋았으나 이미 지난 봄의 추억을 끄집어내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다투고 있었다. 북풍한설 엄동설한 겨울을 날 땔나무를 장만해야 하는데 이 무슨 지난 봄날의 추억인가? 

자본 또는 생산력의 무한증식을 역사의 최종국면으로 하여 그 부스러기를 이삭 줍기하는 우승열패의 근대 민주와 진보, 겨울이 오면 뜯어 땔감으로도 쓰지 못할 성장의 낡은 성문을 지키는 보수!  박근혜 탄핵 촛불의 전주 객사 거리에서 나는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작별을 알렸다. 근대의 황혼에서 진보, 보수 모두 혼용무도하기만 하였다. 대안 세력이 빈 공간에서 민주 꼰대들이 혁명을 반정으로 강등시켰다. 

멋쩍게 집으로 돌아가며 나는 허공에 흩어진 나의 무력한 정의에 못질하였다. 민주는 쇼윈도 마네킹 같고, 런웨이를 걷는 유행 전도사 모델 같았다. 권력이 외치는 정의는 그들이 전리품으로 챙긴 목걸이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새로운 사랑을 갈망하였다. 그 사랑은 철없이 너무 일찍 피어서 동백처럼 통째로 툭 절명하고 다시 피어서는 절명하곤 하였다. 

중남미와 북만주 답사길! 북만주의 자작나무는 북두칠성과 접속하고 고금의 이야기를 담은 흑룡강은 동해로 흘렀다. 안데스 알티플라노 고원의 사막은 사라진 잉카의 남십자성과 접속하고 있었다. 태양을 연모하여 마추픽추 고원으로 간 여자는 시원의 우루밤바강물에 산 아래에서 묻혀 온 근대의 흔적이 얼룩진 발을 씼었다.

북만주의 달은 좌우로 떴고, 적도의 달은 상하로 떴다. 시간과 남북의 자침이 변주하는 에콰도르 적도의 하늘에 별들이 숯불처럼 쏟아졌을 때 나는 내 사랑의 자침을 돌렸다. 생명들은 모질게 땅에 뿌리박고 하늘을 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정천입지 합화혼원(頂天立地 合和混元)이었다.

 

   
그 사랑은 철없이 너무 일찍 피어서 동백처럼 통째로 툭 절명하고 다시 피어서는 절명하곤 하였다. / 사진 한승훈

어느날 나는 20만 마리의 돼지가 살처분되는 비명소리를 들었다. 하루 3명의 노동자가 된장국 끓는 집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있다. 하루 10명 넘는 이들이 길에서 차에 죽는다. 하루 35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그 비명소리에 나는 진보도 보수도, 서초동 촛불과 광화문 태극기에도 낄 수 없었다. 서초동도 광화문에도 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그레타 툰베리의 눈물은 북극 소녀의 철딱서니 없는 짓에 지나지 않았다. 지구적 불평등을 낳는 플랫폼기업들을 사람들이 혁신이라고, 스타트업이라고, 4차 산업혁명이라고 외치는데 나의 벗들은 고공 망루에 있었다.

기후 위기와 노동대전환이 불평등을 코로나19처럼 유행시키며 적군처럼 진주해 오는데 수십억 인류 공통의 절박한 과제 해결의 필사적인 조치는 없었다. 권력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몰두하는 국가주의에 동의할 수 없었다.

국가주의 좌파는 서초동에서, 국가주의 우파는 광화문에서 각자의 라이언 일병을 호출해댔다. 갑론을박하는 국가어용지식인들이 서로를 헐뜯으며 낡은 체제를 열심히 수호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젠더평등, 생태, 노동,  소농, 마을은 국가의 엑서사리에 지나지 않았다. 지진이 나는데 백화점 쇼케이스에서 빛나는 보석에 군침 흘리는 격이었다. 

그들의 성 밖에서 나의 밤은 안개처럼 적막하게 떠돌았다. 아침은 아침이 아니라 밤에 메달려 있었다. 내일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었다.  

 

태양, 달, 별들이 낮에도 밤에도 일터에서도 주막에서도 떠올랐다. 그들은 뜨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의 시간과 공간이 밤과 낮을 바꾸었고 옛과 오늘을 이었다. 동서남북이 따로 있던가?

같은 시간인데 겨울과 여름이고 낮과 밤이었다. 북반구에서 남반구 여름의 크리스마스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지구에 도착하는 별빛이 수십억 년 전의 옛이건만 고대의 영성은 퇴보하고 사라졌다. 

나는 그 사랑에 이름을 붙였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민주주의도, 대한민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아닌 지구공유지였다. 자연주의였다. 태양이었다. 태양족, 그 보다 작게는 지구족이었다. 나는 태양의 고원으로 간 여자를 좇았다. 그 여자는 북방의 신목 버드나무였고, 안데스의 태양이었으며, 생명의 대지였다. 

지구에, 북두칠성에, 남십자성에, 우주에 선과 악이 어디 있으리오. 진리는 우주 자체이다. 사람들이 지 잘난 맛에 선과 악을 만들었다. 진리는 선도 악도 택하지 않는다. 진리는 불택선악이다. 지구주의였다.

홀로세(Holocene Epoch, 沖積世)도 인류가 버린 쓰레기가 지층을 이룬다는 인류세 (Anthropocene Epoch,人類世)도 아닌 지구세(Earth Epoch, 地球世)였다. 만인만물에 하늘이 깃든 지구였다. 네가 있으니 내가 있구나. 나는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잉카의 마추픽추 봉에서 우루밤바강 물굽이를 보며 천변만화하는 산정의 볕에서 나는 다시 사랑을 시작했다. 

 

   
고금의 이야기를 담은 흑룡강은 동해로 흘렀다.

사라진 세계를 찾아서 사랑을 다시 시작했다. 절절하니까, 그리우니까, 할 일 없으면 절절하고 그리운 사랑을 하는 게야. 얼마나 좋은가! 절절해야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 아닌가? 사랑이 끊긴 날들은 무료하다. 적막하다. 사랑이 절절하면 낙엽지는 소리, 밤이 내리는 소리, 눈이 쌓이는 소리도 들린다. 별빛이 전하는 우주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글자 없는 편지를 쓰고 또 썼다. 

 

 저 고루한 소유권의 자유 대신에 스스로 자(自)그럴 연(然)스스로 그러한 본성, 인위를 더하지 않은 무위 그 자체인 자연(自然)을 생각했다.

가장 자연스러움으로서의 만인만물이었다. 자연스러운 만인만물에서 인간을 떼어낸 이원론적인 주객체의 구분, 타자화와 지배화인 '만물의 영장' 근대주의는 비극의 서사였다. 인간은 자연을 탈출해서 만인만물을 지배하려는 만물의 영장을 꿈꾸었으나 몇 백 년도 되지 않아 일장춘몽이 되었다.

그 몇 백년 동안 학살로 사라진 인종은 얼마인가? 사람들은 잊는다. 서구의 번영은 사라진 마야, 잉카 등 아메리카 원주민과 아시아, 아프리카 민중의 눈물임을! 그러고도 근대는 두 번의 세계전쟁을 치루었다.

자연을 수탈한 물질개벽으로 인간들은 이제 그 대가를 요구받게 되었다. 기후•생태위기로 지구가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결코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없음이 선명해지고 있다. 근대의 기획 만물의 지배자 인간주의는 한갖 신기루로 이미 파산되었다.  

그 인간주의가 만든 자유, 이성, 민주, 시민, 국민국가는 이제 더는 기워 입을 수 없는 낡은 외투가 되었다. 

경쟁하는 이성이 아닌 모시고 협동하는 영성을 찾았다. 저자 시(市)백성 민(民) 시장에서 권리를 획득한 시민(市民)이 아니고 모실 시(侍) 시민(侍民)으로 전환하고 싶었다. 사회에서 태어나 사회를 지배하는 국가가 아니라 마을과 마을이 연합한 연방을 꿈꾸었다.

국가의 국민이 아니라 마을의 자치민이었다. 권력 질서의 합법화인 민주가 아니라 스스로 항산항심하는 자치, 자율, 자주였다. 평등은 자유, 민주, 국가에서 잉태될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평등은 자연, 영성, 자치, 시민(侍民)의 산물이다. 

 

 사회의 것은 사회의 것이다는 역사상의 국가사회주의는 한물 간 옛노래가 되고 말았다? 누가 혁명을 반정으로 강등시켰는가? 묻고 또 물었다. 한물간 옛노래여도 그 사회에는 인간의 연대가 개인주의 사회보다 몇 십 배는 더 끈끈하고 순박해 보였다.

쿠바의 낙천이란 바로 그것이었다. 꿈을 찾는 꿈을 꾸는 쿠바노의 카리브해는 젖어 있었지만, 그들의 눈동자는 인류의 깊은 연민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바나 거리의 그 눈동자를 나는 잊을 수 없다.  

사회 자체가 인위로서 만든 것이어서 사회도 자연에 속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사회의 이치는 자연의 이치와 대립하고 있었다. 우주가 지구를 만드는데 좁쌀 하나 보태지 않은 인간들이 서로를 갈라 니것 네것 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소유는 국가의 소유인 국유도 아니고, 자기 이익의 극대화라는 합리적인 개인의 사유도 아닌 각각의 공동체 단위의 공유이다. 갯벌은 지금도 공유지로서 '공유지의 비극' 같은 것은 없이 훌륭한 자치노동을 이루고 있다.

태안의 한 어촌 마을에서는 갯벌의 수익으로 마을연금을 지급하고 있다. 그 많던 마을의 공동 논밭은 어디로 갔을까?  도시마을의 공유지와 공유작업장을 생각한다. 

자치 공유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가 아니라 자치관리 마을, 자주관리 공장의 연방으로서 자치자주연방이다. 모든 것은 이러저런 계로 나뉜 여러 사회의 것이 아니라 지구의 공유물이다. 하여 어제는 지구 공유지인 울란바트로, 아바나에서 살다가 내일은 파리에서 글피는 전주에서 산다.

   
페루 마추픽추 고원으로 간 필자는 시원의 우루밤바강물에 산 아래에서 묻혀 온 근대의 흔적이 얼룩진 발을 씼었다.

흥개호의 물오리에게 러시아와 중국이 있겠는가? 사람이나 경계를 짓지. 새벽닭이 울면 조중러 삼국이 함께 깬다는 두만강 하구 접경에서 국경이란 없이 삼국의 초목들이 모두 깨어났다.

진보, 보수의 낡은 체제 안에서 다투는 이들은  그곳에서 다투라. 그들이 선택한 것이니. 그래 당신이 삼성마을이나 구글마을이 좋다면 그렇게 살라. 말리거나 욕하지 않겠다. 나는 삼성마을이 아니라 나무를 다듬는 만경강변의 목수마을에서 살겠다. 

나는 나의 서랍을 열겠다. 기왕에 만들어진 세상을 전복, 탈취하여 새 새상을 여는 정변을 통한 혁명이 아니었다. 혁명을 혁명해야 했다. 전복과 탈취가 아닌  지구공유지의 작은 마을에 새로운 질서, 아니 자연스러움을 가진 마을을 창발하는 꿈을 꾼다. 서로 다른 마을이 연대하려면 아메리카원주민이 이미 실현한 연합의 연합으로서 연방이어야 하리라. 단일한 질서, 단일한 삶을 가진 국가주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을 가진 마을들이 연합한 연방을 꿈꾼다. 

일국에서 비자본제 혁명이 일어난다고 해서 이미 지구자본주의로 연결되어 있는데 견뎌낼 수 있을까? 혁명의 단위가 국가여야 하는가? 경찰도 검찰도 국회도 군대도 우리 것이 아닌데... 하여 그들이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자치마을로의 혁명을 생각한다.

디지털로 연결된 지구연방에서 우후죽순처럼 시도 때도 없이 이 마을 저 마을에서 마을 혁명이 가능하다. 일국적 단위가 아닌 마을 단위로 가능하다. 국가에 진압당할 수도 있지만 마을이 스스로 일구는 새 세상은 이제 동시적으로 지구화되는 디지털 무기를 가지고 있다.

자본이 디지털을 초불평등의 싹쓸이 삽으로 쓴다면 우리는 지구마을연방의 밧줄로 쓰겠다. 그래서 마을혁명은 동시적인 지구혁명이다. 국가 따위는 무시하고 각각의 마을을 연결한 교통로를 파고 한반도연방, 동북아연방, 지구연방의 지구혁명으로 가는 길을 찾아야겠다.

불평등은 모두에게 단일한 삶을 강요하는 어떤 주의에서 시작된다. 다양한 삶을 받아들이면 불평등은 줄어 든다. 정치•경제•사회•문화 권력의 존재가 불평등의 원인이다. 국가 자체가 권력의 덩어리이다. 국가민주주의가 아니라 지구자치주의이다. 권력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존경의 권위 연합으로 바뀌어야 한다.

 

 기성의 체제 밖에 기성과 다른 마을을 세워 기성체제와 때로 대립하고 때로 협력하는 이중사회, 다중사회,  존경의 권위 사회와 권력의 통치 사회가 공존하는 이중권력체제가 어떤 임계점에서 기성의 낡은 국가와 사회는 철폐, 또는 소멸하고 사회의 자연화 전환이 시작된다.

 

   
꿈을 찾는 꿈을 꾸는 쿠바노의 카리브해는 젖어 있었지만, 그들의 눈동자는 인류의 깊은 연민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바나 거리의 그 눈동자를 나는 잊을 수 없다. / 강주영 전북포스트 편집위원

 좌도 우도 진보도 보수도 아닌 지구공유지로 돌아가야겠다. 한동안 나는 사회가 낳았고 사회가 길렀다고 믿었다. 지구는 없었다. 50이 넘어서야 나를 낳고 기른 것은 사회까지를 품어 안은 지구, 우주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구공유지의 닭울음 소리 함께 들으며, 떠오르는 태양의 빛과 기를 받고, 심신을 가다듬고 수련하는 태양족의 마을로 돌아가겠다. 고독한 개인으로 가득한 각자위심을 버리고 만인만물이 서로를 보듬는 이천식천의 마을로 동귀일체해야겠다.

끊어졌던 길을 이어 다시 가야겠다.

국가는 멀고 마을은 가깝다. 일과 주거가 함께 있는 마을, 경쟁도 배제도 없는 협동이 가득한 곳, 마을공유지와 마을작업장으로 항산하고 항심하여 마을을 떠나는 이가 없는 곳, 이 마을이 저 마을 손을 잡아 마침내 천하의 마을들과 연결되는 곳, 국가의 통치를 받는 마을이 아니라 마을과 연방이 동등한 곳, 마을이 국가를 매개하지 않고 지구마을 어느 곳이라도 함께 디지털 연방을 세우는 곳, 지구연방민들의 마을, 나는 그 마을에서 사랑하고 일하고 어깨를 서로 빌려주며 기대어 살고 싶다. / 강주영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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