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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실가와 몽상가 - 2020 신년기획 <지역을 떠올리자>
강주영 편집위원  |  kjyn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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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1.06  11: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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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정국과 사회를 보니 김훈의 보수주의 소설 <남한산성>이 떠오른다. 남한산성 안에 갇혀서 다투는 김상헌, 최명길은 당대의 논객이다. 성안에 갇힌 두 사람에게 우리 사회의 논객들이 겹쳐진다.

성 밖에 있는 나에게 그 둘은 공허하다. 근대 밖에 있는 사람은 근대 안에 있는 사람들과 다른 세상을 산다. 

나는 이상주의자, 급진주의자, 몽상가라는 소리를 듣지만 유토피아는 늘 수정될 수 있기에 잠정적이다. 유토피아는 오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 현재 단위로 생각하지만 떠오름-창발의 사고는 시공간에서 어제, 오늘, 내일을 구분하지 않는다.

 

   
성안의 주전론 김상헌, 주화파 최명길의 논의는 성밖의 사람들에게는 공허하다. / 영화 남한산성 스틸 컷. 

뉴턴의 고전역학과 달리 근현대의 양자역학은 탐구자의 탐구 방법에 따라 세계가 다르다고 한다. 세계는 정해진 궤도를 따라가는게 아니라 확률적으로만 예측가능하다. '불확정성의 원리'라고도 한다. 다른 말로 세계는 중첩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 탐구 방법은 중첩된 세계에서 사람들이 먼 훗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지금 쓰자고 한다.

선택 가능한 여러 중첩된 서랍 중에서 먼 훗날의 서랍을 연 셈이다. 양자역학에서 세계는 단계적이지 않다. 세계는 일직선의 진화가 아니다. 때로는 비약과 팽창 폭발도 있다. 그래서 핵폭탄을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내일인 것이 내게는 오늘일 수 있다. 아인슈타인에게 시공간은 상대적이다. 나는 시공간, 탐구 방법이 달라서 몽상가 소리를 들어도 반박하고 싶지는 않다. 굳이 이쪽 세상으로 오라고 하지 않는다. 그건 각자 선택의 몫이다. 여러분이 몽상가라고 비난하는 것들이 물리학에서는 떠오름-창발이라고 한다. 

 

개미는 전체로서의 개미집을 알지 못한다. 설계도를 모르고 그저 자기 일을 한다. 개미를 말하면 현실가요, 개미집을 말하면 몽상가이다. 그렇지만 개미와 개미집은 한 짜임새로 있다. 자기짜임, 자기조직화는 한 세계이다. 개미 하나 하나를 조절하는 왕개미는 없다. 여기서 개미집이 창발- 떠오름이다. 개미집은 개미로 환원되지 않는다. 

독자는 알아챘을 것이다. 현실가는 개미집이라는 이상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이다. 현실에서 현실을 만드는 것에 변화는 없고, 유능한 것도 아니고, 질적 차별도 없다. 

물리학자, 사상가들은 그 개미집을 보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적용가능한 보편법칙을 찾으려고 한다. 그 보편법칙을 보편이론이라고도 하고 섭리, 자연 이치, 우주 이치라고도 한다. 이것을 의인화하면 조절자(창조자?) 신이 된다. 본디 보편자에게서는 하나이지만 나누면 물리학, 철학, 인문학, 경제학, 사회학  생물학, 정치학....등이 된다. 위에서 말했지만 양자역학에서 세계는 확률적으로만 예측가능한 불확정성의 중첩된 시공간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역을 창발- 떠올리고자 하는 이들은 지금의 상식에 얽메이지 말라는 것이다. 몽상가를 자처하라는 것이다. 

중첩된 세계에서 서랍은 여러 개이다. 지금 상식에 얽메이면 지역의 자기짜임, 자기조직화로서 떠오름-창발을 이끌 수 없다. 지역일을 하려고 하는 이부터 스스로 떠올라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같이 논의할 내용에 때맞음 - 공감을 가질 수 있다. 

 

   
흰개미집의 내부 구조, 개미는 개미집을 짓지만 전체 설계도를 아는 개미는 없다. 개미집은 떠오름-창발이다. 개미집은 개미로 환원되지 않는다.

다시 남한산성으로 돌아 온다. 둘은 성리학 수호에 이해가 같지만 김상헌은 명과의 의리에 집착하는 소중화의 공허한 명분론자요, 최명길 역시 명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일시 화를 모면하고자 하는 소중화론자이다. 둘다 친명론자로서 한때의 방편이 다를 뿐이다. 내게 그 둘은 구분되지 않는다. 잘디 잔 소설이다. 

김훈은 소설 <남한산성>에서 산성 안에 갇힌 자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러나 산성 밖에서 대륙의 시세를 읽고 임진년에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선조의 반역을 기억하는 백성들의 이야기를 다루지는 않는다.

대장쟁이 서날쇠를 주체적으로 자각하는 민중의 상징으로 하지 않고 김상헌의 졸개로 그린다. 삼남의 민중들이 초모하여 남한산성에 닿지 않는 까닭은 중요하지 않다. 이미 선조임금 때 기축옥사에서 호남선비가 천여 명 도륙되었고, 그보다 앞서 김덕령 의병장이 선조에게 매를 맞아 죽었다. 이미 백성이 다 알고 있는 것을 인조, 김상헌,  최명길만이 모르고 있었다.

 

현재의 남한산성 밖에서 미래는 들끓고 있다. 지금 성 밖의 백성들은 성안의 최명길, 김상헌, 인조와는 다른 시공간을 살고 있다. 아마도 소수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미래는 늘 소수가 연다.

지역을 창발하고 떠올리자는 분들은 성 밖에서 이야기해야 한다. 소수파를 자처해야 한다. 몽상가가 되어야 한다. 남한산성은 청병에 의해서가 아니라 백성에 의해 무너져야 한다. / 강주영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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