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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의 '맑은 시비평'> 9. 꽃의 자술서 - 신정일
이병초  |  jbpost20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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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2.05  1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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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 선생을 그의 글방에서 만났다. 사진 = 강찬구 기자 /

  시는 감춤의 미학을 옹호한다. 주제의식을 강하게 피력할 이유가 없는 한 시적 상황을 굳이 설명하지는 않는다. 시의 기본에 해당되는 이 전제가 시 질서 전체에 영향을 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시가 가진 다양한 장치와 신축성은 놀랍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신정일의「꽃의 자술서」를 읽다보면 이 점은 분명해진다. 시에 표면화된 “드러냄의 미학”이 감춤의 미학 못지않은 시적 울림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1981년 9월 안기부에서

자술서를

쓰다가

 

나는……

 

죽어

시체屍體 되어

땅에 묻힐지

물에 띄울지

허공에 떠돌지

모를

형광등 불빛만 환한 방구석에서

다시 못 볼 것 같은

푸르른 하늘

흐르는 구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새

그리운 사람들

떠올리며

나는

 

써야 하는데

목이 메어

생각하다가 눈물이 흘러서

 

나는……

가난이라고

배고픔이라고

시詩라고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하고

 

발가벗겨진 나는

입술을 깨물며

                      -신정일,「꽃의 자술서」, 부분

 

  꽃 한 송이로 비유된 시인의 몸. 발가벗겨진 채 짓이겨진 몸은 “형광등 불빛만 환한 방구석”에 갇혀 죽음이 두렵다. 몸을, 고문당해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몸을 더 이상 학대하지 말라고, 몸이 삶의 유일한 확신이었다고 시인은 목메었을 터이다. 그의 숨 막히는 몸부림이 당장 튀어나올 것 같다.  

  이 시는 한 자연인이 고문당한 뒤 자술서를 강요당하는 상황을 진술한다. 호흡을 짧게 끊어간 시행마다엔 피 냄새가 짙게 배었다. 한 개인의 영혼이 박살나는 치욕적인 현장에 끼어들 수 있는 것은 “살고 싶다.”는 욕망밖에 없다. 인류가 태산처럼 쌓아올린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 발가벗겨진 채- 자술서를 강요하는 자 앞에서, 죽음 앞에서 자신의 존재감이 갈가리 찢기는 현실을 목도할 뿐이다.  

  시인이 당한 모멸감, 죽음보다 더 두려웠을 기억은 서정시로 돌아왔다. 이 시에 표면화된 미학은 희망과 절망이 맞물려 있던 1980년대를 호출한다. 새 세상을 꿈꾸며 출렁였다가 악법에 치어 모질게 고문당했던, 그러함에도 거목이 되기보다는 숲이 되고 싶었던 이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치열하게 그리워했던 이들을 불러낸다.

  신정일의 시는 묻는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돈과 문명을 신앙처럼 모시고 사는 이 유쾌한 시절에 그들은 어디에서 작은 꽃 한 송이로 피어 있는가. / 이병초 시인<웅지세무대 교수>

 

   
이병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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