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정에 나서다!

  역사책을 읽은 게 언제였던가. 정의가 누구의 편이든 피차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 지루하게 반복되는 피비린내가 나는 싫었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명백히 온고지신(溫故知新)일 터인데, 전쟁의 테두리에서 갇힌 채 정치사(政治史) 요약만 되뇌는 역사는 내게 새로운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삶은 연속성을 가지므로 역사는 생활사(生活史) 내지 문화사(文化史) 등에 초점을 맞추어 과거의 삶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현재 삶으로 이어졌는지를 밝히는 학문일 터인데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전쟁과 정치사는 역사의 한 부분일 뿐인데도 말이다.

'빼앗긴 대지의 꿈'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구 열강의 그늘이 짙게 드리운 남반구의 비극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조명하고 있다. 행동하는 사회학자이자 유엔인권이사회의 임원인 장 지글러의 작품.

  아들 녀석은 역사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한국사와 세계사를 곧잘 읽어댔고 문득문득 백제가 왜 멸망했는지, 르네상스가 무슨 뜻인지, 엄마는 왜 역사 얘기만 나오면 시큰둥하냐며 자못 무시할 때도 있는 것 같다(자격지심). 안 되겠다, 내 성향과 좀 멀더라도 교양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고, 책을 골고루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꼬부라져 읽게 된 책이 장 지글러가 쓴 『빼앗긴 대지의 꿈』이다. 이 책의 제목을 본 순간 나는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대학시절에 읽고 싶었던, 읽다가 졸음이 쏟아져 덮어버리고 말았던, 한 인디언 예언자의 구술 자료인 『빼앗긴 대지의 꿈 -인디안 예언자 검은 고라니의 말-』(1981년 출판)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은이도 내용도 달랐다. 똑같은 제목으로 두 권의 다른 책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언젠가는 인디언들의 구술 자료 『빼앗긴 대지의 꿈』도 읽으리라.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미국 인디안 멸망사-』라는 책 읽기도 끝을 보리라.  

  책의 겉표지는 한 흑인 소녀가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는 사진이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소녀의 손톱 밑 까만 때를 보고 있자니 슬픔과 분노와 증오가 교차한다. 결코 멈출 것 같지 않은 강대국의 폭력 속에서 속수무책 당하고 만 있는 저 어린것에게 무슨 말을 건넬 수 있단 말인가. 

우파(右派)라 불렸던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이 그의 멋진 아내와 함께 여러 나라를 순방했던 때 나는 그 나라가 저질렀고 현재까지 저지르고 있는 범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보수당의 영국 총리였던 데이비드 캐머런이 그의 아내와 함께 총리관저에 입성하는 사진이 신문마다 실렸던 것을 봤을 때도 별 느낌이 없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그저 멋진 서양, 유럽인들이라는 환상을 갖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저렇듯 신사적이고 모든 것을 포용할 것 같은 표정 이면에 독사의 혓바닥이 날름거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었다. 

사르코지가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세네갈을 방문하여 특유의 독설로 침략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기사를 접하고서야 나는 서양인의 오만과 독선에 몸서리가 났다. 프랑스는 계속 나이지리아에서 다국적기업이라는 명분 아래 질 좋은 석유를 값 싸게 빼앗고 있다. 

질 좋은 석유를 헐값에 빼앗기는 나이지리아는 제 나라 어린것들조차 굶겨죽일 지경인데, 설상가상 또 이 나라에서는 불법으로 금 채굴작업을 하던 ‘어린이 광부’ 111명이 납에 중독되어 죽었다는 기사가 난 적도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책 '빼앗긴 대지의 꿈'은 인간의 권리를 짓밟은 서양의 원죄와 인간의 권리회복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난 3세기 동안에도 제국주의는 저주스럽게 살아 있었다. 식민지 지배를 당했던 남반구 사람들은 결코 끝장나지 않은 제국주의로부터 또 다른 수탈과 지배를 당하고 있다. 

세계화, 세계무역기구,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FTA 등을 앞세워 다국적기업이라는 용병들을 거느린 신자유주의가 그것이지 않는가. 한 입으로는 군비축소, 핵확산 방지, 인권 등을 앞세우고 다른 입으로는 약소국들의 고혈을 쥐어짜서 거대 자본의 검은 뱃속을 채우고 있다.

  희망은 없는가. 장 지글러는 볼리비아의 원주민 출신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를 통해 희망을 찾는다. 그는 강대국에게 빼앗긴, 다국적기업으로 넘어간 광산과 석유 시설 등을 우여곡절 끝에 되찾는다.

가난한 조국을 파렴치하고 뻔뻔한 강대국들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그는 되찾은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고 외화를 벌어들이고자 대장정에 나섰다. 그는 60% 이상의 지지를 받고 재선에서 승리했다. 

그가 제발 어린것들의 손톱 밑 까만 때를 벗겨주기를, 절대로 제국주의를 포기 안 할 강대국과 거대 자본 앞에서 당당하기를 나는 원한다.

체 게바라를 위시한 양심을 가진 이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기를, 강대국들의 이중적 태도가 언제까지 가증스럽게 지구를 움직이고 있을지 - 어떻게 망하는지 그것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기를 나는 원한다. 

역사가 떼죽음을 반복한 정치사의 요약이 아니라 생활사(生活史)와 문화사(文化史)의 요체로 자리하여 평범한 사람들의 진솔한 얘기가 역사책에 기록되기를, 피와 죽음으로 점철된 글을 읽고 분노하듯 글 쓰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원한다. / 이현옥(우석대 도서관 사서)

글쓴이 이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