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추리소설을...?

  집엔 책이 거의 없었다. 교과서도 제대로 장만하지 못하고 살 정도로 가난하였으니 책을 살 돈이 어디 있었으랴. 동네 친구들 집에 이 핑계 저 핑계 삼아 놀러가서 한두 권씩 빌려다가 꼬부라져 읽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책들은 대부분 소설류였는데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빅토르 위고 등이었다. 2단의 세로줄 쓰기로 되어 있는 책들로 ‘정음사’라는 출판사에서 톤다운된 녹색 책 커버 색상까지 기억이 생생하다. 아마도 세계문학전집류였을 것이다.

간혹 언니 오빠들이 한쪽에 꼬불쳐 놓고 읽었던 연애소설도 초등학교 4~5학년에 해치웠지 싶다. 사실 세계 유명작가들의 작품보다 국내의 연애소설이 훨씬 재미있었고 지금까지도 어렴풋하다. 줄거리 이런 것은 죄다 까먹어버렸다. 

아궁이 깊이 보릿짚을 한꺼번에 집어넣고 정신을 팔고 읽었던 장면과 왕겨를 몽땅 밀어 넣고 풀무질하며 책을 읽다가 머리카락을 꼬실라 먹었던 웃지 못 할 해프닝 등은 곧잘 떠오른다. 그 책의 주제랄지 교훈 따위는 전혀 기억에 없다. 때때로 주인공이나 어떤 사건들은 우연치 않은 상황에 직면하거나, 유사한 일이 벌어질 때 언뜻언뜻 스치기도 한다.

여하튼 나의 청년기까지의 책읽기는 문학 중에서도 소설을 주로 읽는 편향적인 측면이 다소 있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사실주의에 입각한 소설 위주로 말이다. 지금까지도 고착화된 그 버릇을 바꾸기가 여간 쉽지 않다. 학생들에게는 골고루 읽으라고 립싱크 하듯 말하지만, 제 병 제가 고치지 못한다고 했던가...? 뿌리 깊이 밴 듯싶어 요새는 일부러 피할 때도 있다.  

스위스 출신의 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추리소설 '약속'

  내가 추리소설을 읽게 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이다. 우연히 서평을 들여다보다가 노르웨이의 추리작가 ‘요네스 뵈’에 대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그쪽 방면에서 꽤 유명하다는 것과 그의 어머니가 도서관 사서로서 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자격지심이 살짝 들었다. 책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도 했지만, 사서라는 직업을 갖고 살아온 나는 자식들을 어떻게 교육했는가... 제대로 책을 읽게 했는가.... 반성의 지점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스노우맨』이라는 소설을 이삼 년 전 한여름 찌는 더위에 읽었다. 휴가중이였다. 우리 집에서 나의 공간은 서편에 위치한 부엌이다. 부엌일은 당연하거니와 나의 책읽기와 기타 소소한 작업, 멍 때리기 등은 이곳에서 이루어지는데 오전에는 선풍기를 틀지 않아도 될 만큼 제법 시원한 편이다. 

점심을 먹고 해가 머리 위를 지나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나는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만다. 우리 집 에어컨은 10년이 훨씬 지난 구형인데다 벽걸이 소형이어서 아예 켜볼 엄두가 나질 않는다. 중복 즈음이 되면 숨이 콱콱 막히곤 했다. 도서관에서 긴 기간 동안 근무하고 있지만 나는 가까운 공공도서관을 거의 이용해 볼 생각을 갖지 않고 살아왔었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자고로 도서관은 이럴 때 가는 곳이다. 시원하고 시설 좋지. 공짜이지. 나는 책 보따리를 챙겨 들고 3~4일 그곳에서 추리소설 2권을 읽었다.

  하여 나는 더운 여름에 읽을 책을 꼽으라면 추리소설을 1등으로 꼽는다. 올 여름에는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추리소설 『약속』을 읽었다. 휴가를 낼 것도 없이 동네 도서관을 찾아갈 겨를도 없이 아침저녁 이틀 동안 짬짬이 읽은 것이다. 

이 책은 『페터 비에리의 교양수업』이라는 아주 얇은 책을 통해 발견하게 된 책이다. 독특한 이 추리소설의 스포일러를 얼마나 덤덤하고 담백하게 써 놓았던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책이 또 다른 책을 부른 것이다. 

‘이게 무슨 추리소설이야’라는 질문이 들 만큼 내가 읽었던 기존의 몇몇 작품들과 달랐다. 사실 그동안 나는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낮게 평가하지 않았었는지 반성한다. 그리고 작가들의 상상력에 경의를 표한다. 독자인 나조차도 덩달아 상상력을 키우게 해주니 고맙기 이를 데 없다. 

꼰대라 불리어도 괜찮다. 잔소리 좀 하더라도 이해하시기를 바란다. 상상력과 창의력이 빈곤해 핀잔을 듣는 사람들 추리소설 많이 읽으시라. 이미지는 거의 없고 글자가 빼곡한 책으로 말이다. 당신의 머릿속은 온갖 상상의 나래들이 펼쳐질 것이다. 더운 여름에 읽는다면 금상첨화이리라. 등골까지 오싹해지고 말 테니까. 어느 순간 매미는 줄기차게 울고 여름이 막바지를 달리고 있을 것이다. 

『약속』, 이 소설집에는 <사고>라는 소설 1편이 더 실려 있다.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못했을 인생의 실수와 잘잘못을, 뜻하지 않은 사고를 만나 우연히 만난 사람들에게 죄상을 고하게 된다는 발상이 재미있다. 은퇴한 법조인들의 법정 놀이에 말려든 장사꾼이 잘못인지 모르고 저지른 일들을 고하다가 자책하고 자살에 이르게 되는 이야기가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나도 나이 50이 지나서야 내 가족사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그것도 엉뚱한 장소에서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거운 입을 열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교육받으러 가서 같은 조의 조원에게, 우연히 점심식사를 함께 하게 된 사람에게조차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터전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일본 추리소설 많이들 읽고 계시던데 이번 기회에 다른 나라 작품도 읽어 보시라. 어라...? 우리나라에는 어떤 추리 작가가 있지...? 등잔 밑을 모르고 있었다니.  / 이현옥(우석대학교 도서관 사서)

글쓴이 이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