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2월 김이삭 씨가 전주 한옥마을에 있다.

20대 초반, 남다른 취미를 발굴했다. 유명인사의 사인이 아닌 일반인의 사인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인’ 속에 담겨 있는 개인의 특징을 그는 하나씩 수집해갔다. 수 백의 사인이 쌓일수록 그 안에 수 백의 시각이 담겼다. 레즈비언, 게이의 사인은 그의 시야를 한층 넓혀주었다. 이제는 ‘사인 수집’에서 그치지 않고 ‘사연, 스토리를 수집하겠다’는 김이삭 씨(23).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자신을 써달라는 그를 3월 16일 봄 햇살이 내리쬐는 전북포스트 사무실에서 만났다.

“미국과 남미를 여행하며 800명의 사인을 받았어요. 50개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 다음에 자기 나라에 오면 숙식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사인 한 장 받은 ‘팬’에게 하는 ‘서비스’로는 과한 반응이다. 그런데 김 씨에게 기자 역시 사인을 주고나자 ‘알 수 없는 유대’가 느껴졌다. 김 씨가 달라는 것은 단순히 이름을 쓴 종이가 아니었다. 이름이 아닌 사인을 요구한 것은 ‘남이 정해준 게 아닌 내가 정한 내 이름이 뭐냐’고 묻는 행위였다. 김 씨는 “사인은 세계에서 유일한 것, 자신을 상징하는 거잖아요”라고 웃는다. 덧붙여 사인 아래에 자신의 좌우명까지 적어 달란다.

▲ 김이삭씨가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서 만난 가이드     ▲ 김이삭 씨가 만난 '사인 제공자들'

‘사인수집가’는 단순히 ‘사인’을 수집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의 지침’을 수집하고 있었다. 사인을 한 이들이 숙식을 제공하거나 생면부지의 동양인을 자신의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여행을 시작한 건 우연이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1년 남짓 다니다 텍사스 주립대에 입학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입학과정을 예상보다 일찍 마치고 대학을 들어가자니 망설여졌다. 한 학기 4천만원인 등록금 부담이 컸다.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고 싶은 마음이 미국대학 입학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시작한 여행이다. 미국 동부와 서부를 중고차를 사서 달렸다. 만나는 사람들의 사인 아니, 그들의 삶의 지침을 마주하면서 말이다. 여행경비는 거의 들지 않았다. 숙박비와 식비가 경비의 반 이상을 차지하기 마련. 그에겐 숙식을 제공하겠단 ‘사인제공자’들이 즐비했다. 점심에 1달러짜리 패스트푸드 햄버거를 먹고 친구 집에 도착하면 만찬이 그를 기다렸다. 그렇게 미국과 미국 아래 남미를 돌아 800명의 사인을 들고 2015년 1월 말에 한국에 돌아왔다.

‘자고 일어나니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1년간의 여행기를 SNS에 연재했는데 그게 온라인 상에 돌고 돌아 그를 보고 알아보는 이들이 많았다. 청소년 진로컨설팅 회사와 강연자로 계약도 했다. 그리고 클라우드 펀딩(불특정 다수의 소액을 모음)을 통해 세계일주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 김이삭 씨는 2015년 3월부터 약 1년동안 세계여행을 하며 사연신청자를 대신해 만남을 이어간다.

'대신 만나러 갑니다' 세계 일주 프로젝트다. 김 씨가 ‘신청자의 만나고 싶은 친구, 가족’을 대신 만나 사인을 받고 신청자가 원한 미션을 이루는 형태다. 1년간의 세계일주 뒤 책을 낼 예정이다.

그는 말한다. “먼 타국에서 가족을 위해 고생하시는 기러기 아빠들에게 위로가 되고, 낯선 땅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도움을 받았던 현지인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함께 예쁜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좋은 인연들을 다시 만나보고 싶다면, 제가 당신의 메신저가 되어서 대신 만나러 갑니다” 사람과 대면해 온 그가 이제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 가교가 되는 셈이다.

800명 넘는 이들의 ‘삶’을 들여다본 깊이로 그는 또 다른 이들의 외로움과 기쁨을 함께할 준비가 됐다. 클라우드 펀딩에 참여하고 싶은 이는 관련 사이트(http://www.human-k.org/html/02_proj_support_view.php?sponidx=1062)에 접속하면 된다. 5천원부터 100만원까지 지원받는다. 지원한 이들은 모두 그가 가는 나라에 있는 친구, 가족을 상대로 한 ‘대리만남’을 신청할 수 있다. 지역은 동남아시아-서남아시아-동유럽-북유럽-러시아-몽골-중국이다.

2015년 3월 말 또는 4월초에 떠나는 김이삭 씨에게 1만5천원 이상을 지원한 경우 책이 출판되는 대로 받을 수 있다. 김 씨는 “곧 싱가포르 또는 대만으로 출국해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 갈 예정”이라며 “사인 수집 여행을 시작한 이후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 없이 매일 설렌다”고 말했다./윤성희 기자