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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완결판 '신택리지' 낸 신정일 이사장 <만남>
강찬구 기자  |  phil6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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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0.24  10: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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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 선생(64)의 삶은 ‘파란만장(波瀾萬丈)으로 표현할 만하다. 가슴 속에 많은 아픔을 담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걷는 것뿐이었다. 그 걸음걸음으로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밟았다. 그가 전국을 더터 지금까지 낸 책이 90여권.

신정일 선생이 최근 출간하고 있는 ‘신정일의 新 택리지’(쌤앤파커스 펴냄)는 그의 걷기 인생의 '완결판'이라 할 만하다. 지역별로 낱권을 내서 총 11권이다. 현재 5 권이 나왔으며 6 권이 인쇄 중이다. 책이 묵직하다. 이중환의 ‘택리지’의 21세기형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신정일 선생을 그의 서재 겸 글방인 집에서 만났다. / 강찬구 기자

그의 서재 겸 글방인 집에서 그를 만났다. 전주 시내 아파트에서 가족들과 생활하고 있다. 그의 집은 온통 책으로 가득했다. 거실과 작은 방, 그가 글을 쓰는 안방은 절반이 책으로 쌓여 있다. 거실 벽의 커다란 ‘대동여지도’가 그의 꿈을 대변한다. 

대화 테마에 따라 세 주제로 구분했다. 걷게 된 사연과 걷는 이유, 우리 국토를 조명한 새 책 '신정일의 신택리지', 그리고 치유되지 못할 상처로 남아 있는 간첩단 조작 사건으로 이어진다. 

 

   
신정일 선생의 거실에 있는 커다란 '대동여지도'가 그의 삶을 대변하고 있다. 

♦"왜 그렇게 걸으십니까...?" 

제일 먼저 “왜 그렇게 걸으시냐...?”고 물었다. 그는 외국에서 돌아온 다음 날 새벽에도 행장을 꾸린다. 돌아온 대답은 의외다.

“답사나 강연이 밀려드니 쉴 틈이 없어... 우리 땅 걷기 회원이 1만6천명이나 되다 보니 그 분들이 그룹으로 찾고, 또 여기저기 기관에서도 답사를 요청하고... 요즘은 외국을 답사하자는 요청도 많아. 그리스나 ‘카잔차키스’의 고향인 프라하, 중국 역사 기행... 그 길을 걸으면서 함께 얘기도 나누고, 글감도 얻고...”

국내에서는 보통 한번 나가면 1박2일로 50km 정도를 걷는다고 한다. 하루에 25km를 걷는 꼴이다. 그가 가장 많이 걸어 본 것은 하루에 63km. 낙동강을 혼자 걸으며 숙소를 찾지 못해 그리 걸었다고 한다.

 

   
신정일 선생의 길에 관한 저작. 

“길을 걷다 보니 모든 길이 역사의 현장이더라고... 영남대로, 삼남대로, 관동대로 모두 삶의 눈물이 배인 곳이야... 수많은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걸었던 길, 우암 송시열과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이 유배를 가며 걸었던 길. 모두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더라고... 그래서 길을 우리의 문화재로 지정하는 작업을 하게 된 거지...”

그의 노력으로 문경새재, 대관령 옛길 등 9개의 길이 ‘명승’ 문화재로 지정됐다. 이 작업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진행한다고 밝혔다.

"남원에 ’길 문화관‘을 만들기로 했어... 송하진 지사께서 뜻을 같이해서 추진하게 됐지. 이름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을 해야 할 거 같어... 옛날 남원역사. 지난해 4월에 시작은 했는데 인접한 남원성 관련해서 문화재 문제가 걸려서 조금 지체되고는 있지만... “

 

   
박원순 서울시장과는 오래 전부터 뜻을 같이 해 서울의 길에 대한 작업을 하고 있다.

서울시에서도 박원순 시장의 요청으로 ‘대한민국 길 박물관’과 ‘한강 박물관’을 구상하고 있다. 박시장과는 오래 전부터 뜻을 같이해 왔다. 지난해 서울의 ‘걸을 수 있는 길’을 정리하기도 했다.

 

♦"우리 땅에 사람이 살만한 곳은 어디인가요...?"

‘신정일의 신택리지’로 화제를 바꿨다. 이 책은 전국을 샅샅이 발로 걸은 그 만이 쓸 수 있는 대한민국 인문지리지다. 앞으로도 이 같은 책은 나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옛 길들이 사실은 지금 보존하지 않으면 사라질 상황이다.

“이중환 선생이 250여년 전에 신임사화로 유배를 떠나게 되는데 그 때 나이가 38세야. 그래서 전국을 20여년 동안 답사하고 나서 2년에 걸쳐 글을 썼어. ‘과연 사대부들이 살만한 곳은 어디인가...?’라는 대명제를 가지고... 그렇게 살만한 땅을 찾아 ‘택리지’를 쓰게 된 거야...”

 

   
'신정일의 신택리지' 11권 가운데 현재 발행돼 세상에 나온 5권.

“살기 좋은 곳은 지리(地理) 생리(生理) 인심(人心) 산수(山水), 이 네가지가 좋아야 하는데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안 돼. 택리지에서는 영남 4대 길지를 꼽고 있고, 호남에서도 완주 봉동 율담, 구례 구만리 등을 꼽고 있어. 전주도 사대부들이 살만한 땅으로 꼽히고...”

그는 이중환이 전라도에는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호남의 길지는 고려 때부터 내려 온 것을 정리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김정호에 대해서도 많이 돌아다닌 것도, 옥살이를 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출판사 편집장’격이라고... 많은 자료를 모아서 정리한 것 뿐이라는 것이다. 

 

   
 

어사 박문수와 관련해서도 어사 역할은 딱 한번뿐이라고 말했다. 각 지역에서 그를 활용한 것이고, 특히 TV 드라마 같은 데서 역사를 많이 왜곡한다고 아쉬워 했다. 나중에 ‘역사 바로잡기’ 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도 했다.

 

♦"형제 간첩단 사건은 무엇이고 어찌된 연유인지..."

화제를 ‘형제 간첩단 사건’으로 옮겼다. 그는 1981년 8월 전북대 앞에서 시식코너를 하던 중 정보 기관에 끌려가 심한 고초를 겪었다. 그의 걷기는 이 때의 사건과 맞물려 있다.

“새벽에 시식코너에서 자는 데 누가 ‘신정일’하고 불러... 문을 열어 줬더니 건장한 남자들 5-6명이 들이닥쳐서 나를 잡더니 수건으르 씌우더라고... 그대로 잡혀갔지.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어느 지하실로 끌고 가더니 ‘옷 벗어’ 그러더라고... 근데 그 목소리가 익은 목소리야. 눈을 풀어줘서 보니 우리 시식코너에 왔던 사람이야.”

 

   
그는 간첩단 조작 사건에 몰려 1주일 동안 고초를 겪었다. 결국 풀려나긴 했지만 평생의 상처로 남아 있다. 최근에 낸 시집 '꽃의 자술서'에 당시 내용을 담았으며, 그 시를 읽으며 회한에 젖었다. /

“4개월 전에 시식코너에 와서 이거저거 물어봤던 사람이야... 깜짝 놀랐지... 꼬치꼬치 캐묻는 게 이상하다고 내 동생이랑 대학생들이 그 사람을 잡아서 파출소로 끌고 갔었거든... 근데 자기들끼리 눈빛을 주고받는 듯 하더니 파출소장이 ‘별거 아닌 거 같다’고 하면서 정리 하더라고... 그런 가 보다 하고 돌아왔는데 그 사람이 거기에 있는 거야...”

그는 안기부 지하실에 끌려가 발가벗겨진 채 1주일동안 고문을 당했다. 

“불을 끄면 무자비한 폭력이 날라오고... 내가 중학교를 중퇴하고 출가했다가 절에서 나온 뒤, 정말 갈 곳 막막한 상황에서 제주도로 갔거든... 제주도에서 노가다를 죽으라고 했고, 결국은 작은 책임자까지 하면서 돈을 좀 벌었어. 그걸로 전북대 앞에 시식코너 차려서 일하는데 그 돈이 북한에 가서 받아온 거라고 시인하라는 거야...”

 

   
그의 집안은 온통 책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는 2만권의 책을 읽었으며, 그가 낸 책만도 90권에 달한다. 

아버지가 노름에 빠져 중학교 등록금을 노름판에서 날리자 그는 14살에 가출을 감행한다. 이듬해 스님이 되기 위해 화엄사 구층암으로 들어갔으나 두달만에 나오게 된다. 주지스님은 “너는 절에서 있을 팔자가 아니다‘며 밀어냈다. 절에서 나온 뒤 임실과 전주 등지를 전전하다 아교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마침 신제주 개발 붐을 타고, 제주도가 많은 일손을 필요로 했고, 그는 거기에서 속칭 ‘노가다’를 해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책을 보고, 음악을 들으면서 일한 것이 나중에 전주에서 시식코너를 차리는 기반이 됐고, 결국 그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그는 1주일동안 버텨낸 뒤 지하실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 곳을 나오면서 두 개의 지장을 찍었다고 한다. 그들이 불러 준 자술서에 직인을 찍었고, 또 이 곳에서 있었던 일을 죽을 때까지 말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직인. 그 인장을 찍고 햇살 아래로 나와 펑펑 울었다고 한다. 살아 온 세월이 서러워서... 

 

   
그의 슬픈 과거를 토해 낸 시집 '꽃의 자술서'

그는 이 얘기를 그동안 입 밖에 낸 적이 없다. 죽을 때까지 가슴 속에만 간직하겠다던 직인. 그 강압된 약속이 무서워서... 그러다가 최근 ‘꽃의 자술서’라는 시집을 통해 세상에 얘기했다. 시집 속에 들어 있는 ‘꽃의 자술서’라는 시제의 일부를 소개한다.

1981년 9월 안기부에서 / 자술서를 / 쓰다가 // 나는... // 죽어 / 시체(屍體)되어 / 땅에 묻힐지 / 물에 띄울지 / 허공에 떠돌지 / 모를 // (중략) // 나는 /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하고 / 발가벗겨진 나는 / 입술을 깨물며 / 가출을, 출가를 / 휴전선(休戰線)을 철원을 / 백오미리 야포를 / 제대 후, 아교 공장을 / 벽돌과 모래를, 신제주를, / 아파트를, 그랜드호텔과 제주도의 관공서를 // 나는... / 썼다 / 어설픈 사랑도 / 죽음을 목전에 두신 아버지, / 실패한 사업 / 친구들 이름 / 어머니 // 나는 몇 시냐고 물어보고 / 기다릴 사람들 생각하며 / 죽은 개 이름까지 / 세 살 무렵 죽게 아팠을 때 / 죽지 않았음이 잘못이었다고까지 / 썼다 // (중략) // 마침표를 찍고, 인주 묻혀서 / 자술서에 인장을 찍었다 / 내 젊은 날의 꽃은 영구보존 / 종이 속에 갇혔다 <끝>

그는 그곳에서 평생 가슴에 못이 될 경험들을 하게 된다. 

“그 사람들 중에 나에게 잘해 주던 사람이 하나 있었어... 다른 이들과 다르게 말쑥하게 입은 그는 내게 항상 공손하고, 문학 얘기도 하고, 담배도 한 대씩 주고... 그 사람만이 나를 인간적으로 대했는데, 결국 그가 내 자술서를 작성하고 인장을 찍게 했어..." 

 

   
인터뷰 도중 출판사 편집장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파안대소하는 신정일 선생.  

"어느 날은 내가 지하실에서 만신창이가 돼 있는데, 그가 다른 사람에게 커피를 가져오라고 부르더라고... 여직원이 들어오는데 깜짝 놀랐지... 아는 얼굴이야... 우리 시식코너 양식 주방장의 사촌 여동생. 우리 시식코너에 자주 들렀던... 그 사람을 거기서 보니 내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다 알고 있던 의문에 실마리가 풀리더라고... 직원 동생이라고 시식코너에 드나들면서 내 일상을 모두 감시한 거야...”

상처가 컸던 그는 그 때부터 걷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서... 문학과 역사를 혼자 공부하면서 자신만의 인문적 식견을 쌓고, 이같은 외로움이 오늘날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이 책장의 세로로 가운데 줄 여섯 칸이 모두 그가 쓴 책이다. 

“그는 전기 고문 안 당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머리가 상하지 않아 지금 글이라고 쓸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라는 말이다. 

그가 세상에 내놓은 인문지리지 ‘신정일의 신택리지’는 30년 걷기 인생의 종결판이긴 하지만 그는 앞으로도 걷기와 글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주어지는 대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길 위에서 사유한 것들은 그의 90권에 달하는 저서에 오롯이 담겨 있다. / 강찬구 기자

 

   
신정일 선생.

신정일 선생은 진안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행상을 나가는 어머니를 도우면서 학교를 다니다가 초등 5학년 때 진안군 글짓기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게 됐다. 그의 책읽기와 글쓰기는 이 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14세때 아버지가 중학교 등록금을 노름판에서 잃고 중학교 진학이 어려워지자 가출했다. 여비가 떨어져 대구에서 진안까지 꼬박 1주일을 걸었다고 한다. 지독한 걷기 인생의 복선인지도 모른다.

그는 전국 방방곡곡을 도보로 답사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낸 책이 무려 90여권. 2만권의 독서량이 글을 쓰는 밑바탕이 됐다.

발로 다니며 쓴 책은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 ‘대한민국에서 살기 좋은 곳 33’, ‘신정일의 한강역사문화탐사’, ‘지워진 이름 정여립’ 등으로 나올 때마다 관심을 끌었다. 대한민국의 걷기 열풍은 그에게서 비롯됐다. 이번에 낸 ‘신택리지’는 그의 걷기 글쓰기의 완결판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1985년 ‘황토현문화연구소’를 설립·운영해오다 2005년부터 (사)우리땅 걷기 단체를 통해 소외된 지역문화 연구, 국내 문화유산 답사프로그램 운영, 숨은 옛길 복원 등의 사업을 진행 중이다. 문화사회학자로 불리고 있다. / 강찬구 기자

 

   
 
   
 
   
 
   
 
   
인터뷰 도중 출판사 편집장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보여준 다양한 표정들 / 강찬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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